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0화
“가정할 필요도 없는 일이죠!”
혜연은 풉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작년에 장박원을 빼앗았을 때만 봐도 얼마나 우쭐댔어요. 아주 마님을 짓밟으려고 안간힘을 썼잖아요. 혼례식뿐만 아니라 이튿날 친정으로 인사를 왔을 때도 마님이 오지 않으실까 봐 걱정을 했었죠.
오지 않으면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거라면서 먼저 약을 올렸잖아요.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도 하면 안 된다고요! 본인이 잘나가는 모습을 보게 하려고, 마님과 마님 어머니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려 짓뭉개려고 아주 안달이 났었죠!”
엽연채는 그 말을 들으며 깔깔거리더니 손에 든 화본을 던지며 분부했다.
“어서 이채에게 첩자를 보내거라. 그 둘에게 내일 반드시 참석하라고 전해!”
그러자 혜연은 미소를 지으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마님도 참 고약하세요.”
“고약하다니. 그 사람들은 고약하게 굴어도 되고 우린 그러면 안 되니?”
추길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반박했다.
“나리께서 출정하셨을 때 그 사람들이 달려와 불난 집에 부채질했던 거 기억 안 나? 나리께서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저주를 퍼부었잖아! 우리 집안에 재수 없는 일이 생길 때마다 찾아와 짓밟으려고 했어! 마님, 제가 지금 첩자를 전달하러 가겠습니다.”
엽연채도 가볍게 콧방귀를 뀌더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반격해 줘야 마땅했다. 왜 받은 대로 되돌려 주면 안 되는가? 자신이 참담한 지경일 때는 다른 사람들이 비웃고 짓밟게 내버려 두고, 잘나갈 때는 신분에 걸맞게 우아하게 행동하며 괜찮다고 말해야 한다는 말인가?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주 쩨쩨하고 뒤끝 있는 사람이지!’
추길은 침실로 들어가 첩자 한 장을 꺼내 왔고 엽연채는 내용을 작성한 뒤 추길에게 건넸다.
조그만 마차에 탄 추길은 경인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장씨 가문에 도착했다.
추길이 장씨 가문 수화문으로 들어가자 마마 한 명이 얼른 웃으며 다가와 길을 안내했다.
주씨 가문은 이제 예전의 주씨 가문이 아니기 때문에 마마는 추길을 곧장 본채의 맹씨에게 데려갔다.
자수를 놓고 있던 맹씨는 추길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다가 허허 웃으며 알은체했다.
“어머, 추길이가 아니냐? 오늘 어떻게 시간이 났나 보구나.”
맹씨는 주씨 가문이 아주 탐탁지 않았다. 두 가문은 신부를 바꿨기 때문에 장박원과 주운환은 알게 모르게 힘겨루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향시를 치른 후 주운환이 장박원을 앞지르게 되자 맹씨는 속으로 불만을 참고 있었다. 그 이후로 주운환은 단순히 장박원을 앞지른 게 아니라 그를 짓밟고 깔아뭉갰으니 맹씨에게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부터 맹씨는 더 이상 주운환에게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춘시를 치른 후로 장박원은 충격을 받아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고, 국자감에서의 성적도 급격하게 떨어졌다. 심지어 지금은 공부를 하러 가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맹씨는 주운환에게 더욱더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그가 출정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후련해하면서 ‘콱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저주까지 퍼부었다.
그런데 웬걸, 주운환은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전공을 세워 작위까지 받아 버렸다.
맹씨는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고 당장이라도 주운환에게 달려가 그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기랄. 출정할 거면 장원 급제는 왜 한 거야? 괜히 내 아들 박원이만 큰 충격을 받게 됐잖아!’
그리하여 그녀는 오늘 주운환의 환영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추길의 앞에서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너희 가문 사람들은 연회에 참석하려고 궁에 들어가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시간이 났나 보구나!”
“예, 부인.”
추길은 인사를 건네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집안분들이 궁에서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셨다가 방금 전에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연회에서 부인과 큰며느님의 모습은 보이시지 않길래 저희 셋째 마님께서 걱정이 되어 저를 보내 두 분을 만나 뵙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맹씨는 헛웃음을 지었다.
“부인이 참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는구나. 오늘 아침에 머리가 좀 아프길래 외출하지 않았단다.”
추길은 한쪽에 놓인 자수틀을 힐끗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본론을 꺼냈다.
“지금 보니 많이 괜찮아지신 것 같군요. 내일 저희 가문에서 연회를 베푸는데 부인도 꼭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하, 물론이다.”
말만 호쾌하지, 맹씨는 표정이 확 굳어졌다.
“참, 며느님은 어떻게 되신 건가요?”
추길이 말했다.
“그게… 나도 잘 모르겠구나. 지금 바로 며늘아기를 불러오너라.”
맹씨는 옆에 있던 여종을 쳐다봤다. 여종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 엽이채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엽이채는 추길을 보더니 낯빛이 확 변했다. 반면, 추길은 미간을 꿈틀거리며 엽이채를 관찰했다. 눈언저리가 좀 거무스름하게 그늘진 것이, 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 게 분명했다.
“부인.”
추길이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리자 엽이채는 입을 오므리며 거짓 웃음을 지어냈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다.”
“오늘 궁에서 연회가 있었습니다. 장씨 가문은 3품 관리의 집안이고 오늘 연회는 저희 셋째 나리를 위해 열린 것인데, 처제와 동서인 부인과 나리께서는 어째서 오지 않으셨습니까?”
엽이채는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둘러댔다.
“몸이 편치 않아서… 아파서 가지 못했다.”
상석에 앉아 있는 맹씨의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추길은 개의치 않고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씨 가문은… 작년 혼례 때와 마찬가지로 또 도둑이 들어 독약을 타는 바람에 단체로 병이 났나 보네요?”
이 공격에 맹씨는 표정이 말이 아니었고 엽이채는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다.
작년에 혼례식을 피해 사랑의 도피를 했던 때를 생각해 보니, 그때 자신은 득의양양해하며 무척 즐거워했다. 도둑이 약을 타서 몸져누운 일 따위는 당연히 없었고 그런 구실을 만든 장박원이 똑똑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이야기가 입에 오르자 심기가 불편했다.
“내일 저희 주씨 가문에서 연회를 베푸니 부인께서는 저희 셋째 마님의 체면을 봐서 꼭 참석해 주셔야 합니다.”
추길이 웃는 낯으로 강조하니 엽이채는 안색이 확 변했고 화가 나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 빌어먹을 년! 그 계집애가 잘난 척을 하려고 일부러 날 찾는 거야. 잘난 척할 게 뭐가 있다고. 그래 봤자 일개 후야…….’
그래, 그는 후야였다. 후야가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엽이채는 요 며칠간 쉼 없이 눌러 놓았던 후회의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주운환은 원래 나와 정혼했던 사내였어! 원래대로라면 내가 후 부인이 되었을 거야. 그런데 어째서 그 빌어먹을 년이 이득을 보는 거지? 그에 반해 난… 지금 뭐가 된 거야?’
과거 자신은 분명 3품 고관의 적장손인 장박원을 탐냈었다. 이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가. 게다가 그 자신도 재능이 넘치는 소년 수재였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장박원은 여전히 3품 고관의 적장손이지만 자신은 이제 그 신분이 눈에 차지 않았다. 자기 힘으로 얻어 낸 주운환의 존귀한 지위와 비교해 보면 이렇게 지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장박원은 소년 수재일 뿐만 아니라 젊은 나이에 거인이 되었다. 하지만 전에 장원이었던 주운환의 명성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어디 그뿐인가. 근래 장박원은 폐인이 되어 하루 종일 허송세월,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설령 장박원이 앞으로 분발하여 장원이 된다고 해도 주운환이 지금 이룬 성취와 비교해 보면 우스갯거리가 될 뿐이었다.
자신이 요즘 매일같이 머리를 움켜쥐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건 하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엽이채는 후회와 질투가 불러온 괴로움 때문에 당장이라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건 원래 자신의 것이었고 자신이 누려야 했을 존귀함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그걸 엽연채에게 내주어 엽연채가 이득을 보게 된 것이다. 환영회 따위에 가고 싶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엽연채가 집으로까지 사람을 보내 첩자를 전달하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부인?”
추길이 그녀를 쳐다보며 쐐기를 박았다.
“지금 보니 부인께서 기운을 차리신 것 같네요. 그러니 내일 꼭 오셔야 합니다? 안 오시면 저희 마님의 체면을 세워 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엽이채는 표정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이……! 지금 잘난 체를 하는 게냐?”
“부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추길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전에는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부인께서 혼례식을 올리고 친정으로 인사를 오실 때 저희 마님께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오지 않으면 부인 체면을 세워 주지 않는 거라고요.”
그 말에 엽이채는 말문이 막혔고, 기세등등한 추길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엽이채는 매서운 눈빛을 보이더니 냉소를 지었다.
“물론이다! 걱정 말거라, 꼭 갈 테니!”
“그럼 다행이고요.”
말을 마친 추길은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고 엽이채는 입술을 물고 있었다.
상석의 맹씨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쓱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들어 보니 그저께 보가 손을 부딪혀 다쳤다고 하던데, 너는 아이를 어찌 돌보는 것이냐?”
엽이채는 낯빛이 변하더니 주눅 든 목소리로 변명했다.
“유모가 안고 있다가…….”
그러자 맹씨는 낯빛이 한층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꾸짖었다.
“유모가 안고 있었다고 해도 네가 주의를 기울였어야지.”
엽이채는 감히 찍소리도 낼 수 없었고, 맹씨는 더 나무랄 마음도 들지 않아 그저 그녀를 내보냈다.
“됐으니 가 보거라!”
맹씨는 엽이채가 꼴도 보기 싫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엽이채는 맹씨가 자신에게 냉담하게 굴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엽씨 가문이 몰락한 후로 맹씨는 자신을 곱게 보지 않았고 항상 냉소적으로 대했다.
“예, 어머님.”
엽이채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후 한마디 덧붙였다.
“이따가 보를 데리고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오겠습니다. 보가 어머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맹씨는 손자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자 그제야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알겠다.”
엽이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
지금 엽이채는 사는 게 아주 녹록지 않았다. 그녀는 엽연채를 질투하며 괴로워했지만 일단은 자기 생활부터 제대로 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