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9화
엽연채가 조앵기, 제민과 함께 문 입구를 향해 걸어가 보니 청휘원 입구가 나왔다. 그곳에는 소녀들이 모여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는데 수줍은 얼굴로 뒤쪽을 쳐다보고는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주운환이 뒷짐을 진 채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엽연채를 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 왔다.
“잘 놀고 있었습니까?”
엽연채는 그를 보더니 설레어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네, 즐거웠어요.”
“갑시다.”
주운환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허리를 살포시 끌어당겼다. 그러자 엽연채는 그의 몸에 살짝 기대며 이렇게 물었다.
“네. 부군께서는 방금 전에 어디 갔었어요?”
“상서방에 가서 폐하와 중요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이제 연회가 시작되니 먼저 당신을 데리러 왔습니다.”
부부는 그리 말하며 함께 걸음을 뗐고 엽연채는 돌아서더니 제민과 조앵기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먼저 그곳을 떠났다.
제민이 표정이 굳어진 채 조앵기와 함께 몇 걸음 내딛자 멀지 않은 곳에서 냉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양왕의 모습이 보였다.
양왕은 매력적인 얼굴로 혐오감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쓱 보더니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에 조앵기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른 치맛자락을 들고 그의 뒤를 쫓았다.
제민은 입꼬리를 삐죽거리더니 ‘흥’ 콧방귀를 뀌었다. 부부의 염장질에 그녀는 기분이 언짢았고, 특히 뒤의 두 부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금세 대전에 도착했고, 밖에 있던 어린 환관이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연회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 주운환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주씨 가문 자리는 오른쪽 하좌의 첫 번째 자리에 마련되었고, 맞은편 왼쪽의 첫 번째 자리는 양왕의 자리였다.
제민은 혼자이기 때문에 그녀의 자리는 주씨 가문 쪽으로 마련되어, 그녀는 주묘화와 함께 앉았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후 정선제와 정 황후 등도 자리에 앉았고 연회가 시작되었다.
조앵기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엽연채를 보더니 아주 기뻐하며 그녀를 향해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미소를 지어 보였고, 양왕은 그 모습을 보고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전병 하나를 집어 들어 그녀의 얼굴에 문댔다.
“우읍…….”
그가 전병으로 얼굴을 문대자 얼굴이 기름기로 범벅이 된 느낌이 들어 조앵기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손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았고 그제야 감정을 좀 추슬렀다.
이어 무희들이 나와 춤을 출 때쯤에는 조앵기는 토자포兔子包를 먹는 데 열중했다.
무희들이 춤 한 곡을 추는 사이 토자포 한 개가 사라지자 양왕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조앵기는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기분이 매우 좋은 정선제는 주운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쪽에 있던 정 황후는 주운환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옷을 갈아입는다는 말을 건네고는 사 마마와 함께 연회석을 떠났다.
정 황후는 사 마마와 함께 측간에 들렀다가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청석판이 깔린 오솔길 양쪽으로는 계화 덤불이 심어져 있었고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이따금씩 상쾌한 향기가 전해졌다.
정 황후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운환이 낯이 좀 익구나. 한데 어디서 봤는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러자 정 황후의 손을 잡고 있던 사 마마가 말했다.
“생각이 났사옵니다. 운하를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운하라니?”
정 황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새로 궁에 들어온 비빈妃嬪이더냐?”
“아닙니다. 운하 공주를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그분의 장녀 말입니다!”
사 마마가 목소리를 낮춰서 알려 주자 정 황후는 깜짝 놀라더니 이어 낯빛이 확 변했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동조했다.
“그래……. 확실히 그 애를 닮은 것도 같구나.”
어떤 기억들은 너무 오래되어서 갑자기 떠올리려니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사 마마가 분명하게 짚자 정 황후는 그제야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았던 원비元妃 소씨의 장녀 운하 공주가 떠올랐다.
나중에 소씨 가문에 일이 터지자 운하 공주는 스스로 소 황후와 함께 동주桐州로 가겠다고 청을 올렸고, 그날 이후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마마, 주운환이 운하 공주와 무슨 관계가 있지는 않을까요?”
사 마마가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 정 황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쪽에 자리한 꽃밭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망할 계집애는 진작에 죽었고 시체도 운반되어 왔었네.”
그녀는 그리 말하며 ‘흥’ 하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이지, 있으나마나 한 건 죽었고 죽어야 되는 건 살아 있으니 원.”
지금 황제는 태자를 마음에 두고 있긴 하지만 양왕도 어느 정도 성총을 받고 있는 데다 그는 늘 뒤에서 수작을 벌였다. 자기 자리가 안정되는 걸 꺼려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 황후는 이어서 말했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 몇 년 전에 폐하께서 누구의 딸이 그 공주를 닮았다고 말씀하셨었네. 작년에 예부상서가 들인 며느리도 나와 꽤 닮았다고 했었지. 그걸 이용해 내가 양어머니가 되어 주기를 은근히 바라더군.”
그녀는 그리 말하며 냉소를 지었다.
“마마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사 마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운하 공주는 출궁할 때 열 살에 불과했고 벌써 여러 해가 지난 터라 두 사람은 이미 그녀에 대해 대략적인 부분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렴풋이 그녀와 주운환이 조금 닮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주운환은 어쨌든 그 빌어먹을 공주와 조금 닮았고 그 공주는 양왕 전하의 친누님이었으니…….”
사 마마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양왕 전하께서 주운환이 운하 공주와 닮았다는 이유로 그자를 포섭하려고 하지는 않을까요?”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겐가?”
정 황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양왕이 궁으로 돌아왔을 때 겨우 여섯 살이었네. 여섯 살짜리가 뭘 기억할 수 있었겠어? 자네나 나나 어렸을 때 봤던 사람들 중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긴 한가?”
사 마마는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동조했다.
“마마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어마마마.”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자가 꽃밭에 앉아 있는 그녀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어마마마, 왜 여기에 앉아 계십니까?”
“태자, 마침 잘 오셨네.”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님인 운하 공주를 기억하는가?”
운하 공주가 출궁할 때 마침 태자는 여섯 살이었다.
“운하 공주라니요?”
태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태자의 큰누님 말이네.”
“아…….”
태자는 여전히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사람을 떠올렸다.
“그런 사람이 있었죠. 기억에 남아 있는 특별한 건 없습니다.”
정선제가 한동안 그 딸을 그리워하며 여러 번 이야기했기 때문에 태자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 보게!”
정 황후가 그리 말하며 사 마마를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마마, 사 마마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별일 아니네.”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운환이 그 아이를 좀 닮았기에 그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던 것뿐이네.”
“그렇습니까?”
태자는 턱을 매만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거였군요. 어쩐지 아바마마께서 그자를 특별히 총애하고 계세요. 전에 그자가 장원이 되었을 때도 자주 상서방으로 불렀었고 최근에는 적염전갑赤焰戰甲도 그자에게 하사하셨어요. 알고 보니 죽은 사람을 닮았던 거군요!”
“황제 폐하께서 그자를 편애하시는군요.”
사 마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견을 냈다.
“그 사람을… 포섭하는 게 가장 좋을 성싶습니다. 양왕비 마마가 엽연채와 관계가 좋습니다.”
그러자 태자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어리석은 여인이 뭘 할 수 있겠어. 올림머리를 만지면서 놀릴 때나 재미있는 여인이지.”
이 이야기를 언급하자 정 황후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앵기는 어릴 때 궁에 들어와 양왕, 태자 등과 함께 소꿉장난을 하면서 컸다. 그녀는 어릴 때 양쪽으로 올림머리를 하는 걸 좋아했고, 태자는 그녀의 올림머리를 만지며 놀다가 양왕에게 밀려 물에 빠지는 바람에 거의 죽을 뻔했었다. 한겨울에 일어났던 일이라 태자는 꼬박 한 달이나 앓았었다.
“어마마마, 주운환을 포섭하는 일은 걱정 마세요. 제가 이미 계책을 생각해 놓았습니다.”
태자의 품위 있는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모자는 그곳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대전으로 돌아갔다.
정 황후는 주운환을 한번 쳐다보고는 더 이상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주운환의 생김새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원래 이 세상에는 닮은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애초에 주운환과 운하 공주가 그렇게 닮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이미 2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기에 운하 공주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 있었다.
미시未時(오후 1시~3시)가 되자 연회는 파했고 모든 대신들과 그 가족들은 잇달아 집으로 돌아갔다.
* * *
주 백야는 집으로 돌아온 후 사람들을 시켜 내일 있을 집안 연회를 준비하게 했다. 주운환이 후야가 됐음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였다.
일상원에 앉아 있는 진씨는 바쁘게 오가는 하인들의 모습을 쳐다보더니 낯빛이 어두워졌다. 불현듯 어제 서씨 가문에서 서 공자가 한 말, 자신은 죽어도 파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말이 또 떠올랐다. 그녀는 화가 나 가슴을 움켜쥐었다.
만약 자신들이 기어코 파혼하려고 한다면 서 공자는 주운환 앞에서 소란을 피울지도 모르고, 그리되면 주운환은 분명 서 공자 편을 들어주며 주묘서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할 것이다.
진씨는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흑, 흐윽…….”
하좌에 앉은 주묘서는 손수건을 들고선 슬피 울고 있었다.
이렇듯 우울하고 참담한 일상원과는 달리, 궁명헌 쪽은 아주 화목하고 즐거웠다.
서차간의 나한상에서 화본을 넘기고 있는 엽연채에게 추길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붙였다.
“참, 오늘 궁에서 베푼 연회에서 이채 아가씨는 보셨어요?”
“하, 그 지질한 아이가 거기가 어디라고 왔겠어.”
혜연이 백자 찻주전자와 찻잔을 올린 쟁반을 가져오면서 제 주인보다 한발 먼저 대꾸했다.
“내일 우리 주씨 가문에서 열리는 연회에도 그 부부는 분명 오지 않을걸.”
이 말에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너희들이 말하지 않았으면 걔를 완전히 잊을 뻔했구나. 엽이채 집안에 이런 경사가 있었다면 걔는 어떻게 했을 것 같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