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39화 (439/858)

제439화

밤사이 가을비가 내렸다.

이튿날 이른 아침,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올 즈음 추길과 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정원으로 나왔고 혜연은 여명이 퍼져 나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려 보니 본채의 문은 아직 굳게 닫혀 있어 둘은 조용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해가 높지거니 떴는데도 방문은 여전히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밖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녹지가 굳은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고 그녀는 정원을 지나 곧장 본채로 걸어갔다.

“셋째 마님께서 안에 계시니?”

“어머, 얘!”

추길은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뻗어 녹지를 막아섰다.

“무슨 일인데? 우리한테 이야기하면 돼. 너처럼 다짜고짜 들이닥치는 사람이 어디 있니?”

“내가 찾는 사람은 마님이거든.”

녹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아래턱을 쳐들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니? 마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라고 전하려는 것뿐이야.”

그 말에 혜연은 낯빛이 어두워졌고 추길은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전에는 서로 번거로우니 문안 인사는 할 필요 없다고 하시지 않았니?”

녹지는 냉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받아쳤다.

“그건 예전 이야기고. 마님께서 이제 집안도 일어섰으니 규율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어. 더는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녀는 그리 말하며 추길을 밀치더니 본채 쪽으로 걸어갔다.

“마님, 나리. 날이 밝았는데 어서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지 않고 뭐 하세요. 이러시는 건 불효입니다.”

그들은 주운환이 돌아왔음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주운환이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게 된 후로 진씨는 점점 더 이쪽에 관심을 쏟았고 어린 여종들에게 그들을 잘 지켜보라고 분부를 내렸다. 어젯밤 갑자기 돌아온 주운환을 본 어린 여종이 곧장 진씨에게 보고를 드리러 갔는데, 진씨는 이미 잠이 든 상태였다. 그래서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이 소식을 알게 된 것이다.

진씨는 주운환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속에서 울분이 치밀었다.

‘그 비천한 서자가 뭔데 후작위를 받고 조정의 중신이 되었단 말인가!’

그에 반해 자신의 아들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하지만 후작에 봉해진다 한들 그는 일개 비천한 서자이고 적모 앞에서 얌전히 무릎을 꿇어야 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진씨는 주운환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녹지를 보내 주운환 부부에게 그녀에게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리라고 전한 것이다.

“셋째 나리, 셋째 마님!”

녹지는 고함을 지르며 본채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녀가 낭하를 걷기도 전에 방 안에서 싸늘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빌어먹을 계집애가 후야의 처소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게냐!”

그 호통 소리는 꽈르릉거리는 천둥소리 같았고, 음침하고 싸늘하며 소름 끼치는 살기가 섞여 있었다. 녹지는 소스라치게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창백한 얼굴로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나리… 나리께서 후작에 봉해지셨다고 해도 여전히 마님의 아드님이세요. 그런데 어떻게 마님께 문안 인사를… 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무언가가 지창紙窓으로 던져졌다. 그 물체는 창문의 창사窗紗(창에 다는 얇은 망사나 가는 철사망)를 뚫고 나와 녹지의 얼굴에 명중했다.

무언가에 맞은 녹지는 몸이 홱 돌아가더니 바닥을 나뒹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입술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앞니도 두 개나 빠진 상태였는데 보니 피가 묻은 벼루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으악!”

녹지는 입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고 입술을 쓱 닦아 보니 피가 흥건하게 묻어 나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헉!”

추길과 혜연도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이… 감히……!”

녹지는 놀라고 화가 나서 욕을 한바탕 퍼부으려고 했으나 입에서 흐르는 피를 보자 현기증이 일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때, 추길이 차가운 목소리로 먼저 호통을 쳤다.

“네가 마님의 여종인 게 그리도 대단한 거냐? 우리 나리는 이젠 후야가 되셨어. 네가 여기서 고래고래 소리를 칠 주제가 되니! 거기다 나리와 마님께 예의를 지키라고 하다니. 너부터 똑바로 예의를 지키면서 그런 말을 해!”

“이!”

녹지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화를 냈다.

“난 그저 말씀을 전하러 온 거야!”

말을 마친 그녀는 통증이 너무 심하고 얼굴이 더 망가질까 겁이 나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혜연이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피나 깨끗이 지우자.”

* * *

그 시각 본채 안.

주운환은 탑상에 앉아 있었고 엽연채는 그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주운환의 다리를 꽉 감싸 안은 채로 달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손으로 살포시 엽연채의 귀를 막고 있었다.

“우움…….”

시끄러운 소리에 엽연채는 눈을 뜨려고 했다.

“아무 일도 아니니 더 주무십시오.”

주운환은 엽연채가 잠에서 깨려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자리에 누워 그녀를 품에 안고 살살 어르며 도로 재웠다.

어젯밤 엽연채는 그 때문에 기운이 쏙 빠져 버렸다. 주운환이 인시寅時(오전 3~5시) 삼각이 되어서야 저를 놓아준 탓에 지금 한 시진 정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엽연채는 쌀쌀한 와중에 따뜻하고 포근한 온기가 느껴지니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다시 단잠에 들었다.

주운환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엽연채의 조그만 몸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자 이대로 잠을 자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한데도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흠흠… 나리…….”

밖에서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주운환의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여양이었다.

주운환은 할 수 없이 엽연채를 다독이며 침상에서 일어났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여양이 헤헤 웃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나리, 축하드려요! 헤헤헤!”

그러자 주운환의 청수한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아침 댓바람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이냐?”

“아닙니다. 양왕 전하께서 나리께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여양은 주운환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이야기했다.

그러자 주운환은 낯빛이 확 변했고 돌아서서 침실로 걸어갔다. 가 보니 엽연채는 이미 잠에서 깬 후로 이불을 둘러쓴 채 커다란 눈만 밖에 내놓고 있었다.

“어서 가 봐요.”

“좀 있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잠시 포옹을 하고 나서야 그곳을 떠났다.

그가 떠나자 추길과 혜연이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아니, 마님, 몸은 괜찮으신 거예요?”

추길이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전에 계속 엽연채를 아가씨라고 불렀던 건 엽연채가 진짜로 시집을 간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진짜 부부가 되었으니 당연히 호칭도 바꿔야 했다.

“그럼.”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자 혜연이 얼른 옷을 들고 왔는데 그녀는 엽연채의 몸을 보더니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그러고는 굳은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나리께서도 참… 너무하셨네요!”

그러자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젯밤 주운환을 생각해 보니 그녀도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이 나쁜 사람!’

혜연과 추길은 얼른 엽연채를 부축하며 그녀를 일으킨 다음 옷을 갈아입히려고 했다.

혜연이 말했다.

“마님, 쉬시는 게 좋겠어요. 어젯밤에 잠도 잘 못 주무셨잖아요.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면 여기서 드시면 돼요.”

“그럴 필요 없어.”

엽연채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이리 침상에 누워 있으면 이상하게 보일 것이었다.

“그럼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혜연의 말에 엽연채가 옷을 갈아입고 소청으로 가니 주운환도 그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연청색 도포를 입은 그는 수려한 외모에 매력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전에는 소매가 넓은 옷을 입는 걸 좋아했는데 지금은 소매가 좁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깔끔하고 단정해 보였고, 맵시도 영기英氣도 한층 느껴졌다.

“부인.”

주운환은 그녀를 보더니 두 눈을 번쩍 떴다.

오늘은 그녀도 특별하게 치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집에서 입는 연두색 웃옷에 꽃무늬로 짠 마면군을 입었다. 머리는 평소에 하는 분초계分俏髻를 했고 술이 달린 매화잠을 꽂았다. 전과 다름없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특히 얌전하고 참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그런데 어젯밤을 함께 보내고 나니 주운환은 그녀에게서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눈썹꼬리와 눈가에 애정이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자 당장 그녀를 끌어안고 싶어 참기 어려웠다.

엽연채는 그의 눈길에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침 들어요.”

“그럽시다.”

주운환은 옷을 들어 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혜연이 이미 상을 다 준비해 두었고, 상 위에는 송화단 죽과 유조油條(밀가루 반죽을 길쭉한 모양으로 만들어 튀겨 낸 음식), 만두와 연자고蓮子糕가 차려져 있었다.

“아침에 녹지가 왔었나요?”

엽연채가 말했다.

“네.”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싸늘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식사를 한 뒤 그분을 뵈러 갑시다.”

엽연채는 그가 말하는 그분이 진씨임을 알았다.

“아버지께 잠시 후에 우리가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전하거라.”

주운환은 젓가락을 들며 추길에게 분부를 내렸다.

“예.”

추길은 대답을 하고서 자리를 떴고 부부는 식사를 마친 후 함께 일상원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길을 걷다가 많은 여종들과 마주쳤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워하며 흠모하는 얼굴로 주운환을 쳐다봤다. 이제서야 그가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라는 걸 알아봤다는 듯이 말이다.

어린 여종 한 명이 일찌감치 일상원으로 가서 보고를 올렸다.

진씨는 어두운 낯빛으로 탑상 위에 앉아 있었고 녹지는 아래에 서서 울고 있었다.

녹지는 궁명헌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의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았고 그 결과 그녀는 앞니 하나와 아래 왼쪽에 있는 치아 두 개를 잃게 되었다. 앞으로는 웃기만 해도 사람들에게 이가 빠진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었다.

녹지는 억울하기 짝이 없고 분통이 있는 대로 터졌다. 좀 전까지 의원의 진찰을 받다가 이제서야 진씨 앞으로 달려와 울고 있었던 것이다.

“전 그저 말씀을 전하러 갔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절 때리시다니… 흑흑…….”

“무슨 일이냐?”

때마침 밖에 걸린 발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걷히더니 주 백야가 안으로 들어왔다. 녹지는 주 백야를 보자마자 ‘아이고’ 우는 소리를 내며 하소연했다.

“나리. 나리께서 소인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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