제451화
엽이채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아들을 안고 놀아 주는데, 장박원이 안으로 들어와 침실로 가더니 벼루 하나를 들고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부군, 어디 가세요?”
엽이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를 안고 그의 뒤를 쫓아갔다.
“방금 전에 어머님께서 저보고… 보가 손을 부딪혀 생채기가 났다면서 한마디 하셨어요. 분명 유모가 안고 있었는데 절 나무라셨어요…….”
장박원이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울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불평을 늘어 놓고 있었다. 그는 속에서 짜증이 치밀었다.
“한마디 좀 하신 것뿐인데 울 게 뭐가 있소?”
그러자 엽이채는 더욱 억울해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부군은 이제 절 사랑하지 않는군요…….”
장박원은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랑하지 않는다니, 그런 말 마시오.”
장박원은 엽이채를 상대하기조차 귀찮아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 남은 감정은 오직 혐오뿐이었다.
전에는 억울해하는 엽이채의 모습을 가장 좋아했고 그녀가 몹시도 애처롭고 가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눈물을 머금고 자신에게 불평을 쏟아 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가 사랑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에 반해 엽연채는 기가 너무 세고 고압적이며, 비에 젖은 배꽃처럼 곱게 눈물을 흘리는 엽이채와 달리 귀염성이라고는 하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징징거리는 엽이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짜증과 혐오감이 극에 달하는 느낌이 들었다.
엽이채는 무슨 일만 있으면 울어댔다. 울어 대기만 했다. 울긴 왜 운단 말인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저만 쳐다보는데 왜 스스로는 방법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걸까? 하루 종일 이런저런 불평만 쏟아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자신이 아내로 맞이한 사람이 엽연채였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엽연채였다면 일이 생겼을 경우 눈물을 쏟으며 불평만 늘어놓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내가 왜 엽이채를 아내로 맞이했지? 나는 분명 엽이채가 아닌 엽연채와 정혼했었는데!’
“도련님!”
이때, 그의 사동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밖에서… 누군가가 도련님을 찾고 있습니다!”
장박원은 한시도 이곳에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으나 순간 자신이 무슨 일을 하려고 했었는지 까먹고 말았다. 손에 벼루를 들고 있던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리에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다.
측문으로 나가 보니 허름한 옷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중년 사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박원아…….”
장박원은 그를 보더니 낯빛이 확 변했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사내는 다름 아닌 엽승덕이었다.
엽승덕을 본 장박원은 마음이 몹시 복잡해졌고 속에서 울컥 구역질이 올라왔다. 전에는 엽승덕과 자신은 같은 처지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타파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엽승덕은 이런 지경이 되어 버렸고, 자신도 그리 좋은 처지는 아니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게 큰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세요?”
장박원은 새파란 낯빛으로 물었다.
“내가…….”
엽승덕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봤다.
“내가 너에게 돈을 좀 빌리고 싶구나.”
“제가 돈이 어디 있습니까!”
장박원은 굳은 표정으로 딱 잘랐다.
“박원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엽승덕이 화가 난 목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예전 일을 생각해 보거라. 네가 이채와 사랑의 도피를 했을 때, 혼수가 없었을 때 내가 너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더냐.”
엽승덕이 이 이야기를 꺼내자 장박원은 안색이 싹 변했다.
‘그래! 엽승덕, 이 늙다리가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장박원은 엽이채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가 붙잡혀 돌아온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의 부모와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엽연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강요했지만, 결국 엽이채를 아내로 맞이하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당시엔 자신도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엽승덕이 갑자기 튀어나와 ‘날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그런 결심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엽 백부가 제게 정말로 돈을 빌려주셨다고 해도 전 이미 갚아 드렸습니다.”
장박원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백부와 은정랑이 혼례식을 올렸을 때 제가 개인적으로 두 분께 선물을 적잖이 보내 드렸습니다. 그게 갚아야 할 돈을 포함한 거죠.”
엽승덕은 장박원이 갑자기 저와 은정랑의 혼사를 언급하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고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빌어먹을 여편네……!’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다시 엽승덕의 머릿속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자신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마자 그녀는 바로 자신을 걷어차 버리고 다른 사내와 도망을 갔다. 게다가 자신의 앞에서 역겨운 짓거리까지 했다.
“부조금을 논하자면… 네가 이채와 혼례식을 올릴 때 나는 적게 줬느냐? 지금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너도 날 도와주지 않으려는 게냐? 정말로 아무것도 내놓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엽승덕은 목청을 돋우며 장박원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옥패 하나와 손에 들려 있는 벼루 하나를 쳐다봤다. 엽승덕은 부유하게 생활했던 사람이기에 이 두 개의 물건을 보자마자 저당을 잡히면 분명 은화 백 냥 정도는 받아 낼 수 있다는 걸 알아보았다.
장박원은 그의 눈길에 낯빛이 확 변하더니 할 수 없이 소매 안을 뒤적거려 작은 은덩이들을 꺼내 엽승덕의 손에 쥐여 주었다.
“더는 없어요! 앞으로 다시는 절 찾아오지 마세요!”
그리 말하고는 쾅 소리를 내며 문을 세게 닫아 버렸다.
엽승덕이 손을 펼쳐 보니 고작 은화 두 냥이 들려 있었다. 그는 안색이 확 변했다. 겨우 이 정도 돈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은정랑과 함께 지내고 있었으니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생 좀 하면 뭐 어떠한가? 은화 두 냥이면 얼마간은 즐겁게 지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젠 자신을 지탱해 주던 마지막 신념마저 무너지고 말았으니 엽승덕은 엽씨 가문에서 호의호식하던 생활을 한없이 그리워했다. 엽씨 가문이 작위를 박탈당했지만 상관없었다. 적어도 먹고 입는 걱정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는 끼니때마다 제비집을 먹고 고기와 생선을 마음껏 먹은 후 배가 부르면 관아에 가서 한가롭게 돌아다니던 그 시절을 한없이 그리워했다. 퇴청하면 동료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간식거리를 즐기곤 했다.
하지만 당장은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엽학문의 성격상 그가 자신을 받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한편, 장박원은 측문을 떠난 후 급히 후문을 향해 걸어갔다. 내일 주씨 가문에서 열리는 연회에 죽어도 가고 싶지 않아 미리 피해 있으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가 몇 발짝을 떼지도 않았는데 사동 두 명이 달려와 그를 붙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또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그 말에 장박원은 낯빛이 변했고 핑계를 대려는 찰나, 그 사동이 선수를 쳤다.
“어르신께서 서재에서 보자고 하십니다.”
안색이 더욱 어두워진 장박원은 두 사동과 밀치락달치락했으나 끝내 바깥뜰에 있는 서재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장박원이 사동들에게 밀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장찬이 위엄 서린 모습으로 창문 밑에 놓인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몸을 움츠리며 안으로 들어오는 장박원의 모습에 장찬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디를 가려는 것이냐?”
장박원은 낯빛이 하얗게 질리더니 우물쭈물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게… 함께 수학하는 벗 둘과 약속이 있습니다…….”
“넌 염치도 없는 것이냐?”
장찬이 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연회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냐? 부끄럽지도 않으냐?”
어깨가 축 처진 장박원은 고개를 숙이고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내일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앞으로 밖에 나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장찬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처소로 돌아가거라!”
석상처럼 굳어 있던 장박원은 얼굴 근육을 쉴 새 없이 떨더니 두 다리를 달달대며 겨우 그곳을 떠났다.
장찬은 그 꼴사나운 뒷모습을 쳐다보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장박원과 엽이채는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오늘 궁에서 베푼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일은 주씨 가문에서 연회를 베푸는 것이고 두 가문은 친척 관계였다. 또 장박원과 주운환은 그런 관계이니 장박원이 참석하지 않으면 장씨 가문은 사람들에게 더욱 비웃음을 살 것이며 도량이 좁고 옹색한 사람들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것이다.
게다가 방금 전에 하인이 알리기를, 엽연채가 사람을 보내 초대장을 건네며 꼭 참석해야 한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러니 더더욱 가지 않을 수 없었다.
* * *
주씨 가문으로 돌아온 추길은 장씨 가문 사람들이 보인 태도를 엽연채에게 보고했다. 엽연채는 비웃음을 짓더니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나한상에 누워 여유롭게 화본을 봤다.
이튿날 이른 아침, 주씨 가문에선 축하연이 열렸다.
이날은 붉은 칠을 한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집안 전체에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등롱을 달아야 할 곳은 전부 등롱을 달았고 꽃을 심어야 할 곳은 전부 꽃을 심었다. 그리고 오늘 연회석은 전과는 다르게 득승루得勝樓에 마련됐다.
득승루는 원래 주씨 가문에서 큰 연회를 베풀 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과거엔 매년 주씨 가문 장수들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때마다 이곳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득승루 아래엔 연극 무대가 마련되어 있고 그 주위론 사면에 2층 누각이 세워져 있어 좌석 백 개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다.
영원히 폐쇄되리라 여겼던 이곳이 이렇게 다시 빛을 보게 되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른 아침 제일 먼저 주씨 가문을 방문한 손님은 바로 엽씨 가문 사람들이었다.
막 아침 식사를 마친 엽연채가 잠시 쉬다가 밖으로 나설 채비를 하려는데, 밖에 있던 추길이 뛰어 들어왔다.
“마님, 할아버님과 할머님께서 오셨습니다.”
엽연채는 깜짝 놀라 얼른 머리를 손질하고 밖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나가 보니 묘씨와 둘째 부부, 셋째 부부, 엽미채, 엽영 등이 걸어오고 있었다.
엽학문은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서서 턱을 치켜든 채 뒷짐을 지고 있었다. 학문鶴紋이 들어간 회백색 창의氅衣(소매가 넓고 뒤 솔기가 갈라져 있음)를 입고 있었는데, 풀을 먹여 아주 빳빳해 보였다. 엽학문은 희끗희끗한 염소수염을 치켜들고 허정거리며 천천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