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2화
“와아아!”
양쪽으로 서 있던 백성들은 주 장군이 갑자기 한 소저를 안아 올려 말 위에 앉히는 모습을 보자 소리를 질렀다.
“장군!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뒤에 있던 부장과 호위병들은 깜짝 놀랐다.
그동안 규율을 엄격히 지키는 장군님이,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엄벌에 처했던 장군님이 갑자기 웬 소저 한 명을 안아 올리고 내달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주위에 있던 백성들 역시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고, 요릿집 위층에서 영웅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들은 질투심을 느끼며 달갑지 않은 기색을 비쳤다. 하지만 그보다는 부러움이 더 크기에 탄성과 함께 아리따운 웃음소리를 냈다. 다들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얇고 가벼운 비단 손수건을 아래로 던지며 흥을 돋웠다.
순식간에 백성들이 몰려들며 분위기는 한층 더 고조되었다. 온갖 꽃들이 하늘을 뒤덮고 오색 깃발은 나풀나풀 휘날렸으며, 하늘거리는 손수건은 공중에서 빙빙 돌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이 순간 엽연채의 사무치던 그리움도 눈 녹듯 사라졌다.
근처의 개선대 위에는 정선제와 태자, 양왕을 비롯한 황자들, 유 재상과 육부의 상서 등이 서 있었다. 멀리서 주운환이 갑자기 한 소저를 품에 안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태자는 한눈에 엽연채를 알아보고는 잘생긴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저, 저건 풍속을 문란케 하는…….”
전지신이 그를 꾸짖으려는 찰나, 정선제가 호탕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젊을 때는 저럴 줄도 알아야지. 하하하하! 좋다, 좋아!”
황제마저 즐거워하자 여지 등의 다른 신하들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러니 전지신 등은 감히 뭐라 더 말할 수가 없었다.
“하.”
양왕은 멀리서 다가오는 주운환을 보더니 ‘픽’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 녀석이 갈수록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군.”
정선제는 뒷짐을 진 채 멀리서 다가오는 주운환의 모습을 바라봤다. 소년은 육중한 은갑으로 무장하고 긴 머리는 전부 머리 뒤로 묶은 모습이었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소년은 날아오를 듯한 표정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정선제는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치며 의기양양해하는 소년 장군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째서인지 콧날이 조금 시큰거리며 눈앞의 정경이 흐릿해졌다. 주운환에게서 과거 준마를 타고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힘차게 달려오던 곱고 아리따운 소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어릴 적 자신들도 주운환과 엽연채처럼 함께 말을 몰았고, 가는 곳마다 웃음꽃이 만발했다. 자신들의 웃음소리는 끊어질 줄 몰랐고 아득히 먼 곳까지 전해지곤 했다.
정선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주운환은 이미 그의 앞에 다다랐다. 그가 고삐를 힘껏 잡아당기자 사람과 말 모두 개선대 앞에 멈춰 섰다.
주운환은 몸을 돌려 말에서 내린 다음 돌아서서 엽연채를 안아 말에서 내려 줬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앞으로 다가가 포복袍服을 걷어 올리고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그래, 그래. 어서 일어나거라!”
정선제는 꼿꼿한 자세로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 장군을 보더니 흥분하여 개선대에서 내려와 주운환을 직접 부축해 일으켰다.
“장군이 고생이 많았다!”
“모두 폐하께서 절 등용해 주신 덕분이옵니다.”
“황궁으로 돌아가자꾸나.”
정선제는 그리 말하고는 엽연채를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같이 가자꾸나!”
황제가 자신에게 같이 가자고 하니, 엽연채는 너무 기뻤다.
“황송하옵나이다, 폐하.”
“마차를 준비하거라. 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채결이 말했다.
정선제가 마차에 오르자 주운환은 몸을 돌려 말 위에 오른 다음 엽연채를 다시 자신 앞에 앉혔다. 양왕과 태자, 재상과 상서 등도 모두 말을 타고 주운환 옆에서 함께 움직였다.
마차에 탄 정선제는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자신도 말을 타고 싶었지만 병든 몸이라 마차에 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궁문으로 들어서자 모두들 말에서 내렸고 주운환 등은 대전으로 향하고 엽연채는 궁녀에게 이끌려 황후의 궁으로 갔다.
봉의궁의 정 황후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궁녀가 들어와 이렇게 아뢰었다.
“마마, 장군이 돌아오셨습니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도 함께 입궁하셨고… 지금 이곳에 와 계십니다.”
정 황후는 낯빛이 아주 어두워졌으나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군의 부인이 왔구나. 어서 안으로 들라 하라.”
엽연채가 궁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정 황후는 미소를 띠고 있는 엽연채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더더욱 언짢았지만, 온화한 얼굴로 앉으라고 권했다. 그녀는 힘겹게 이야깃거리를 찾아 엽연채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그때 주운환 등은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정선제는 옥좌에 앉았고 양왕과 태자, 전지신 등은 양쪽으로 섰다.
주운환은 중앙에서 정선제를 향해 큰절을 한 후 보고를 올렸다.
“소신, 다행히도 주어진 사명을 욕되지 않게 완수했사옵니다. 적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냈고 응성을 탈환했사옵니다. 현재 서노와 남쪽 이민족 모두 고개를 숙이고 신하가 되겠다며 복종하였고, 강화 조약을 맺을 준비를 하고 있사옵니다.”
“장하다!”
정선제는 격양된 목소리로 칭찬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서노와 남쪽 이민족을 이렇듯 복종시킬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로써 자신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며 한 시대의 성군이 된 셈이었다.
“들어 보니 서노의 황자와 남쪽 이민족의 공주가 포로가 되어 도성으로 들어왔다고 하던데?”
태자가 앞으로 한 발짝 나오며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예.”
주운환이 냉담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선제는 ‘흥’ 콧방귀를 뀌고는 이렇게 말했다.
“데려오너라.”
“서노의 둘째 황자와 남쪽 이민족의 공주는 안으로 들라.”
채결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밖에서도 높은 어조로 외치는 환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밖에서 들리는 어린 환관의 목소리와 함께 남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사십 대로 보이는 사내는 짙은 눈동자에 높은 코가 도드라지는 외양이었다. 그는 비스듬한 옷깃이 달린, 갈색 수피獸皮로 만든 호복胡服(북방과 서방의 이민족인 호인胡人들이 입던 옷)을 입고, 머리에는 두꺼운 천으로 만든 회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사내의 옆에는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수려한 외모를 가진 이 소녀는 앞섶이 교차하는 오색 빛깔의 상의와 백첩군百褶裙(주름치마)을 입었는데, 소맷부리와 대금大襟(단추로 채우게 되어 있는 오른쪽 앞섶)의 가장자리에는 화려한 꽃과 새 문양이 수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오더니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정선제를 보며 몸을 굽히고 예를 올렸다.
“대제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조정 신하들은 두 사람을 보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백 년이 넘게 대제의 숙적이었고, 최근 몇 년 동안은 대제에 크나큰 손실을 입히며 대제의 백성들을 수도 없이 죽였다. 그러니 이들을 적대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신하가 되어 복종하겠다면서 황제 폐하를 뵙고도 무릎을 꿇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차가운 목소리로 책하는 태자는 위엄이 넘쳐흘렀다.
두 사람은 낯빛이 확 변했다. 하지만 늘 사납고 흉악한 강골이라 불리던 서노의 황자가 먼저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서노의 2황자 옥납한이 대제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서노 사람들은 항상 힘센 사람의 말에 복종해 왔다. 주운환이 서노의 용맹스러운 장군들을 거의 다 참살하면서 처참한 상태에 처하자 그들은 그대로 항복을 했다.
반면, 남쪽의 공주는 복종하기는커녕 분개했다. 이 소년 장군이 계략을 써서 자신들의 자랑인 기묘한 전술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어찌 패배를 인정하려고 했겠는가? 그녀는 여전히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남쪽 변방 지역의 7공주 고원이 대제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정선제는 아래에 부복한 두 사람을 보자 속이 후련해졌다. 그는 콧방귀를 뀌고는 두 사람에게 일어나라는 말도 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이 두 나라를 대표하여 강화를 논하러 온 것이냐?”
“예. 성의를 보이기 위해 제가 화친을 맺으러 대제로 왔사옵니다.”
고원의 대답에 정선제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를 쏘아보는 조정 신하들의 눈빛에는 멸시가 담겨 있었다. 손윗사람이나 중매인을 불러와 말하지 않고 자기 입으로 화친혼을 거론할 줄이야.
옥납한이 말했다.
“저희 서노의 공주도 곧 도착할 것이옵니다.”
고원이 또 말했다.
“현재 제위에 계신 황제 폐하는 저와 동복남매인 오라버니이옵니다. 이번에 이곳에 오면서 혼수도 가져왔으니 대제에서 날짜를 골라 주시지요. 신랑은…….”
그녀는 그리 말하며 예쁜 눈으로 조정 안을 훑어보더니 주운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으려 했다.
“바로…….”
“잠깐.”
누군가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양왕이었다. 그의 매력적인 두 눈동자에는 조롱기가 가득했다.
“우리 대제의 훌륭한 사내들이 줄지어 서서 패전국 공주의 선택을 받으란 말인가?”
양왕의 발언에 고원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조정 신하들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선제의 표정은 어두웠다. 고원은 어쨌든 일국의 공주이니 그녀가 누군가에게 시집가고 싶다고 하면 그는 당연히 윤허해 줬을 것이다.
방금 전 고원은 주운환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기야 절세미남인 데다 그녀의 국가를 굴복시킨 당사자이니 공주가 소년 영웅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 그녀가 그와 혼례를 올리고 싶다면 윤허해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양왕의 말에 정선제도 정신이 들었다.
‘이런 제길, 패전국의 공주가 꼿꼿이 서서 대제의 훌륭한 사내를 고르려 하다니. 무슨 자격으로!’
고원이 정말로 화친혼을 택한다 해도 그녀는 자신이 골라 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야 마땅했다.
고원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어쨌든 자신은 공주이니 먼저 상대의 기세를 꺾고 좋은 사내에게 시집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저지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고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양왕을 힐끗 쳐다봤다. 그 역시 정말 잘생긴 미남자였지만 아쉽게도 음흉한 사람이었고, 게다가 지금 제 뜻대로 혼인할 사내를 고를 수 있는 상황 역시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