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41화 (441/858)

제441화

주운환은 조롱기 띤 얼굴로 차분하게 대꾸했다.

“어머니, 제게 아침부터 어머니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시중을 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진씨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게 무슨 뜻이냐?”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씁쓸한 얼굴로 냉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후야가 됐으니 내게 인사를 올리고 시중을 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로구나.”

그 말에 엽연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하좌의 비 이낭과 주종과는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오늘 정말 오길 잘했네. 진짜 볼만한 구경거리야. 이건 불효지! 그것도 엄청난 불효!’

그런데 주운환은 뜻밖에도 비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제가 일찍 궁에서 나온 이유를 아십니까?”

진씨는 어리둥절해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주 백야는 얼른 그에게 물었다.

“왜 일찍 궁에서 나온 것이냐? 개선대도 세웠으니 분명 궁에서 여러 날을 머무르게 하여 총애를 보이려고 하셨을 게다. 지난번에 허 장군과 강왕께서도 궁에서 하룻밤을 보내셨다. 너도 궁에서 여러 날을 보낼 거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돌아온 것이냐?”

“황제 폐하께서 처음에는 제게 궁에서 여러 날을 머무르라,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길을 재촉해 도성으로 돌아오느라 며칠 밤을 눈도 못 붙였다는 걸 아셨죠. 그런데 궁은 지켜야 할 규율이 많아 제가 분명 푹 쉬지 못할 거고 저희 집은 궁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 푹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 이 이야기를 했다면 사람들은 분명 그가 총애를 받지 못한 것에 불과하며 그래서 궁에 머무를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씨 등은 순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엽연채가 주운환의 손을 잡더니 상심한 얼굴로 말했다.

“황제 폐하는 천자이시며 저희 대제에서 가장 높은 분이신데 이렇게 부군을 이해해 주시는군요. 폐하께서는 부군께서 지난 몇 달 동안 대제를 위해 온갖 고생을 했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이렇게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수 있었다는 걸 아시기 때문이죠. 설령 백성들이라고 해도 이를 알게 되면 푹 쉬라고 권할 겁니다.”

이 말에 진씨와 비 이낭 등은 표정이 싹 변했고, 마침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자 그들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엽연채는 진씨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황제 폐하조차도 부군을 이해해 주시는군요. 크게 고생하신 부군께서 궁중의 규율 때문에 제대로 쉴 수 없을까 봐 집으로 보내 편안히 쉬게 해 주신 거죠. 그런데 폐하의 예측이 빗나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집에 돌아와도 편안히 잠을 못 자요. 아침 댓바람부터 여종이 달려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규율을 지키라며 끌고 가려고 하니까요. 집안의 규율이 황제 폐하의 뜻보다도 더 대단한가 봐요.”

진씨는 그 말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너… 너……!”

“왜 그러세요, 어머님?”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부군께서는 그리 고생을 하여 이렇게나 지친 상태입니다. 어렵사리 집으로 돌아오게 됐고 폐하께서도 푹 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님께서는 부군이 쉬지도 못하게 하며 이른 아침부터 붙잡아 와 규율을 강요하시는군요. 제 부군께서 어머님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괴롭히시면 안 되는 겁니다…….”

그 말에 진씨는 현기증이 났고 낯빛을 어찌하지 못했다.

“허, 허튼소리 하지 말거라……!”

이 말은 자신이 황제의 뜻을 거역한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어찌 감히 이런 대죄를 지으려고 하겠는가!

“제가 무슨 허튼소리를 하였다는 거죠?”

엽연채가 조목조목 반문했다.

“방금 전에 분명 어머님 입으로 이른 아침부터 부군에게 규율을 지키라며 이곳으로 오라고 하셨고, 그리하지 않으면 어머님에 대한 불효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진씨는 계속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엽연채를 보고 있으려니 정말이지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고 분노로 치를 떨었다.

“당신, 참 잘하는 짓이오!”

주 백야는 싸늘한 눈빛으로 진씨를 노려봤다.

“셋째가 먼 길을 달려오며 고생하여 집으로 돌아왔소. 눈도 못 붙인 밤이 얼마나 많았겠소. 그런데 당신은 셋째가 푹 쉬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오? 빌어먹을 규율 따위를 지키라면서!”

“저, 전 그저…….”

진씨는 목소리를 떨며 겨우 자신을 변호했다.

“어찌 됐든 간에… 규율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러자 주 백야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규율은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요구되는 것은 아니오. 사람이 병에 걸려 다 죽어 가도 당신은 규율은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할 것이오? 사람이 관 안에 누워 있는데도 당신은 그 무덤을 파내 그 사람에게 규율을 지키라고 할 것이오?”

“나리…….”

진씨는 분에 겨워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리는 무슨! 특수한 상황에서는 융통성 있게 굴어야 할 것 아니오. 지금 셋째는 갖은 고생을 하고 돌아왔는데 좀 쉬게 하는 게 뭐가 어떻다고 이러는 것이오? 황제 폐하마저도 이 애에게 쉬라고 하셨소! 그런데 굳이 셋째를 여기로 부르다니!

셋째는 당신 아들이고 당신은 셋째의 어머니요. 당신이 이 애에게 효를 요구하면 당신도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할 것 아니오!”

주 백야는 목청을 높이며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기에 지금 이 행동은 정말로 분노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진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무릎 위에 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뺨을 쉴 새 없이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이 다 얼얼했다. 지금 황제조차 주운환에게 편히 쉬라고 했는데 자신이 기어코 그를 불러내 규율을 지키라고 했으니, 자신의 체면이 깎이지 않으면 황제의 체면을 깎게 되는 꼴이었다.

하좌의 비 이낭은 화가 나 씩씩거렸다. 그녀는 주운환이 망신당하는 꼴을 보려고 온 건데 망신을 당하기는커녕 그를 향한 황제의 은총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석의 주묘서는 자신의 손수건을 꽉 비틀었다.

“셋째 나리! 셋째 나리!”

이때, 여종 하나가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흥분한 얼굴로 주운환을 쳐다보며 알렸다.

“황명을 전달하러 궁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진씨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고 그녀는 화가 잔뜩 난 눈빛으로 그 여종을 노려봤다. 궁에서 사람을 보내 봉작 내용이 담긴 조서詔書를 전달하는 데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여종의 태도에 화가 난 것이다.

“가서 함께 조서를 받듭시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끌어당기며 돌아서서 주 백야에게 일렀다.

“아버지, 조서를 받으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려무나.”

주 백야는 흥분한 목소리로 그리 대꾸하고는 아래에 있는 여종에게 분부했다.

“집안사람들을 전부 대청大廳 쪽으로 부르거라.”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진씨는 서로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부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화가 나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그녀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바로 이런 장면인데 이번에는 어찌해도 피할 수가 없었다.

붉은 칠을 한 수환獸環이 달린 주씨 가문 정문이 활짝 열리자 널찍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는 녹나무로 만든 커다란 탁자가 보였는데, 그 위에는 삼족흑와향로三足黑瓦香爐와 죽은 닭 한 마리, 진상품들이 올려져 있었다.

집안에서는 주운환을 진서후에 봉한다는 조서가 내려오리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고, 하인들도 셋째 부부의 환심을 살 마음에 진작에 관련된 준비를 마쳤다.

채결이 직접 환관과 시위들을 이끌고 와 그곳에 서 있었고 그들 옆에는 붉은 칠을 한 커다란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겉 부분에 용과 봉황이 조각되어 있어 아주 정교하고 화려해 보였다. 그리고 가장 윗부분에는 옻칠을 한 작은 상자가 놓여 있는데 이 또한 용 문양이 조각된 것이었다.

채결은 주운환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후야.”

“채 공공.”

주운환도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한 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씨와 비 이낭 등은 마지못해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당당하고 차분한 태도로 이야기를 나누는 주운환의 모습을 냉랭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저 사람은 황제의 곁에서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측근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직접 와서 조서를 읽는 건 그야말로 크나큰 영광이었다. 다들 채 공공을 보면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아부를 하는데, 그런 그가 적극적으로 주운환에게 호의를 보였다.

진씨와 비 이낭 등은 그 모습에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저 먼발치에 서 있을 뿐,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주비양과 강심설 부부도 이곳에 도착했다.

엽연채가 뒤를 보며 두리번거리더니 매씨를 찾았다.

“할머님은 왜 안 보이시는 거죠?”

“아, 네 할머님은 병이 나셨다.”

주 백야가 말했다.

“어제 셋째가 도성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나서 집으로 다시 돌아와 어머니께 소식을 전하러 갔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몸져누워 계시더구나. 어제 네가 늦게 돌아와서 말한다는 걸 잊었구나.”

엽연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고 매씨가 몹시 걱정됐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조서를 받아야 하니 이 이야기는 사당에 가서 다시 해야 했다.

“우선 조서부터 받읍시다.”

주운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고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채 공공은 조서를 펼치더니 어제 대전에서 정선제가 직접 내렸던 황명을 다시 한번 읽기 시작했다.

“주운환은 황명을 받드시오. 서정 대장군 주운환에게 군대를 이끌어 서노군을 격퇴하고 남쪽 이민족을 교화하라 명하였다. 하여 주운환은 대제의 수많은 백성을 보호했고 크나큰 공을 세워 짐과 백성들 그리고 나라 전체가 아주 기쁘도다. 오늘부로 주운환을 정2품 진서후에 봉하며 조정에 나와 국가 대사를 논하거라. 또한 황금 일천 냥과 기름진 논 천 경, 저택 한 채를 하사한다. 이상!”

엽연채는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진씨와 비 이낭 등은 주운환이 잘나가는 모습을 눈곱만큼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상당한 양의 황금과 기름진 논을 하사한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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