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44화 (444/858)

제444화

엽연채와 주운환은 한참 동안 매씨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매씨가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다.

“할머님, 일단 물부터 좀 드세요.”

엽연채는 얼른 몸을 돌려 끓인 물을 한 잔 따랐다. 그러고는 수저를 들어 천천히 그녀에게 물을 떠먹여 줬다.

매씨는 엽연채가 떠 주는 물을 조금 마시자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주운환에게 향했다. 소년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고 높게 뻗은 대나무처럼 고아하면서도 기운이 넘쳐 보였다. 냉담한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화려하면서도 청수한, 범상치 않은 외모였다.

“얘야… 이리 와 보거라. 얼굴 좀 보자꾸나.”

매씨는 시야가 희뿌옇게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주운환은 앞으로 다가와 침상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엉거주춤 앉더니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매씨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이어 감동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셋째야, 얘야……. 이 할미와 손자가 십여 년 동안 얼굴도 보지 못했구나. 그런데 네가…….”

주운환은 그녀의 나이 든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전 아직 아이가 없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제가 상을 치러야 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매씨는 말문이 막혀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말거라. 이 할미는 네 발목을 잡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넌 돌아가서 열심히 노력하거라.”

“감사합니다. 할머니.”

주운환이 조금 감동받은 투로 대답했다. 이에 엽연채는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화가 나 하마터면 주운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장 마마는 입꼬리를 삐죽거리더니 엽연채를 부축했다.

“마님. 괜찮으세요?”

* * *

그 시각 일상원.

매씨 등이 떠난 후, 화가 난 진씨는 탁자 위에 엎드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백 이낭과 주묘화는 감히 그녀를 건드렸다가 재수 없는 일을 당할까 봐 이 틈을 타 꽁무니를 뺐다. 오늘 아침 이빨이 깨진 녹지도 곁에서 시중을 들지 않았고, 녹엽은 항상 뭘 물어도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라 진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진씨는 한순간에 고립무원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 이낭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냉랭하게 지껄였다.

“마님, 그 빌어먹을 종자가 이렇게 이득을 얻는 꼴을 저희가 어떻게 가만히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건 불효입니다! 불효라고요!”

그 말에 진씨의 눈빛도 사납게 변했다.

“어느 가문에서 자식이 분가할 때 이렇게 재산을 나눕니까? 일개 서자가 가장 많은 몫을 가져가다니요.”

비 이낭은 분개한 목소리로 목청을 돋웠다.

“셋째 나리는 지금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고 후야에 봉해졌으니 얼마나 영광스럽겠어요? 하나 저희 가문은 여전히 별 볼 일 없는 처지입니다. 일 년에 겨우 은화 천 냥가량의 수입만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셋째 나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 말에 진씨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뻔뻔한 서자를 주시하고 있겠는가? 그가 높은 곳에 설수록 그를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점점 더 많아진다. 그가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게 되자마자 분가를 하겠다고 소란을 피운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하사품을 거의 전부 가져간다는 말까지 전해지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바라보겠는가?

인색하고 냉정하며 근본을 잊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과 주묘서가 밖에서 눈물까지 흘린다면 그의 평판은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진씨는 그런 생각을 하자 조금 흥분이 되었다. 이어 싸늘한 목소리로 녹엽을 불렀다.

“녹엽아, 가서 그 빌어먹을 계집애를 불러오너라!”

밖에 있던 녹엽은 깜짝 놀라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는 전부터 엽연채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오죽하랴. 하지만 감히 진씨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으니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천천히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혜연과 추길은 궁명헌의 정원에서 비질을 하고 있었다. 비질을 하도 해서 눈 흰자위를 까뒤집을 지경이었다.

방금 전 공거에서 돌아온 엽연채는 조용히 혜연을 잡아당기더니 그녀와 추길에게 이곳에서 비질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파초나무 아래에 앉아 낙자를 만들었다.

주운환은 한쪽에 놓인 돌의자에 앉아 엽연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엽연채는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조그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저도 모르게 그를 째려봤다.

이때, 녹엽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주운환도 자리에 있는 모습을 보더니 순간 걸음을 멈추며 경직된 표정으로 그들을 불렀다.

“나리, 마님…….”

“무슨 일이냐?”

주운환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녹엽은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진씨에게 닦달을 당할 테니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을 전했다.

“셋째 마님… 마님께서 처소로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주운환은 표정이 확 어두워지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엽연채가 손에 들고 있던 낙자를 집어 던지고는 그를 말렸다.

“제가 갈게요. 다 큰 사내가 온종일 여인들과 티격태격하면 꼴사나워 보일 거예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잰걸음으로 일상원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금세 일상원에 도착한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진씨와 비 이낭이 어두운 낯빛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씨가 냉소를 지으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어차피 셋째가 공훈을 세워 얻은 것이니 그 은화 일만 냥도 너희가 전부 가져가거라!”

엽연채는 미간을 꿈틀거렸다.

“어머님, 진심이세요? 그러시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진씨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 뻔뻔하기 짝이 없는 것!’

진씨는 또다시 찬웃음을 흘리며 말을 받았다.

“어머님께서 지시하신 일인데 우리가 어찌 감히 이득을 보려고 하겠느냐? 우리도 너희들의 효도는 필요 없다.”

엽연채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순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진씨는 한쪽에 놓인 청화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출세가도를 달리게 됐으니 우리 같은 가난한 식구들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게지. 너희들이 거처를 옮기고 나면 너흰 존귀한 후야와 후 부인이 되겠지만 우린 여전히 별 볼 일 없는 처지일 게다.”

“맞습니다. 맞아요!”

비 이낭이 얼른 큰 소리로 맞장구를 쳐댔다.

“사람들은 모두 셋째 나리 부부를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거예요! 부모와 형제는 안중에도 없고 가족 간의 정도 모른다고 하겠죠. 아무리 큰 공훈을 세워도 효를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죠.”

비 이낭은 그리 말하며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녀는 엽연채가 두려워하거나 분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돌려 보니 뜻밖에도 엽연채는 싸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씨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엽연채를 보더니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왜 웃는 것이냐?”

“아닙니다.”

엽연채는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하더니 옅은 한숨을 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저와 제 부군이 가난한 식구도 몰라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는 것에 감탄하고 있었어요!”

“이!”

진씨는 낯빛이 싹 변했다. 엽연채가 평판에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진씨는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평판을 더욱 중요시한다는 걸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한때의 명성으로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미움받으며 버림받을 거예요!”

비 이낭이 초조한 목소리로 바람을 잡았다.

“그래! 그럼 누가 가장 비참해지는지 어디 한번 지켜보게나!”

그러나 엽연채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고 진씨는 그렇게 가 버리는 엽연채를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이 빌어먹을 계집애가 이 정도로 뻔뻔하고 낯짝이 두껍단 말이야? 정말 은화 일만 냥까지 전부 가져가려는 건가?’

“그래, 좋다. 너희들이 무슨 좋을 꼴을 할지 내 지켜볼 것이다!”

진씨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저주했다.

“마님!”

이때, 누군가가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회색 비갑을 입고 머리에는 말액을 두른 한 늙은 마마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보따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비 이낭이 그녀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어머, 자네는 정 마마가 아닌가? 여긴 어쩐 일로 왔는가?”

정 마마는 진씨가 시집올 때 친정에서 따라왔던 몸종이었다. 계속 진씨를 곁에서 모셔 왔는데 집안이 몰락하게 되자 많은 하인을 팔 수밖에 없었다.

정 마마는 진씨가 시집올 때 데려왔던 몸종이니 당연히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출과 일손을 줄이기 위해 진씨는 정 마마의 딸인 녹지만 곁에 남겼고 정 마마는 농촌에 있는 저택에 가서 전지田地와 장원莊園을 관리하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일 년 중 유월과 연말인 십이월에만 도성으로 돌아와 소작료를 건넸다.

‘지금은 구월밖에 안 됐는데 정 마마가 왜 이곳에 왔지?’

정 마마는 비 이낭을 흘겨보더니 이리 답했다.

“마님께서 그저께 이제 집안도 일어섰으니 하인들을 더 늘려야 그럴듯해 보인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절 곁으로 불러 부리시고 농촌 쪽에는 다른 사람을 보낸다고 하셨죠.”

“빨리 도착했구나.”

진씨는 정 마마를 쳐다봤다.

“그럼요! 다행스럽게도 일찍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님께서 어리석은 행동을 하실 뻔했습니다.”

정 마마가 말했다.

“어리석은 일이라니?”

비 이낭은 미간을 팩 찌푸리더니 목청을 높였다.

“빌어먹을 셋째 나리 부부가 모든 걸 가지고 가겠다고 하니 우리가 밖에 나가 두 사람의 평판을 망가뜨리려는 것뿐이네. 두 사람이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어 부귀해지자 우리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고 말하려 했네. 적모와 친아버지조차 안중에도 없고 본인들만 부귀를 누릴 생각을 한다고 말이지!”

진씨는 비 이낭의 말에 적극 동의하며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녹지는 사고를 쳤고 녹엽이는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하네. 정 마마 자네가 하루 종일 고생하며 서둘러 돌아온 걸 아네. 하지만… 내가 도저히 화를 누를 수가 없으니 잠시 후에 자네가 밖으로 나가 이 일을 처리해 주게.”

그 말은, 몰인정한 엽연채와 주운환이 가족들도 몰라보고 그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는 소문을 퍼뜨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정 마마는 낯빛이 확 변했다.

“마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리하면 큰아가씨의 혼사는 어찌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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