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1화
장명가는 온통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말을 타고 있는 주운환은 호방한 기운을 내뿜으며 군사들을 이끌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은갑으로 무장한 소년은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화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요릿집 위층에 자리한 규수들은 잘생긴 소년 장군을 보자 가슴 설레고 수줍어했다.
“도련님, 황제 폐하께서 앞쪽에 개선대를 설치해 놓으셨어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그곳에서 도련님을 맞이하시려는 거죠!”
여양이 뒤에서 흥분한 목소리로 알려 왔다.
“그래!”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사방에 있는 요릿집 창문을 오갔다. 그런데 온갖 곳에 오색 깃발들이 흩날리고 있어 그가 보고 싶은 사람의 모습은 도저히 보이지가 않았다.
“도련님, 사람들로 붐벼서 찾을 수가 없네요. 어서 가시지요.”
여한이 이리 말하자 주운환은 실망감에 입을 살짝 오므렸다.
오늘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지난 18년 동안 쥐 죽은 듯 지내온 건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
어릴 적, 그의 삶은 아주 단조로웠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에게서 온갖 조롱과 무시를 당하며 지내 왔다.
그는 집안의 서자였고, 또 친어머니인 이낭이 일찍 세상을 떠난 데다 그녀가 기루 출신인지라 보통의 서자들보다 훨씬 비천한 신분이었다. 그 후 집안이 몰락하면서 그는 주씨 가문에서 더욱더 비천한 신세가 되었고 아무나 짓밟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찍소리 하지 않고 인내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그를 괴롭히는 데서 즐거움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번 생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전부터 늘 대장군이 되기를 갈망해 왔고, 어른이 되기만 하면 응성에 가서 장수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리라 생각했다. 그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항상 꿈꿨다.
나중에서야 두 줄기 빛이 자신을 찾아왔는데, 하나는 양왕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엽연채였다.
열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서원에서 벗들과 함께 스승을 따라 금琴을 배우고 있었다. 그날 기분이 안 좋았던 스승은 이편이 조調 하나를 틀리게 연주했다며 일부러 트집을 잡더니 서원 문 앞에 가서 두 손으로 금을 들고 서 있으라는 벌을 내렸다.
그날은 마침 자신의 열 번째 생일이었고 엄동설한인 십일월이었다. 두 손이 꽁꽁 얼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결국 손에서 미끄러진 금이 바닥 위로 떨어져 두 동강이 나 버렸다.
그건 서원의 금이었는데 그에게는 변상할 돈이 없었다. 집안에는 돈이 있었지만 그를 위해 변상해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마치 이런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게 마땅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크게 두려워하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이런 일은 하나 더 생기든 줄어들든 마찬가지였다.
그때, 금색 문룡蚊龍 문양이 들어간 공단貢緞 장화가 땅에 떨어져 있는 부러진 금을 밟으며 녹은 눈이 섞인 오물을 튀겼다.
“네가 내 장화를 더럽혔구나.”
고개를 드니 한 사내가 눈앞에 서 있었다. 사내는 귀해 보이는 짙은 자줏빛의 화려한 의복에다가 가장자리에 깃털 장식이 달린, 담비 털로 만든 소매 없는 두꺼운 외투를 걸친 차림이었다. 잘생겼고 매력적이지만 냉담함이 느껴지는 생김새의 사내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흑옥 같은 긴 머리칼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사내의 눈은 극도로 냉혹해 보였으나 눈빛에는 미미하게나마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전 변상할 능력이 없습니다.”
당시 그는 냉담한 목소리로 이 말만 했다.
눈앞에는 돌 의자와 탁자가 자리했고 그 위에는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 사내는 돌 의자 위에 쌓인 눈을 쓱쓱 치워 낸 후 앉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교령십삼조喬令十三調>를 연주할 줄 아느냐?”
“들어 본 적 없습니다.”
주운환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이때, 그 사내 뒤에 서 있던 시종이 앞으로 나오더니 초미금蕉尾琴 하나를 건넸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는 초미금을 탁자 위에 올린 다음 손가락으로 가볍게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아주 가볍고 부드러운 곡이었다. 그런데 잇달아 열세 번이나 전조轉調(곡조를 다른 곡조로 바꿈)가 일어났다. 높은 조에서 낮은 조로 갔다가 다시 낮은 조에서 높은 조로 올라갔다. 시작부터 끝까지 아주 까다로운 곡이었다.
그 곡에는 극도로 격양된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고 흐느끼며 하소연하는 듯한 분위기만 이어졌다. 그럼에도 애끓는 슬픔과 단정斷情, 조용함과 쓸쓸함을 토로하고 있었고 마지막에 조를 높일 때는 쇠락하는 분위기가 한층 더 짙게 느껴졌다.
“이 곡이 <교령십삼조>다.”
자줏빛 옷의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다면 이 금을 네게 선물로 주마.”
그는 코웃음을 친 다음 사내 쪽으로 걸어가 금을 들었다. 그러고는 새하얀 눈이 쌓여 있는 땅바닥 위에 책상다리로 앉은 뒤 금을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두 개의 음을 시험해 본 후 연주를 시작하자 손가락 끝에서 방금 전 그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곡의 깊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음조는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금 소리에서는 공허한 실의만 가득할 뿐 생동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줏빛 옷의 사내는 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이리 평했다.
“이 천부적인 재능을 보니 과연……. 하하. 나쁘지 않구나.”
“이제 이 금은 제 것이군요.”
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사내를 쳐다봤다.
“계속 이렇게 살고 싶으냐? 아니면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으냐?”
자줏빛 옷의 사내가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고 싶으냐? 다시 주씨 가문을 부활시키고 싶으냐? 그럼 나와 함께 하자꾸나! 위로 올라가거라!”
사내의 말에 그는 놀라고 말았다.
주씨 가문을 다시 부활시키고 싶으냐고 물었는가? 그렇다. 줄곧 그런 꿈을 꿔 왔다.
다만 이젠 스스로도 이 꿈이 좀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주씨 가문은 몰락했고 주씨 가문의 주인과 적장자마저 포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껏 그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한 적 없는, 보잘것없는 일개 서자가 가문을 다시 부활시키겠다니, 가당키나 한 일일까?
어쨌든, 그 후로 양왕은 사다리를 건네주었고 주운환은 줄곧 그것을 목표로 위로 올라왔다. 그 길을 걸으며 쓸쓸함을 느꼈지만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살아왔고, 어서 대업을 이루고 싶었다.
그런데 한 여인이 그의 적막했던 삶을 비집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저 그 여인 때문에 자신의 삶이 더욱 고달파질 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신을 개의치 않았고, 알게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그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기억하고 매일같이 그것들을 준비해 주었다. 그가 무릎을 꿇고 필사를 해야 할 때도 곁에 함께 있어 주려고 했다.
그 자신이든 여한과 여양이든, 이런 시기에 참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모든 것을 참고 견뎌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직 그녀만이 그가 인내하면서도 고단하고 허기질 것이라는 점을 알아줬다.
그는 용맹한 대장군이 되어 국토를 수호하고 주씨 가문의 명성을 되찾고 싶었다. 명예를 얻고 공신이 되어 아내는 봉전封典(나라에서 공신功臣이나 그 조상에게 작위·명호를 내리던 일)을 받고 자손들은 대대로 관직을 세습하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주위에서는 백성들의 환호성이 끊임없이 들려 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오색 깃발이 나부끼며 하늘은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자신이 지나가는 길을 비단 삼아 그 위에 수를 놓는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준마는 대부대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쭉 뻗은 널찍한 대로를 지나가다 보니 저 멀리 높이 솟은 개선대가 보였고 그곳에는 지고지상한 천자가 서 있었다.
“도련님, 저기 추길과 혜연이 보입니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로 갑자기 여한의 외침이 들렸다. 그러자 주운환은 순간 멍해지더니 고개를 돌려 여한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주운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 그곳을 쳐다봤다. 엽연채를 보고 싶었지만 결국 그녀는 찾지 못했다. 그런데 혜연이 갑자기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도련님, 저쪽이에요!”
주운환이 어리둥절해하며 몸을 돌려 보니 인파 속에서 아담한 체구의 아름다운 한 여인이 사람들을 비집고 저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주운환도 자신을 발견했음을 알고 미소 띤 얼굴로 깡충깡충 뛰며 손을 들었다.
“부군! 부군!”
그러고는 사람들을 밀며 비집고 나왔다.
주운환의 말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기에, 엽연채는 만면에 미소를 드리운 채 치마를 들고 쫓아왔다.
“부군!”
“왜 이곳까지 달려왔습니까? 사람들로 붐비니 어서 돌아가십시오!”
주운환은 잘생긴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은 채, 고삐를 세게 잡아당겨 말을 멈춰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탓에 말이 주인의 지시를 따르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위에서는 가려져서 부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요.”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며 치맛자락을 든 채 걸음을 재촉했다. 화려한 옷을 입은 그녀가 아름다운 미소로 화사한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자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길을 내주었다.
엽연채의 말에 주운환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어,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겼다. 엽연채는 갑자기 하늘과 땅이 뱅뱅 돈다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 말 위에 올라와 있었다.
“꺅!”
엽연채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시선은 단숨에 위를 향하게 되었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놀라면서도 기쁜 마음에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잘생긴 소년의 얼굴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예전과 다름없이 화려하고 수려한 모습이었지만 그동안 모래바람을 맞으며 지내서인지 날이 선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부인,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감싸 안았다. 아름다운 그녀를 품 안에 안자 주운환은 온몸이 편안하게 녹아내리는 듯 더없는 감동을 느꼈다. 마치 온 세상이 다 제 것이 된 것만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힘차게 말채찍을 내려쳤다.
“갑시다!”
히히힝-!
말은 앞발을 높이 치켜들더니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앞으로 질주했다. 도성을 가득 채운 따뜻한 분위기와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말이다.
엽연채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댄 채 까르르 웃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