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5화
주운환은 상서방에 들어간 후 정선제와 오후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고 저녁 무렵이 되자 함께 석반을 들었다. 그는 술시戌時(오후 7~9시)가 되어서야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정선제는 하루 종일 너무 피곤했고, 주운환도 밤낮으로 길을 재촉해 왔을 줄 알기에 그에게 일찍 가서 쉬라고 명을 내렸다.
주운환이 상서방을 나오자 멀리 있던 여양과 여한이 얼른 그에게로 뛰어왔다.
“도련님.”
“주 후야. 소인과 함께 가시죠!”
어린 환관 하나가 냉큼 그리 말하며 주운환을 데리고 기다란 회랑을 지나갔다.
그런데 이때, 수수한 옷차림의 한 궁녀가 앞으로 걸어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올렸다.
“주 후야를 뵈옵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어린 환관을 쳐다보았다.
“이 환관, 황후 마마께서 장군을 부르시네.”
“그게 무슨…….”
이 환관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돌려 주운환을 쳐다봤다.
“주 후야를 모시고 명화궁明華宫으로 가려는 겁니까?”
수수한 옷차림의 궁녀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소인이 모시고 가겠습니다!”
궁에 머무르는 사람이 있을 경우 보통 명화궁에서 지내게 된다.
“주 후야…….”
이 환관은 고개를 돌려 또다시 주운환을 쳐다보았고, 주운환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는 어서 가 보게. 이 아이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하면 되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이 환관은 예를 올린 후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그 궁녀는 주운환을 훑어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주 후야. 가시지요.”
그녀는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주운환과 여양, 여한은 그 뒤를 따라갔다. 기다란 회랑을 지나가며 보니 화려한 건물과 정자들이 여기저기 서 있고 특이하게 생긴 화초들이 곳곳에 자랐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부귀하고 화려한 모습이었다.
두 개의 팔각정자를 또 지나자 작은 돌다리와 흐르는 물, 석가산이 지어진 아름다운 작은 화원이 나왔다.
그 궁녀는 작은 화원을 가리키며 미소와 함께 말했다.
“주 후야, 이 화원을 지나 고개를 들어 보면 궁전 하나가 보일 겁니다. 그곳이 바로 명화궁입니다. 소인은 중요한 일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알겠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궁녀는 인사를 올린 후 돌아서서 얼른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여양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저리 급히 가는 걸까요?”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대꾸했다.
“우리는 어서 가자꾸나.”
주운환은 앞에 있는 조그만 화원으로 먼저 걸어 들어갔다.
날은 이미 저물어 황궁 곳곳에는 등롱과 원등園灯이 켜져 있었다. 이 조그만 화원 안에도 원등이 두 개 켜져 있어 작은 화원에 그윽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근처에 있는 흐르는 물에서는 똑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거기에 선선한 가을바람도 불어오니 마음이 아주 평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운환이 안으로 들어가자 저 멀리 조그만 다리 위에서 우아하고 매력적인 자태를 뽐내는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스름한 저녁, 흐릿한 불빛 아래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오밀조밀한 하얀 꽃문양이 들어간, 앞섶이 교차하는 형태의 연두색 유군을 입은 이 소녀는 분홍빛을 띠는 붉은색 얇은 피백披帛을 팔에 걸치고 있었다. 가냘픈 허리에는 서로 겹쳐진 낙자와 보금이 걸려 있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함께 살랑살랑 흔들렸다.
소녀는 한 손에는 작은 꽃바구니를 건 채, 다른 한 손에는 어떤 꽃 몇 송이를 들고 있었는데 바구니 안으로 그 꽃들을 넣고 있었다.
소녀가 천천히 다가오자 고운 얼굴이 점점 더 또렷이 보였다. 계란형의 작은 얼굴에 반짝이는 요염한 눈, 붉은 입술. 매력이 철철 흐르는 아리따운 소녀였다.
“크흠.”
여양은 그 소녀를 보더니 뒤에서 얼른 주운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 소녀는 마치 지금에서야 주운환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듯, 어여쁜 얼굴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다소곳이 인사를 올렸다.
“주 후야를 뵈옵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요염한 눈으로 살짝 위를 쳐다보더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도 참는 듯한 눈빛으로 주운환을 쳐다봤다.
주운환이 유명해졌다고는 하나 후작에 봉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소녀는 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했다.
애초에 경비가 삼엄한 궁 안에서 이렇게 난데없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규율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런 눈빛으로 주운환을 쳐다보는 걸 보니 그의 환심을 사려고 달려드는 게 분명했다.
소녀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앞에 있는 잘생긴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는 변방에서 하루 종일 사내들만 상대하며 몇 달을 굶주렸고 또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미인이 다가왔으니 어디 참을 수 있으랴.
소녀는 정씨 가문의 방계 소저로,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종가宗家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으니, 그녀는 고관이나 귀족의 첩실이 되는 운명일 것이었다.
그래서 장차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은 어떤 영감이거나 퉁퉁하고 옹졸한 사내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젊은 후야가 남편감이 된 것이다. 혁혁한 전공을 세워 조정과 백성들에게 이름을 떨친 큰 영웅일 뿐만 아니라 잘생긴 외모에 청수하면서도 화려한 분위기까지 풍기는 미남자가 말이다.
그는 그야말로 도성 최고의 미남이라 불리는 양왕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사내였다.
소녀는 점점 더 주운환이 마음에 들었고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존경심과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주운환은 냉담한 표정을 지을 뿐, 그의 눈빛에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그가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소녀의 이름은 홍인이라고 하옵니다. 후야께서 변방에서 나라를 위해 분투하셨고 끊임없이 모래바람을 맞으며 전장에 뛰어드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분명 도성의 아름다운 꽃이 그리우셨을 겁니다. 하여 꽃을 드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홍인은 그리 말하며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녀의 말인즉, 자신은 그를 유혹하러 온 것이며 그의 첩실이 되고 싶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운환은 수묵으로 그린 것 같은 눈동자를 싸늘히 빛내더니 코웃음을 치고는 그녀를 비켜 갔다. 그가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며 자리를 뜨자, 뒤에 있던 여양과 여한은 얼른 그의 뒤를 쫓아갔다.
“주 후야.”
정홍인이 깜짝 놀라 그의 뒤를 쫓으려는 찰나, 앞에 있는 여양과 여한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여양이 소곤거리며 물었다.
“몰라. 분명 도련님을 유혹하러 온 거겠지.”
여한의 대꾸에 여양은 황당하단 듯 소리를 냈다.
“엥? 저 사람은 생긴 게 좀 그런데…….”
“그러니까 말이야. 마님의 절반도 못 미치잖아. 도대체 무슨 용기로 저런대.”
‘생긴 게 좀 그렇다고? 마님의 절반도 못 미친다니?’
어릴 때부터 출중한 외모를 갖고 있던 정홍인이 어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얼굴을 평가받은 적이 있겠는가.
지금 여양과 여한이 나눈 대화를 들은 그녀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자신의 조그만 얼굴을 만지작거렸고 일순 삶에 대한 회의가 느껴졌다. 그때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못생겼구나.”
그 말에 충격을 받은 정홍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으앙’ 눈물을 쏟으며 뛰어가 버렸다.
황후는 그녀에게 설령 상대방이 냉담하게 굴며 거부를 해도 온갖 방법을 써서 들러붙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 발로 찾아온 미인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주운환의 ‘못생겼다’라는 말은 그녀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아 버렸다. 어떻게 이곳에 더 머무를 수 있겠는가?
정홍인은 달음박질하여 봉의궁으로 돌아왔다.
* * *
정 황후가 사 마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수수한 차림의 한 궁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황후 마마, 홍인 소저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라?”
정 황후는 어리둥절해하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 마마도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어째서 돌아오셨다는 말이냐? 어서 안으로 뫼시거라.”
궁녀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눈시울이 붉어진 정홍인이 몸을 움츠린 채 덜덜 떨며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팔에는 아직 그 꽃바구니가 걸려 있었고 그녀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고는 정 황후를 쳐다봤다.
“황후 마마…….”
“어째서 돌아오신 겁니까? 명화궁으로 가서 주 후야의 시중을 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 마마가 다그쳤다.
“설마 만나지 못하신 겁니까?”
“봤네…….”
정홍인은 우물쭈물했다.
“봤는데 어째서 돌아오신 겁니까?”
사 마마가 차가운 목소리로 거듭 몰아세웠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분께서 소저의 시중이 필요 없다고 하셔도 끈덕지게 달라붙어야 한다고 말이에요.”
정홍인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아까 그 주운환 일행이 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웠다.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황후가 자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정홍인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분이… 내가 못생겼다고 하셨네…….”
“못생겼다?”
정 황후와 사 마마는 표정이 확 굳어졌고 이어 정홍인을 훑어봤다. 그들이 자신을 훑어보자 정홍인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고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정 황후와 사 마마는 정홍인을 쳐다보다가 오늘 봤던 엽연채의 모습이 떠오르자 얼굴이 한층 딱딱해졌다.
정홍인은 못생기기는커녕 빼어난 미인이었다. 하지만 엽연채와 비교해 보니 확실히 그녀의 미색과 자태에는 절반도 못 미쳤다.
‘주운환은 매일같이 집에 있는 절세미녀를 보며 그 미모에 익숙해졌을 테니 당연히 다른 미인은 눈에 차지 않겠지…….’
“됐으니 일단 가서 쉬거라.”
정홍인은 억울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한 후 궁녀를 따라 그곳을 떠났다.
“다른 이유였다면 다시 들러붙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 그분 눈에는 다른 사람의 얼굴은 들어오지 않는 것이니 이 일은 성사시킬 수 없는 일이옵니다.”
사 마마가 새파란 얼굴로 말했다. 정 황후는 어두워진 안색으로 더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