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6화
저녁 무렵 궁문을 나선 엽연채는 곧장 도성 북쪽에 있는 주씨 가문으로 향했다. 그녀가 탄 마차는 궁의 마차로, 그녀를 주씨 가문 서쪽에 있는 수화문에 데려다주고 다시 궁으로 돌아갔다.
경인과 소종은 집으로 돌아온 엽연채를 보더니 얼른 그녀에게 달려갔다.
“마님.”
“그래.”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길이와 혜연이는 돌아왔느냐?”
“돌아왔습니다!”
경인이 헤헤 웃으며 답했다.
“아가씨께서 도련님 품에 안겨 말에 궁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본 뒤 저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습죠.”
그 말에 엽연채는 조그만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돌아서서 처소로 향했다.
그녀가 궁명헌의 대문으로 들어서자 파초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혜연과 추길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엽연채를 보자마자 얼른 그녀에게 달려왔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추길은 뒤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엥? 도련님은요?”
“지난번에 제민이가 말하지 않았느냐? 개선대가 설치됐는데 당연히 궁 안에서 며칠 머무르시겠지.”
엽연채는 그렇게 말하며 정원을 지나 안으로 향했고, 그녀의 뒤를 쫓아가는 추길과 혜연은 꽤나 실망한 기색이었다.
추길이 먼저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아가씨께서는 궁에 들어가신 후에 어디로 가셨어요?”
“황후 마마의 부름을 받아 마마의 궁에 가서 앉아 있다가 왔다. 공자와 다른 분들은 조정에 나가셨고.”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태자비 마마, 황후 마마 그리고 두 공주 마마와 함께 계셨어요?”
추길의 말에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후 마마만 계셨어.”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갈아입을 옷 좀 가져다주렴.”
바람이 불어 쌀쌀한 가을 날씨였지만 오늘은 달리기도 해서 땀도 좀 났고 먼지도 묻어 있었다.
혜연은 침실로 걸어가 옷장을 뒤적이면서 묵혀 둔 잔소리를 토했다.
“아가씨, 오늘 참 배짱도 좋으셨어요. 아래에 있던 사람들에게 밀리거나 다치기라도 하셨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엽연채는 말없이 태사의에 앉아 한껏 귀찮고 피곤한 모습으로 몸을 오그렸다. 두 팔을 손잡이 위에 올리고는 이마를 손등에 괴며 두 눈을 감았다.
그녀는 정말로 피곤했다. 오늘 주운환이 돌아오니 어젯밤 그를 생각하느라 잠을 통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은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피로가 몰려들어 몽롱하고 졸음이 쏟아졌다.
“아가씨? 아가씨?”
혜연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우움… 자고 싶어…….”
엽연채는 두 눈을 감은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주운환의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떳떳한 날이었는데 그 깃발들이 이편의 시선을 가려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생각을 하다 보니 그가 자신을 안아 말에 태운 후 함께 말을 타고 질주하던 그 순간이 또 떠올랐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가 분명 가까이 있음에도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마음이 좀 울적해졌다.
“그럼 환영회는 언제 열리는 거지?”
추길은 따뜻한 물을 채운 놋쇠 대야를 들고 오더니 한쪽에 놓인 세검가자洗臉架子(세숫대야를 올려놓는 거치대) 위에 올려 두었다.
“환영회는 보통 3일 후에 열리지! 지난번에 허 장군의 환영회도 3일 후에 열렸잖아.”
혜연이 미소를 지으며 추길의 말에 대답했다.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더니 세수를 하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추길은 엽연채가 옷을 입는 모습을 보더니 어리둥절해했다.
“아가씨, 피곤하시다면서 왜 쉬지 않으세요?”
“공자께서 진서후에 책봉되셨어. 그러니 당연히 집안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 줘야지.”
그녀는 그리 말하며 매화 문양이 수놓아진 검은색 웃옷의 단추를 잠갔다.
“게다가…….”
그녀는 옛일을 되새겨 보는 듯한 표정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은 좋은 일이 있으면 우리를 찾아와 우쭐대곤 하지 않았느냐? 이제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생겼으니 우리도 그 사람들을 보러 가야지. 예전에 그 우쭐댔던 모습을 그대로 돌려줄 거다.”
엽연채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옷소매를 뿌리치며 문을 나서 곧장 일상원을 향해 걸어갔다. 서과원에서 남쪽으로 쭉 걸어가고 있는데 정면에서 걸어오던 여종들이 모두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마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엽연채는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추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전에는 서과원 쪽에는 귀신 그림자조차 안 비쳤는데 이젠 모두 이쪽으로 몰려드네요.”
혜연이 주위를 쓱 둘러보니 주변에 있는 정자와 누각들은 전과 마찬가지로 허름한 모습이었지만 정자와 누각을 가리고 있던 잡초들은 이미 깔끔하게 제거된 상태였다.
어디 그뿐인가. 일상원으로 향하는 길 양쪽에 무성히도 자라나 있던 잡초들도 말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그 덕에 이 길은 널찍했던 본래의 모습을 다시 드러내고 있었다.
이는 주운환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음을 아는 집안 하인들이 자발적으로 청소를 한 결과였다. 그야말로 ‘강자에게는 아부하고 약자는 짓밟는다.’라는 말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엽연채 일행이 월공문月拱門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자 일상원에 도착했다.
진씨는 탑상에 앉아 있었는데 우아하던 그녀의 표정은 지금 아주 음침하고 냉랭해 보였다. 주 백야는 멍한 표정으로 탑상의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백 이낭과 주묘화는 하좌의 권의에 앉아 있었고, 웬일로 비 이낭과 주종과마저 이곳에 와 있었다. 두 사람은 백 이낭과 주묘화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셋째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밖에서 녹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활짝 핀 꽃 문양이 들어간 문발이 걷히더니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진씨와 주 백야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아버님, 어머님.”
진씨는 음랭한 눈빛과 표정으로 엽연채를 맞았고 주 백야는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왔다.
“아… 셋째 아가가 왔구나. 궁 안에서는… 어땠느냐?”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부군께서 진서후에 봉해졌습니다.”
“뭐라?”
엽연채의 이 말은 콰르릉거리는 천둥처럼 방 안 전체에 내리쳐 이곳을 뒤흔들었다.
진씨는 낯빛이 싹 변했고 한쪽에 놓인 탁자 위에 올려 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비천한 서자 놈이……! 어째서?’
“그럴 리가요? 셋째 도련님이 어떻게!”
비 이낭은 화가 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고 주종과는 손에 든 쥘부채를 꽉 그러쥐더니 잘생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진서후? 그놈이 후작위를 받았다고?’
자신은 아직도 백부의 세자 자리도 손에 넣지 못했는데 모든 면에서 제게 못 미쳤던 비천한 서자가 후야가 됐다니, 그에겐 너무도 잔인한 일이었다.
‘맙소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주종과는 하늘과 땅이 뱅글뱅글 도는 느낌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좌에 있는 백 이낭과 주묘화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주묘화의 얼굴에는 희색이 비쳤고 백 이낭은 살며시 진씨를 흘끗 곁눈질했다. 그러고는 속눈썹을 살짝 아래로 내려 눈에 담긴 조롱기를 감추었다.
‘쯧쯧.’
이 주인마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주운환이 주비양의 세자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고 떠들어댔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운환은 지금껏 정국백부 세자 자리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낭, 자네는 참 우스운 말을 하는군. 부군께서는 우리 대제의 영웅이네. 부군께서 출정하지 않았다면 서노와 남쪽 이민족이 사주沙州로 공격해 왔을 거네. 그런데 자네는 ‘도련님이 어떻게!’라고 말했는가?”
엽연채는 헛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내 부군은 자기 것이 아닌 걸 빼앗으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셨네. 원하는 게 있으면 직접 나가 필사적으로 싸우며 얻어 낸다고 하셨지.”
그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멍해졌다. 그리고 비 이낭과 주종과는 표정이 일그러져 더욱 꼴사나워 보였다.
비 이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따지고 들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네?”
“이낭, 나야말로 자네에게 묻고 싶군. 무슨 뜻이라니?”
엽연채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말한 그대로네. 뭐가 잘못됐는가?”
비 이낭과 주종과는 온종일 쑥덕공론하며 주비양을 끌어내리고 그의 세자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다. 주운환 역시 자신들과 같은 속셈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가 한 말은 그 지저분한 생각을 낱낱이 폭로하는 셈이었고, 가장 꼴사나운 부분은 그들이 그 추잡한 생각을 실현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진씨는 입을 악다물었다. 그녀는 줄곧 자신들이 주운환을 죽도록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비천하고 분수를 모르는 뻔뻔한 서자이며,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는 파렴치한 인간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내 주운환을 꺼려했고 그를 죽도록 미워하는 건 당연하고도 정의로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 서자는 주제를 모르는 몰염치한 놈으로 먼저 파렴치한 짓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는 주운환이 지금까지 분수에 만족했고 단 한 번도 세자 자리를 노린 적이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즉 진씨 쪽에서 그를 오해한 것이니 앞으로는 자신들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씨는 그 말이 전연 달갑지 않았다. 셋째 내외가 어떻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어떻게 떳떳하게 그들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주 백야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숙이고 흐르는 눈물을 쓱쓱 닦아 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공을 세웠으니 당연히 봉작을 받아야지.”
이런 공훈은 주 백야 자신이 온 힘을 다하고 일생을 다 바쳐도 이룰 수 없는 성과였다.
“부군께서 돌아오면 황제 폐하의 성지가 내려질 겁니다.”
엽연채가 이리 설명을 보태자 주 백야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때가 되면 필요한 것들은 네가 준비하거라.”
봉작과 성지를 받들 때는 향안香案(향로, 촛대 등을 올려놓는 긴 탁자)을 펴야 했다.
“됐다. 너도 오늘 피곤할 텐데 어서 가서 쉬거라!”
진씨가 냉랭한 목소리로 엽연채를 물렸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엽연채는 인사를 올린 후 그곳을 떠났고 멍해 있던 주 백야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바깥으로 나갔다.
주 백야가 향한 곳은 가문의 사당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전과 다름없이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선조들의 붉은색 위패가 눈에 들어왔다. 글자 하나하나마다 싸늘한 기운이 느껴져 마치 냉담한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 백야는 철퍼덕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고 쿵, 쿵, 쿵 머리를 몇 번 박더니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 불효 자손 주정이 오랫동안 가문을 수치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인정해야 했다. 출정하여 군대를 통솔하다가 예기치 못한 불행을 겪게 될까 봐 이리 살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타고난 자질과 재능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전부터 자신에게는 군대를 통솔할 재능이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온종일 과거 시험을 봐야 한다며 자조했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높은 자리에 앉아 명령을 내리며 능력 있는 자에게 자리를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잘못이 있는 건 자신일 뿐, 이 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