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7화
엽연채가 떠난 후, 비 이낭과 주종과는 온종일 세자 자리를 뺏을 생각만 하던 자신들의 시커먼 속내가 또 떠올랐다. 방금 전 엽연채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자 두 모자는 속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은 이곳에 더 머무를 낯이 없어, 이만 가 보겠다고 말을 건넨 후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이때, 주묘서가 쿵쿵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그녀는 그리 말하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진씨를 쳐다봤다.
“제 혼사는 어떡하죠?”
가문이 몰락해서 저더러 종4품 관리의 아들에게 시집가라고 하면 당연히 이에 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운환이 갑작스럽게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고 후작에 봉해지며 주씨 가문도 함께 위로 상승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대단한 권문세가가 되었는데 어찌 이런 소관의 아들에게 시집가고 싶겠는가?
“당연히 그런 집안에 시집가면 안 되지!”
진씨는 음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묘서의 혼사만 생각하면 그녀는 정말이지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좌의 백 이낭은 입꼬리를 빼쭉거렸다. 백 이낭은 분명 정혼하기 전에 좀 더 지켜보라고, 상대가 적당치 않다고 그들에게 조언했었다.
주묘서 같은 사람은 더 좋은 곳에 시집가야 하고 서씨 가문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집안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백 이낭은 진씨의 속물적인 근성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기에 주운환이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게 되면 분명 진씨가 이 혼사를 후회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서씨 가문이 애꿎은 피해자가 되리라는 사실도 말이다.
“이게 다 강심설 그 빌어먹을 것이 중간에서 부추겼기 때문이다! 그게 하루 종일 우리 가문은 비참한 처지가 될 거고 그리되면 이런 소관의 집안에도 시집가지 못할 거라는 말만 안 했어도 우리가 어떻게 이런 가문과 혼사를 맺었겠느냐?”
진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가서 강심설을 불러오너라.”
밖에 있던 녹엽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른 일상원 밖으로 나갔다.
강심설은 주학해를 안고 자신의 방에서 그와 놀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녹엽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님, 주인마님께서 부르세요!”
그 말에 강심설은 낯빛이 확 변했다.
주운환이 큰 공을 세운 후로 강심설은 어안이 벙벙했다. 모든 일이 최악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녹엽이 지금 저를 부르러 온 것을 보니 주묘서의 혼사 때문일 것이 분명했다.
강심설은 얼굴이 누렇게 떠서는 주학해를 데리고 문을 나섰다.
잠시 후, 일상원에 도착한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상석의 진씨는 얼굴이 대단히 어두웠다.
“어머님.”
강심설은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올린 후 주학해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려야지.”
“할머니.”
주학해는 귀여운 목소리로 진씨를 부르더니 그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평소 주학해를 아주 아끼는 진씨는 손자가 자신의 품에 기대자 가슴속의 모든 화가 눌러져 순간 화를 내기가 어려워졌다.
“어머니……!”
이때, 주묘서가 눈물을 닦으며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진씨는 화가 다시 불끈 치밀어 올라 주학해를 떼어 내며 말했다.
“네 둘째 고모에게 가 있거라.”
그 말에 주묘화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주학해를 끌어당겼고 그를 데리고 문밖으로 나갔다.
진씨가 싸늘한 눈빛으로 강심설을 노려보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그러자 강심설이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전 그저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그때 어머님도 셋째 도련님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으셨잖아요.”
“이것이!”
진씨는 책임을 전부 자신에게 떠넘기는 강심설을 보자 속이 뒤집어졌다. 물론 그때 자신은 분명 서씨 가문과 혼사를 맺은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지만, 그래도 강심설의 부추김이 더 컸었다.
“네가 중간에서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난 분명 심사숙고했을 것이다.”
강심설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진씨가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결국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진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강심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냉소를 흘렸다.
“첫째가 어쩌다가 너같이 재수 없는 것을 아내로 맞이했을꼬.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에 생긴 것도 별로이고 혼수도 없지. 거기다 하루 종일 죽상을 하고 있지 않느냐. 네가 엽연채의 반만이라도 능력이 있었으면 우리 큰애가 지금 그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게다.”
‘사내는 어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법! 큰아들은 몰락한 가문의 자식을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천한 서자는 후부의 적녀를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 지금 그리 잘나가는 것이고!’
생각하면 할수록 진씨는 더욱더 화가 났고 강심설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도 더욱 매섭게 변했다.
그러나 강심설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고, 진씨는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짜증이 확 솟구쳐서 소리쳤다.
“나가 보거라!”
강심설은 곧바로 휙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이 집안이 가면 갈수록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비양은 하루 종일 그 빌어먹을 여인만 생각하니 자신은 시어머니에게 기대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부터 이 시어머니는 자신이 한미한 가문 출신이고 그 군주만 못하다고 못마땅해했다. 그 후 엽연채가 이 집안으로 들어왔고 시어머니는 대놓고 엽연채와 자신을 비교하며 점점 더 자신을 미워했다.
그런데 이제 주씨 가문은 재기했고 자신의 친정은 여전히 보잘것없는 집안이니, 자신은 주비양에게 더욱더 어울리지 않는 짝이 된 것이다.
강심설은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괴로웠다. 그녀는 주학해를 데리고 놀고 있는 주묘화를 보더니 아들을 확 끌어당긴 다음 잰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주묘화는 넘어질락 말락 강심설에게 끌려가는 주학해를 쳐다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급히 떠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 * *
엽연채가 궁명헌으로 돌아오니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두 주방 어멈이 이번에도 앞다투어 음식을 가져와 추길과 혜연은 상 한가득 음식을 차려 놓았다. 회삼선燴三鮮(새우, 오징어, 닭고기 등을 넣고 조리한 음식)과 멸치볶음, 조미료를 넣지 않고 찐 훈제고기, 데쳐서 무친 식용 갈대의 순, 계란을 섞어 만든 제비집 요리, 남만시(가짓과의 풀)를 넣은 소고깃국이 차려져 있었다.
“주방 어멈들이 참 정성을 다했네요.”
추길은 웃음을 짓더니 옅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오늘은 훈제고기가 있네요. 도련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건데.”
“어쩌겠어. 궁에 계시잖니.”
엽연채는 피곤해서 상 위에 엎드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녀는 젓가락을 들며 이리 말했다.
“궁 안의 음식은 우리가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을 거야. 게다가 오늘은 분명 황제 폐하와 함께 식사를 할 테니 더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지.”
엽연채는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잠도 잘 주무시겠죠!”
추길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어렵사리 돌아오셨는데 집에도 못 오시네요.”
“음. 먹자! 함께 먹자꾸나!”
엽연채는 기운을 차리며 말했다.
식사를 마친 후 엽연채는 바로 씻고 잘 준비를 했다. 너무도 긴 하루였다.
엽연채가 목욕을 하려고 하자 추길은 사람을 시켜 방 안에 커다란 통을 들여놓게 한 다음 주방 쪽 사람들에게 물을 길어오는 걸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통의 반 정도는 찬물로, 반 정도는 뜨거운 물로 채웠다.
통 안에 뜨끈뜨끈한 물이 차자 엽연채는 안으로 들어가 몸을 담갔다. 온몸이 편안하게 녹아내렸다. 그녀는 통 가장자리 부분에 기대어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밖에서 깜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엽연채는 여전히 목욕통 가장자리에 기대어 있었다.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 있으니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졸음이 잔뜩 쏟아져 정신이 몽롱했다.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어요!”
까치처럼 재잘거리는 추길의 목소리에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며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공자가 돌아왔다고? 잘못 들은 거겠지?’
“도련님! 도련님! 아가씨께서는 지금 안에서… 들어가시면 안 되는… 꺅!”
밖에 있던 추길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고 엽연채는 이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자가 돌아온 거야? 어떻게 온 거지?’
이때,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둔탁한 발소리가 울려 퍼지며 육중한 투구와 갑옷이 스치면서 내는 듯한 쇳소리가 차르랑차르랑 들려왔다.
그가 온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엽연채는 놀라 순간 등을 곧추세웠다. 해당화가 흩날리는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병풍에 그녀의 옷가지가 걸려 있었고 훤칠한 한 사내의 그림자가 그 위로 비쳤다.
엽연채는 깜짝 놀라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얼른 통의 가장자리 부분을 꽉 움켜쥐더니 사방을 둘러보았다. 몸을 가릴 수 있는 뭔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자신을 가려 줄 뭔가를 찾고 있는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건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인.”
주운환이 밖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네…….”
대답한 엽연채는 내심 후회를 했다. 왜 대답을 했단 말인가? 하긴,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한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주운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병풍을 돌아 다가왔다. 그러자 작은 두 손으로 통 가장자리를 잡고 기대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환한 빛이 흐르는 곱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은 하도 붉게 달아올라 이내 피가 뚝뚝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엽연채는 커다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금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운환은 그녀를 쳐다보자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는 그만 참지 못하고 그녀 쪽으로 걸어가 옆에 있는 발판 위에 앉더니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살짝 쉰 듯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엽연채는 조그마한 두 손으로 욕통 가장자리를 잡고 기대어 이렇게 말했다.
“몸을 담그고 있었죠…….”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두 눈은 부끄러운 마음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만 같았다. 분명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건 주운환이고 이런 쓸데없는 말까지 물어보는데 왜 도리어 자신이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고 난처한 입장이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