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0화
“왜 우는 것이냐?”
주 백야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오늘은 운환이가 돌아오는 날이고 그 애를 후작에 봉한다는 황제 폐하의 성지가 전해지는 날이다.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어째서 눈물 바람인 게냐!”
“셋째 때문입니다. 그 애가 녹지를 저렇게 만들었습니다.”
진씨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 백야는 뒷짐을 진 채 탑상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오해일 것이오. 에휴. 셋째가 오면 다시 이야기합시다!”
진씨는 화가 나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느끼며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셋째가 뭐라고 하는지 한번 들어 보죠!”
그녀는 그리 말하며 한쪽에 놓인 청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켠 후 ‘탁’ 소리를 내며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놨다.
이윽고 백 이낭과 주묘화가 일상원에 도착했고 이어 비 이낭과 주종과도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굳은 표정을 한 주묘서가 안으로 들어와 진씨의 하좌에 놓인 수돈에 앉았다.
“어머. 다들 도착했는데 우리 주 후야와 그 부인께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네요!”
비 이낭은 냉소를 지으며 조롱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 이낭은 볏짚으로 주운환의 저주 인형을 만들어 날마다 그 인형을 사정없이 찌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운환이 잘나가는 꼴을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진씨가 주운환 부부에게 시중을 들게 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쯧쯧. 후작위를 받으면 뭐 해. 결국 서자인데. 적모가 시중을 들라고 하는데 감히 안 들고 버티겠어?’
그녀는 주운환이 고분고분 시중을 드는 모습을 실컷 보고 싶었다.
“기고만장함이 하늘을 찌르네요!”
비 이낭은 얼른 한마디를 더 보탰다.
이때, 밖에서 녹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셋째 나리와 셋째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발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걷히자 엽연채와 주운환이 함께 들어왔다.
진씨와 비 이낭 등은 주운환을 보더니 낯빛이 싹 변했다. 어째서인지 저도 모르게 뻣뻣하게 경직되더니 등을 똑바로 곧추세웠다.
눈앞의 소년은 예전과 다름없이 재지才智가 넘치며 환한 빛이 흐르는 모습이었고 수묵으로 그린 듯한 두 눈동자에서는 우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쇠처럼 무겁고 얼음처럼 차디찼다. 차분하면서도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운환은 차분함 속에서 자신의 예기銳氣를 드러내며 상대를 압도하는 기세를 보였다.
진씨는 그가 한 발씩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기울이다가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내가 왜 저 녀석이 두려워서 벌벌 떨어야 하는 거야!’
진씨는 그런 생각을 하자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아버지, 어머니. 소자, 돌아왔습니다.”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무릎을 꿇더니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큰절을 올렸다.
원래대로라면 진씨는 자신에게 큰절을 올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쭐했을 테고, 아무리 잘나가고 후야가 되어 봤자 역시 자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사실을 만끽했을 것이다.
진씨는 주운환이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진씨가 어떻게 나오든 그는 적어도 지켜야 할 규율을 반드시 지킬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적모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결코 봐줄 생각은 없었다.
주 백야는 콧날이 시큰거려 얼른 그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어서 일어나거라.”
주운환이 일어서자 진씨가 음흉한 목소리로 말문을 뗐다.
“네가 후작에 봉해지더니 이 적모는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다.”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반문했다.
“어머니,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 말에 진씨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뻔히 알면서 묻는구나? 녹지를 보거라! 너에게 맞아서 어떤 꼴이 됐는지 안 보이는 게냐?”
“흑흑. 나리, 마님. 두 분께서 소인을 위해 나서 주셔야 합니다.”
녹지는 진씨가 자신을 위해 나서는 모습을 보자 얼른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화려한 주운환의 얼굴에 조롱기가 비쳤다.
“참 우스운 아이로구나. 이렇게 멀쩡한데 어머니께 뭘 나서 달라고 말하는 것이냐?”
“셋째 나리, 지금 인정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녹지는 주 백야가 주운환을 옹호할까 봐 얼른 주 백야를 쳐다보며 선수를 쳤다.
“나리… 정말로 셋째 나리께서 제 얼굴을 때리셨습니다! 흑흑……. 그 바람에 앞니 하나와… 아랫니 두 개가 빠졌습니다. 원래대로 복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외모가 다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어디가 망가졌다는 것이냐? 별로 심각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봐라. 입만 안 벌리면 보이지도 않는다!”
주 백야는 적당히 얼버무리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그에 녹지는 화가 나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흑흑… 외모가 망가졌습니다…….”
“에휴……. 의원에게 진찰은 받았느냐?”
주 백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사소한 일은 그냥 넘어가면 되지, 소란 피울 게 뭐가 있다고!’
“진찰을 받았으면 됐…….”
“나리!”
진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됐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거세요? 셋째를 감싸 주시려는 겁니까? 그 애에게 적모인 절 안중에도 두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에 주 백야는 말문이 막혔고 새파란 얼굴로 이렇게 변명했다.
“나… 난 그런 뜻이 아니오.”
“아이구.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비 이낭은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코웃음을 쳤다.
누군가가 물어봐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던 진씨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 가문도 다시 일어섰으니 집안의 규율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묘서와 묘화, 첫째 부부와 둘째 그리고 이낭들 모두 이곳에 와서 문안 인사를 왔습니다.”
그 말에 백 이낭과 주묘화는 얼른 고개를 숙였고 비 이낭은 조롱하는 눈길로 주운환 부부를 슬쩍 흘겼다. 진씨는 오늘부터 규율을 세우겠다는 말 같은 것은 전혀 한 적이 없었고 그들 역시 아침 일찍 이곳에 온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진씨가 자신들이 문안 인사를 왔었다고 하는 건 그저 이를 핑계로 주운환 부부를 몰아가기 위한 수작질에 불과했다.
백 이낭과 주묘화는 감히 찍소리도 못 했고 비 이낭은 주운환 부부가 당하는 모습을 즐겁게 쳐다보며 해바라기씨를 까먹었다.
진씨는 냉소를 지으며 이어서 말했다.
“녹지는 가서 셋째 부부를 데려오려고 한 건데……. 하하. 우리 후야가 아주 성깔이 보통이 아니더군요. 녹지에게 이렇게 큰 벼루를 집어 던져 외모를 망가뜨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벼루는 녹지에게 던진 것이 아니라 제게 던진 겁니다. 셋째가 후야가 되더니 이 적모는 눈에도 안 뵈는 거죠.”
이는 불효막심한 행동이니 어사에게 포착되면 탄핵될 것이 분명했다.
“이…….”
주 백야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주운환을 쳐다봤다. 그런데 주운환은 뜻밖에도 픽 냉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가 했습니다. 제가 던진 벼루 말씀이셨군요. 저 아이가 맞을 만하니 던진 것입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음침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저 아이는 어머니가 부리는 여종이지만 그래 봤자 일개 여종에 불과합니다, 한데 스스로를 상전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제 처소로 달려와 야단법석을 떨더니 저희 부부의 방 안으로 들이닥치려고 하더군요. 어머니, 이게 어머니께서 저 아이에게 가르치신 규율이옵니까?”
그 말에 진씨와 비 이낭 등은 낯빛이 확 변했다.
“설령 저 녀석이 정말로 상전이었다고 해도 여종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남의 방에 들이닥치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주묘서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너라면 그리할 것이냐?”
주묘서는 그의 눈빛에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고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오금이 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당연히 안 그러죠! 제… 제가 어떻게 그런 실례되는 행동을 할 수 있겠어요…….”
“상전조차도 감히 그리하지 못하는데 일개 여종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주운환의 준수한 얼굴이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이런 아이가 바로 어머니께서 가르친 사람입니까?”
진씨는 얼굴만 붉으락푸르락, 받아칠 말을 바로 찾지 못했다.
“네 말이 맞다. 녹지 이 녀석이 참 무례하게 행동했구나.”
주 백야가 냉큼 호통을 쳤다.
“온종일 소리를 꽥꽥 지르고 다니던데 이게 무슨 짓이냐!”
진씨는 분통이 터져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더니 남의 방에는 뭐 하러 들어가려 한 것이냐?”
녹지는 낯빛이 하얗게 질렸고 눈시울을 붉히더니 억울해하며 해명했다.
“저… 전 순간 급한 마음에… 셋째 나리와 셋째 마님께서 빨리 나오지 않으시길래……. 바… 방 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그래서…….”
“그래서 뭐?”
주운환이 코웃음을 치며 말허리를 잘랐다.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우리 처소에 있는 여종들이 너보다 잘 알고 있었을 거다. 잔머리 굴리지 말거라! 추길과 혜연이 널 막았는데도 넌 그 애들을 밀치고 들어오려고 했다. 어머니를 그리 오랫동안 모셨으면서 이런 규율과 이치도 모르는 것이냐?”
그 말은 곧 부부가 잠시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났으니 신혼보다 더 불타올랐고 저녁에 무리를 좀 했으니 당연히 문을 굳게 닫아 놨다는 의미였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혼인을 한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님을 모셔 온 녹지도 이 규율을 알고 있어야 했다.
즉, 녹지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리 행동했던 것이고, 엽연채와 주운환을 골탕 먹이려고 작정했던 것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백 이낭은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마셨고 주묘화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비 이낭은 속으로 엽연채를 천박하다고 욕했다.
“간단히 말해 예의와 규율을 모르는 거군요!”
엽연채가 코웃음을 쳤다.
진씨는 화가 나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녹지를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 무례한 것! 썩 밖으로 나가 스스로 네 뺨을 스무 대 때리거라!”
밖에 서 있던 추길과 혜연은 그녀가 뺨을 때리는 소리를 듣자 속이 후련해졌다.
“녹지가 마음이 급해 그랬던 것뿐이다.”
진씨는 고개를 돌려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엽연채와 주운환을 쳐다봤다.
“하지만 너희들도 규율을 잘 지키지 않는구나! 설령 녹지의 방법이 잘못됐다고 해도 어쨌든 그 애는 말을 전했다. 너희들에게 이곳에 와서 예를 다하라고 했단 말이다.
너희들이 녹지의 행동에 불만을 느껴 그 애를 가르치려고 했어도 일단 이곳에 왔어야 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까지 질질 끌었다! 이건 적모인 날 안중에도 안 두는 게 아니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