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33화 (433/858)

제433화

“황제 폐하.”

고원은 이를 악물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황제이신 제 오라버니께서 대제의 황제 폐하께 주 장군과 혼약을 맺게 해 달라고 청을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정선제는 미간을 찌푸렸고, 태자도 미간을 꿈틀거렸다.

‘남쪽의 공주가 주운환에게 들러붙으려는 모양이지? 그런다고 내가 어떤 이득을 보는 건 아니지만, 공주가 주운환에게 강가降嫁하면 분명 평처가 될 것이다. 그리되면 엽연채는 분명 주운환과 갈등이 생길 테지.’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 것인가? 강화는 어쩌고?”

이때, 양왕이 냉소를 지으며 재차 훼방을 놓았다.

“우리 대제에서 가장 훌륭한 장수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그 말에 고원은 화가 치밀어 올라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정선제는 표정이 싸늘해졌다. 주운환은 지금 대제에서 가장 능력 있는 맹장이니 그는 반드시 변경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이 남쪽의 공주가 기어코 그와 한편이 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정선제는 표정이 한층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

조정 신하들도 한기를 한껏 내뿜는 눈빛으로 고원을 노려봤다. 마치 음흉한 속셈을 품고 있는 고원을 질책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고원은 양왕의 말에 하마터면 화를 터뜨릴 뻔했다.

사실 자신의 오라비는 제게 꼭 주운환에게 시집가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대제의 황제가 저를 아무하고나 짝지어 주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주운환은 아주 잘생겼고 능력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조금 전 그가 미인을 품에 안은 채 말을 타고 내달리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고원은 주운환에게 아주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가 원망스러우면서도 그를 흠모했다. 그가 미인을 품에 안고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두 사람 사이를 망가뜨려 그에게 복수하고 싶기도 했다. 동시에 그에게 시집가면 그를 흠모하는 제 마음도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편의 잔꾀에 또 다른 절세미남이 자꾸 딴지를 걸 줄은 몰랐다.

‘이 사람이 양왕인가?’

양왕은 과연 듣던 대로 매력이 흘러넘치는 사내지만 까다로운 성격에 쌀쌀맞고 박정한 사람이었다.

“양왕 전하, 말씀이 좀 지나치시군요. 저희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고원이 성난 목소리로 따지기 무섭게 주운환이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강화할 마음이 있으면 공주께서 따져 고를 게 아니라 황제 폐하의 뜻에 따르시지요. 그럴 마음이 없으면 본국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럼 제가 날을 골라 군을 이끌고 남하할 테니 말입니다!”

그 말에 고원은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별 뾰족한 수가 없으니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꼬리를 내렸다.

“황제 폐하의 뜻에 따르겠사옵니다.”

상석의 정선제는 콧방귀를 뀌더니 축 처진 두 눈으로 하좌에 자리한 조정 신하들을 쭉 훑어봤다. 남쪽 이민족은 그들과 같은 겨레가 아니니 필시 다른 마음을 품을 것이었다. 즉, 이 공주는 신하의 가문으로 시집을 가면 안 되었다.

생각을 하던 정선제의 시선이 태자에게 향했다. 하지만 태자에게는 정비와 측비가 모두 있었고 남쪽 공주의 지위가 그들보다 낮을 수는 없으니 태자에게 시집보내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정선제의 시선은 용왕에게 향했다. 용왕은 이제 열여덟 살이고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민족의 공주가 어떻게 대제의 정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정비의 자리가 비어 있는데 이 공주에게 측비가 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정선제는 노왕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이 아들은 마침 측비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로 아직 새로운 측비를 들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노왕의 측비로 들이겠다!”

정선제가 그렇게 결정하자, 양왕은 코웃음을 쳤다.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아래에 있던 고원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노왕? 노왕이라니?’

그녀가 사람을 확인하려는 사이, 마흔 살이 다 되어 보이는 한 사내가 정선제를 향해 공수하며 감사를 표했다.

“황송하옵나이다, 아바마마.”

이편의 아버지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사내였다. 고원은 화가 치밀어 올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고원은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다. 이 사내는 자신이 상상하던 남편의 모습에는 조금도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선제는 다시 옥납한, 고원과 화친에 대해 상의를 했다. 사실 이 두 사람이 도성에 들어오기 전에 정선제는 이미 조정 신하들과 화친 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그 화친 조건을 꺼냈고 양국은 상의 끝에 합의를 봤다.

큰일이 성사된 후 정선제는 상을 내리고자 했다.

“서정 대장군 주운환은 듣거라!”

주운환은 얼른 무릎을 꿇었다.

정선제의 나이 든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서정 대장군 주운환은 군대를 이끌어 서노를 격퇴하고 남쪽 이민족을 교화하여 대제의 수천만 백성들을 보호하는 크나큰 공을 세웠다. 이에 짐과 백성들 그리고 이 나라는 다행스럽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오늘부로 주운환을 정2품 진서후鎭西侯에 봉하며, 조정에 나와 정사를 논할 것을 명한다. 또 황금 천 냥과 기름진 논 천 경頃, 저택 한 채를 하사한다. 이상!”

정선제의 말에 대전 안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풍씨 가문을 생각해 보니 그들은 무려 응성을 9년 동안 지켰는데도 작위를 받지 못했다. 연초에 허대실도 그리 용감하게 싸웠지만 작위를 얻지는 못했다.

그런데 열여덟밖에 안 된 이 소년은 겨우 몇 달 만에, 모든 군인들이 평생 동안 꿈꾸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그는 아직 젊다 못해 어리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조정에 신흥 귀족이 탄생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주운환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황제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주운환은 고개를 숙이고 황제의 은혜에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선제는 그를 보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또 한 가지를 상으로 내렸다.

“적염전갑赤焰戰甲도 하사하겠다.”

양왕은 깜짝 놀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부 젊은 신하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으나 전지신과 유 재상 등은 당연히 이 적염전갑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바로 정비인 소 황후가 젊었을 때 입었던 투구와 갑옷이었다. 이 투구와 갑옷은 특이하게도 크기를 조절할 수 있어 남녀 모두 입을 수 있었다.

조정 신하들은 이 투구와 갑옷이 정선제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 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정선제는 적염전갑을 정성스럽게 보관해 왔는데 뜬금없이 주운환에게 하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주운환을 쳐다보는 그들의 시선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양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정선제를 바라보았고, 정선제는 그의 눈빛을 못 본 척했다.

“황제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주운환은 다시 그에게 예를 올렸다.

“하하하! 진서후는 짐과 함께 서재로 가자꾸나. 짐이 그대와 자세히 이야기를 나눌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 오늘 조회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정선제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채결의 부축을 받으며 그곳을 떠났다.

“예, 폐하.”

주운환이 정선제와 함께 그곳을 떠나려 하는데 조정 신하들이 얼른 그에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진서후, 축하하네. 하하하!”

“자네는… 참, 하하하! 내 두 손 두 발 다 들었네!”

장찬은 주운환을 쳐다보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을 내뱉었다.

주운환은 자신의 손자와 같은 회에 거인擧人이 되었고 같은 회의 춘시에 응시했다. 당시 전시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6품 소관에 불과했다. 이렇게 고작 몇 개월 만에 대장군에서 후야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주운환은 자신의 손자보다 몇 살이나 더 어렸다.

정말이지 주운환과 장박원을 비교하면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다. 장찬은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웃음을 지었다.

전지신과 요양성 등은 억지웃음을 짓고는 말없이 한쪽으로 물러섰다.

전에 주운환을 탄핵했던 어사 왕성촌은 고개를 움츠린 거북이가 되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움츠린 채 구석으로 물러났다.

유 재상도 주운환을 쳐다보며 감탄했다. 그는 전에 주운환을 모함하려고 했었다. 주운환이 초빙풍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주운환은 초빙풍에게서 무엇 하나 빼앗아 가지 않았다.

유 재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다행히도 그때 손을 안 썼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주운환에게 원한을 샀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좋은 관계를 맺으면 되리라 생각했다.

“하하하. 축하하오. 난 진작부터 장군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소.”

이때, 태자가 주운환 쪽으로 걸어오더니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군. 이젠 이자를 어떻게 끌어들일지 생각하는 수밖에 없어. 엽연채는… 더는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겠군.”

“황송하옵니다. 태자 전하.”

주운환은 공수하며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소신은 상서방에 가야 하니 먼저 물러나겠사옵니다.”

조정 신하들은 주운환을 둘러싸고 대문 앞까지 따라가고 나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대전을 떠난 주운환은 이곳저곳을 지나쳐 마침내 상서방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안에서 양왕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투구와 갑옷은 제가 몇 번이나 청하였는데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넌 출정하여 전장에 나가 싸우지 않았다.”

정선제는 말을 좀 얼버무렸다.

“허대실도 전장에서 싸웠고 강왕도 싸웠습니다. 그럼 왜 그들에게는 주지 않으신 겁니까? 곰팡이가 다 끼게 궁 안에 놔두시면서 제가 달라고 청했을 때는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주시다니요.”

양왕의 목소리는 격정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정선제는 이마를 만지며 변명했다.

“그 사람들은 입어도 태가 안 난다…….”

오늘 주운환의 모습은 정말이지 소 황후를 쏙 빼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자신은 문득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소 황후는 생기가 넘치던 사람이었으니, 그 투구와 갑옷을 곰팡이가 끼게 궁 안에 놔두는 건 분명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정선제는 마치 소 황후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유언 같은 것을 남긴 적이 없으니 자신도 어떤 당부의 말을 들은 적은 없으나, 그녀도 분명 남기고 싶은 유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갑옷도 차마 남기지 못한 그녀의 유지 중 하나였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생각하니 정선제는 감동이 물밀듯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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