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7화
진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정 마마는 낯빛이 창백한 진씨를 보고 얼른 그녀를 부축하며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다.
“파렴치한 작자들 같으니!”
서 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아들아, 그 주운환이라는 사람과 아는 사이냐?”
서 대인이 얼른 서 공자에게 묻자 그는 멋쩍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전 그분을 알지만 그분은 저를 모릅니다. 전에 황제 폐하께서 과거 시험 합격자들에게 베푼 연회에서 제가 함께 수학하는 벗들과 함께 그분에게 가르침을 청한 적이 있을 뿐이지요. 그런데 그분은 정말로 겸손하고 예의 바른 분이셨어요. 절대로 이런 파렴치한 일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리 말하는 그의 낯빛은 조금 하얗게 변해 있었다.
“저 두 마귀할멈이 권세에 빌붙고 호가호위를 하는 부류여서 절 싫어하는 것뿐이에요. 하나 전 진심으로 주 대소저를 좋아합니다! 그러니 혼인 상대를 바꾸는 건 어림도 없습니다!”
서씨 가문 부부는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사십 대 초반인 그들에게 평생 자식이라고는 이 귀하디귀한 아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줬다. 게다가 순순히 진씨의 뜻을 따라 주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 * *
진씨는 자신이 어떻게 집에 돌아온 지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고 너무도 분이 치민 나머지 조금 멍한 상태였다.
일상원에서 진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주묘서는 진씨를 보자마자 그녀에게 달려왔다.
“어머니……!”
하지만 진씨의 표정을 보더니 일이 성사되지 않았음을 알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정 마마가 진씨 대신 말했다.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신부를 바꾸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주묘서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어쨌든 난 시집가지 않을 거다! 죽어도 안 갈 거야!”
* * *
일상원 쪽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궁명헌도 마찬가지였다.
분가가 확정되자 엽연채와 주운환은 정원에 있는 파초나무 아래에 앉아 후부를 어떻게 꾸밀지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곳은 두 사람의 집이니 잘 꾸며야만 했다.
후부는 정륭가에 위치했는데, 그 일대는 황궁과 가까워 권신이나 황제의 친척들이 살았고, 태자와 양왕도 그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마님, 조복을 깨끗이 세탁해 잘 다려 놓았습니다.”
추길이 다가오며 미소 띤 얼굴로 고했다.
그녀의 손에는 쟁반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금색이 섞인 보라색 옷이 한 벌 놓여 있었다. 진주를 상감하고 물총새의 깃을 넣어 만든 포복袍服과 예관禮冠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베푸는 연회에서 조복을 입은 후에 어떤 옷으로 갈아입어야 좋을까요?”
본디 봉호를 받은 사람은 황제를 알현할 때 자신의 지위에 걸맞게 치장을 해야 하고 조복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대제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비교적 느슨한 편이었다. 아름답게 치장하기를 좋아하는 여인들은 황제를 알현한 후에는 단조로운 조복을 벗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너랑 혜연이가 결정하면 돼.”
엽연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네.”
추길은 대답을 한 뒤 떠날 채비를 했다.
“이 조복은…….”
그때, 주운환이 추길의 손에 들린 쟁반을 보며 어리둥절했다. 그가 기억하기론 2품의 조복은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째서 보라색이지?”
엽연채는 까르르 웃더니 맑고 커다란 두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1품 부인이 되었기 때문이죠!”
주운환의 몸이 경직되자 추길이 씩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나리께서는 모르셨겠지만 마님께서는 이미 1품 부인이 되셨어요. 마님과 현주께서 함께 북연의 바둑기사들을 이기고 나리를 위해 무려 십만 말의 쌀을 얻어 내셨기 때문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리는 그 쌀을 드셔 볼 기회를 얻지 못하셨네요.”
이야기를 들으며 엽연채를 쳐다보는 주운환의 눈빛은 점점 더 부드러워졌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안다. 양왕 전하께서 서신을 보내셨는데 그 일이 적혀 있었지.”
그는 그리 말하며 손을 뻗어 엽연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인, 정말 대단합니다. 내가 변방에서 대장군으로 싸우고 있을 때 부인께서도 도성에서 날 위해 싸워 주셨군요.”
엽연채는 달달한 기분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작게 콧방귀를 뀌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그 대결에서 바둑을 얼마나 잘 뒀는지 모르죠?”
주운환은 조금 우쭐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랬습니까? 알고 보니 내 부인이 바둑 고수였군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전 대제 최고예요!”
“정말 대단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주운환은 얼른 그녀를 칭찬해 줬다.
“자자, 오늘 부군이 운이 좋네요. 제가 한 수 가르쳐 줄게요!”
엽연채는 바둑을 둔다는 생각에 흥이 절로 나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당장 한 판 붙으려고 했다.
“좋습니다.”
주운환도 하하 웃으며 흔쾌히 응했다.
추길은 얼른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바둑판 하나를 들고나오더니 파초나무 아래에 놓인 돌 탁자 위에 바둑판을 올려 두었다.
“제가 흰 돌을 잡을 거니까 부군은 검은 돌이에요! 먼저 돌 다섯 개를 두게 해 줄게요!”
엽연채의 의기양양한 목소리에 주운환은 아주 겸손하게 고마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부인.”
엽연채는 우쭐했고 그가 네 귀퉁이에 다섯 개의 돌을 먼저 놓자 그제야 대결이 시작됐다. 그런데 두 사람이 스무 수 정도를 두고 나자 엽연채는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줄곧 자신의 바둑 실력에 대해 큰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제민과 해주 등의 고수를 만나서 자신의 뛰어난 실력을 증명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실력은 틀림없이 아주 뛰어났다. 그것도 아주아주! 그러니 남편이 과거 시험에 합격했고 전투에 능하다고 해도 자신을 이길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무 수 정도를 두고 나자 그녀는 주운환이 강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중반에 이르자 자신이 졌음을 알게 되었다.
주운환은 가련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얼른 이렇게 말했다.
“이 판은 없던 것으로 합시다. 부인이 몇 수 물려줬으니 다시 두는 게 좋겠군요.”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할 수 없이 바둑판의 돌을 거두며 그를 째려봤다.
“진지하게 둬요. 안 그러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두 사람은 다시 바둑을 두었고 중반에 이르자 엽연채는 또 지고 말았다. 그녀는 무척 억울해했다.
“다시 합시다. 다음에는 분명 이길 겁니다.”
주운환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세 번째 판에서 주운환은 티 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져 줬고 마침내 엽연채는 만족해하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둘 때는 승패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주운환 앞에서는 자신이 반짝반짝 빛나기를 바랐다.
부인이 기뻐하자 주운환도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는데, 이만 저녁 식사를 할까요?”
“네!”
엽연채는 즐거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한 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나자 엽연채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주운환이 자신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음? 침상이 바뀐 것 같지 않습니까?”
주운환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침상은 커다란 발보상으로, 해당화 문양과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용과 봉황 문양이 조각되어 있었고 정교하고 화려했다.
주운환은 어제저녁에는 너무 급했던 나머지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엽연채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당연히 바꿨죠! 부군이 전에 쓰던 그 낡고 작은 침상은 제가 진작에 바꿨어요.”
“아니, 부인이 전에 자던 침상에는 바깥쪽에 발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수납장뿐만 아니라 발판도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예전보다 더 큽니다.”
주운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함께 쓰기에 더 알맞겠군요.”
그 말에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작게 툴툴거렸다.
“안 바뀌었거든요. 당신이 잘못 본 거예요.”
그러자 주운환은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내가 잘못 봤나 봅니다.”
엽연채는 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이 생각을 하다 보니 엽연채는 한 가지 일이 또 떠올랐다. 그건 바로 주운환이 자신을 아내로 맞이하지 않겠다고 했던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에게 아내로 맞이하겠다거나 좋아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은 그의 입맞춤 한 번에 그렇게 넘어갔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엽연채는 마음이 우울해졌고 화도 좀 났다. 하지만 자신들은 이미 진짜 부부가 되었으니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게 되면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없었던 일로 하자니 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늦었으니 이제 쉽시다.”
주운환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다가 또 눈을 치켜뜨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심각하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몸이 근질근질해 엽연채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그런데 침상에 눕자마자 엽연채가 그를 발로 밀어냈다.
“저리 가요!”
주운환과 엽연채 사이에는 순간 정적이 흘렀고 주운환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부인, 갑자기 왜 화가 났습니까?”
엽연채는 그를 쳐다보더니 픽 웃으며 대꾸했다.
“아. 화난 게 아니에요. 그냥 앞으로는 따로 자요. 당신은 난죽거에서 자요.”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주운환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나랑 부부가 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어제 일은… 실수였어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시선을 피했다. 주운환은 나지막이 웃으며 엽연채를 자기 품으로 확 끌어안았다.
“미안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에게서 잘못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자 엽연채는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전에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운환은 자신의 턱을 그녀의 정수리에 대며 부드러운 어조로 진심을 건넸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부인입니다. 부인께 첫눈에 반했지요. 그 말을 꺼내기 전부터 저는 부인을 좋아했고, 부인이 사당에 와서 저와 함께 불경을 필사할 때 더 좋아하게 됐습니다. 부인께서 저를 위해 국을 준비하고 저를 위해 옷을 지어줄 때마다… 조금씩 부인께 스며들었습니다. 그렇게 이제는 부인을 연모하게 되었어요.”
엽연채는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달달한 기분이 들었고 얼굴에는 감동의 빛이 어리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당신이 제일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