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38화 (438/858)

제438화

엽연채는 하는 수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어떻게 온 거예요? 궁에서 며칠 지내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맞습니다.”

주운환이 말했다. 수묵으로 그린 것 같은 그의 깨끗한 두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어리었다.

“황제 폐하께서 며칠 더 머무르라고 하셨는데, 집에 있는 아내가 내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돌아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엽연채는 그 말에 눈물이 고이며 가슴이 일렁였다.

“바보……. 다른 사람들은 더 못 머물러서 안달인데…….”

그러자 주운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변방에서 나라를 위해 분투하고 끊임없이 모래바람을 맞으며 전장에 뛰어들었더니… 도성의 아름다운 꽃이 정말 그립더군요.”

그가 그렇게 말하며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물을 휙 젓자 꽃잎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물 위를 떠다녔다.

엽연채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공자, 왜 아직도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는 거예요?”

주운환은 아직도 오늘 도성에 들어올 때 입고 있었던 은백색 갑옷과 투구를 입고 있었다. 그는 철편鐵片들을 엮어 만든 단단한 재질의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호랑이 문양이 조각된 금색 허리띠를 찼다.

주운환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내가 돌아오면 내 전포를 벗겨 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그리 말하며 엽연채의 작은 손을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갑옷 위에 살포시 그 손을 내려놓았다.

엽연채의 얼굴은 붉은 노을처럼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고, 두 눈동자는 햇볕에 반짝이는 물결처럼 빛이 흘렀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주운환은 싱긋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자신의 갑옷을 벗겨 주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봤다.

무거운 갑옷이 벗겨지자 그는 그제야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더니 옅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부인,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부인의 모습이 떠올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극히 평범한 말에 불과했지만 그 말에는 그동안 그가 겪었을 위급한 상황과 갖은 고생이 전부 담겨 있었다.

주운환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늦었으니 이제 자러 갑시다.”

“네.”

방 안은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애정으로 가득했다. 밖에 있던 추길과 혜연은 멀찍이 서서 방의 불이 꺼지는 걸 보더니 그제야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먹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는 하늘만이 아실 거야.”

“뭘 걱정했는데?”

혜연이 추길을 잡아당기며 자러 가자고 했다.

“가자. 우리도 가서 자야지.”

추길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꾸했다.

“지금 도련님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되셨잖아. 벼락출세한 셈이지! 도련님이 아니었으면 우리 대제의 국토는 그 빌어먹을 것들에게 점령당했을 거야. 그렇지만, 후작위도 받게 됐으니 도련님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여인은 누구든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 거야. 게다가 아가씨의 친정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만약 도련님께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도련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혜연은 그녀를 쏘아보며 톡 쏘았다.

“어서 가서 자기나 해!”

둘은 함께 동쪽 곁채로 들어갔고 불은 끈 뒤 잠자리에 들었다.

* * *

화목한 분위기의 서과원과 달리 태자부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커다란 서재 안, 태자는 날을 세운 모습으로 창가 아래에 놓인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젊은 사내 둘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 두 사내는 바로 풍씨 가문에 남은 두 젊은 장수, 풍흠과 풍용이었다.

젊은 장수라고는 하지만 사실 나이는 적지 않았다. 둘 다 스물다섯 살쯤 먹은 다 큰 사내로, 과거 풍 장군 같은 중진重鎭들과 구분하고자 사람들이 그들을 풍씨 가문 소장군, 즉 젊은 장수라고 부른 것이었다.

이후 풍씨 가문은 전쟁에서 패하여 줄행랑을 치게 됐고, 이 두 풍씨 가문 젊은 장수는 나이가 적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여겨져 사람들은 그들에게 일말의 기대도 걸지 않았다.

그런데 옥안관이 함락되기 일보 직전에 그들보다 훨씬 어린 한 소년이 기세등등하게 나타나 전력을 다해 대세를 만회했고, 그렇게 옥안관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혈로를 뚫고 응성을 탈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에 풍씨 가문 형제는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모든 게 다 마무리되려는 찰나, 태자가 서신을 보내왔고 그들에게 공을 가로챌 수 있도록 손을 쓰라고 했다. 그런데 주운환이 영광스럽게 도성에 돌아온 것이다.

태자는 차갑고 어두운 얼굴로 아래에 있는 두 사람을 쏘아보며 다그쳤다.

“너희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인 게냐? 크나큰 공을 앞에 가져다줬는데 그것도 잡지 못했단 말이냐?”

풍흠과 풍용은 고개를 숙인 채 이를 꽉 물었다.

태자는 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표정이 더욱 어둡게 변했다.

“전하!”

풍흠이 불현듯 공수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을 뿜어내며 말을 이어 갔다.

“저희도 전하께서 저희를 아끼시고 풍씨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주 장군은… 응성과 옥안관은 주 장군이 구해 냈습니다! 주 장군이 급히 달려오지 않았다면 옥안관은 응성과 마찬가지로 피바다가 됐을 것이고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응성의 백성과 저희 풍씨 가문 사람들 모두 그 빌어먹을 것들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주 장군이 그것들을 몰아냈고 그 인간 백정들을 35만 명이나 무찔렀습니다! 응성의 백성들과 저희 풍씨 가문의 피맺힌 원한을 풀어 줬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어찌…….”

주운환은 영웅적 기개를 가진 사내대장부였다. 풍흠과 풍용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자신들이 짐승도 아닌데 어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가 있단 말인가.

두 형제는 도성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는 건 자신들은 변방의 백성들을 지키는 장수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무능하게도 백성들이 자기들 앞에서 도륙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심한 자책감과 무력감으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들은 옥안관에 있는 동안 매일같이 백성들의 냉대와 의혹에 시달렸고 몹시도 괴로워했는데 결국 그건 자신들이 무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주운환의 등장은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한 줄기 구원의 빛과도 같았다.

그들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이 소년 장군을 질투했었지만, 질투심이 목숨을 살려 준 은혜를 이길 수는 없었다.

옥안관은 주운환이 구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영웅에게 손을 쓸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런 대죄를 범할 수 없었다.

풍흠은 태자의 서신을 받았을 때 잠시 망설였지만 금세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서신을 들고 돌아가 풍용을 시험해 봤다. 만약 풍용이 주운환에게 손을 쓰려고 한다면 바로 그를 결박할 생각이었다.

그들은 막사 안에서 이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다. 그제야 풍흠은 풍용 또한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풍흠의 말을 들은 태자는 매서운 눈빛을 번뜩이더니 하하 냉소를 지었다.

“너희 말이 맞다. 내가 그리한 건 그저 풍씨 가문이 몰락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고 풍씨 가문의 영광을 지켜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풍 장군과 풍 노장군이 목숨을 잃었지만 너희 식솔들이 아직 살아 있으니 난 풍씨 가문을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소신, 전하의 마음은 감사히 받겠사옵니다.”

풍흠과 풍용은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참, 내가 너희들에게 준 서신은 어찌했느냐?”

태자의 물음에 풍흠이 답했다.

“전하, 걱정 마십시오. 그 서신은 진작에 옥안관에서 불태웠습니다.”

변방에서 주고받는 이런 밀서는 보통 현장에서 바로 태워 버린다.

그러자 태자는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그들을 물렸다.

“잘했다. 늦었으니 이만 가 보거라!”

풍흠은 얼른 대답했다.

“예! 원래는 측비 마마를 뵙고 갈 생각이었는데 날이 저물었으니 방해가 될 듯하옵니다. 전하께서 저희를 대신해 마마께 안부를 여쭤봐 주십시오.”

그가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일가인 풍 측비였다.

“알겠다.”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풍흠과 풍용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옻칠을 한 녹나무 찻상 위에 올려져 있던 찻잔이 휙 날아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고얀 것들……!”

태자는 낯빛이 새파래진 채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주운환이 무사히 돌아와 태자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할 수 없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를 끌어들일 방법을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신경을 좀 쓰면 되는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신이 풍씨 가문 형제에게 주운환을 암살하라고 명했으니 만약 이 사실을 주운환이 알게 된다면 그 순간 원수지간이 되지 않겠는가? 이건 절대로 그가 바라는 결과가 아니었다.

“저것들이 입을… 다물 것 같으냐?”

태자가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자死者만이 비밀을 지킬 수 있사옵니다.”

이계는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태자는 냉소를 흘리며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번뜩였다. 풍씨 가문 형제가 자신의 지시에 따라 매복했다가 주운환을 공격했다면 적어도 서로 의기투합하여 벌인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형제는 매복조차 시도하지 않았으니 이 일은 자기 혼자서 벌인 일이 되어 버렸다.

“두 사람은 이 일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송초가 차분한 목소리로 태자를 안심시켰다.

“현재 풍씨 가문이 어떤 꼴이 됐는지 보시옵소서. 그들은 태자 전하께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사옵니다. 게다가 태자부에는 풍 측비 마마도 계십니다. 그분은 풍씨 형제의 친누이동생이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이 일을 발설한다면 측비 마마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사옵니다. 그러니 풍 측비 마마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두 사람은 절대로 이 일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태자는 표정이 더 어두워지더니 언짢다는 듯 한마디 했다.

“내가 풍씨 가문 사람들을 신경 써야 한다는 것 아니냐? 난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구속받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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