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0화
간식거리를 즐긴 후 엽영교와 엽미채는 집으로 돌아갔고, 제민은 곁채에서 물건들을 정리했다. 조금 있으면 주운환이 돌아오니 제민은 부부가 지내는 곳에서 머물러 있기가 불편했다. 그렇다고 주씨 가문의 다른 처소에서 지내려면 사람을 시켜 짐을 옮겨야 하는데 그것도 영 번거로웠다.
차라리 짐을 정리해서 장명가에 있는 추씨 가문 저택에서 일단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하사받은 저택의 보수가 끝나면 그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제민은 짐이 얼마 되지 않아 금세 다 정리했다. 그렇게 이틀을 더 있다가 추씨 가문 저택으로 옮겨갔는데, 온씨는 아직 능성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이즈음 궁 밖의 개선대는 설치가 완료되었고 주운환의 귀환 날짜가 점점 다가오자 궁 안의 분위기도 점점 달아올랐다.
* * *
황궁 안, 봉의궁.
정 황후는 봉탑(鳳榻)에 앉았고 태자는 하좌의 권의에 앉았으며 송초는 하좌에 서 있었다.
“풍씨 가문 것들은 정말 무능하기 짝이 없구나! 손에 쥐여 준 공도 잡지 못하다니!”
정 황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주운환이 도성으로 돌아오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구나.”
그러자 태자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우선 그자를 어떻게 끌어들일지 생각해야 하옵니다.”
“그게 쉽지가 않구나.”
정 황후는 옅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자가 아직 혼인하기 전이었다면 월안이와 혼약을 맺을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도 가능하옵니다.”
태자는 두 눈을 살짝 반짝였다.
“혼약을 맺게 되면 월안이와 엽연채는 위아래를 따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월안은 공주이니 엽연채가 먼저 시집을 왔다고 해도 월안에게 눌릴 겁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정 황후가 그를 쏘아보자 태자는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사실 그도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었다.
“폐하께서 태자를 마음에 두고 계시기는 하나 주 장군은 폐하께서 직접 발탁했고 아직 제 사람으로 맘껏 써 보지도 않으셨네. 그런데 태자는 이리 급하게 누이동생을 그자의 평처로 시집보내 제 사람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오?
폐하께서 태자를 아낀다고 해도 꺼림칙한 기분이 드실 게요. 어떤 것들은 폐하께서 태자에게 내주실 수 있으나 태자가 직접 나서서 가져가는 건 아니 되네.”
“어떤 일들은 황제 폐하께서 보고도 못 본 척해 주실 수 있사옵니다! 하지만 너무 벗어나는 행동을 하게 되면 용인하지 못하실 겁니다.”
송초도 정 황후의 편에 섰다. 주운환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누이동생을 시집보내면 아주 꼴사나워 보일 것이다.
“그 말이 맞다.”
정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정씨 가문 방계 쪽에서 소저를 하나 골라 그자에게 시집보내야겠군.”
태자는 코웃음을 치더니 손에 든 찻잔을 옆에 있는 찻상에 살짝 내려놓으며 반박했다.
“어느 소저가 엽연채를 능가할 수 있겠사옵니까?”
집에 그렇게 아름다운 아내가 있고 게다가 혼인한 지 일 년여밖에 안 됐으며 몇 달을 떨어져 지냈다. 그러니 주운환이 도성으로 돌아와 엽연채를 보게 되면 꿈쩍도 하지 못할 텐데 어디 다른 여인을 생각할 마음이 있겠는가?
“멀리 있는 백조는 눈앞에 있는 까마귀보다 못한 법이네!”
정 황후는 자신의 계책을 꽤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선 그자와 엽연채를 만나지 못하게 하면 되네. 그자가 도성에 들어올 때, 내가 명을 내려 장명가에 있는 모든 창문 아래에 오색 깃발을 꽂게 할 것이네. 온 도성의 백성들이 길 양쪽에 늘어서서 그자를 환영할 거고 꽃들이 하늘을 뒤덮고 오색 깃발이 휘날릴 텐데 어떻게 엽연채를 볼 수 있겠는가?
폐하께서는 그자를 궁으로 들여 이삼일 동안 머무르게 할 것이니 그때 우리가 정씨 가문 소저를 그자 곁에 붙이면 돼. 그리고 그자가 궁에서 나가면 그 소저를 주씨 가문으로 들이면 되지.”
“어마마마, 좋은 계획 같사옵니다.”
태자도 납득하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리 황후라 할지라도 아무 이유도 없이 주운환에게 첩실을 붙여 줄 수는 없었다. 그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너무 대놓고 드러내면 대단히 꼴사나워 보이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주운환은 지금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제아무리 황후라고 해도 그 점은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주운환이 스스로 먼저 손을 대고 조용히 집안으로 들인다면, 보기에 아주 좋을 것이다.
* * *
며칠이 지나자 날씨는 점점 더 쌀쌀해졌다. 이렇게 팔월은 막을 내리고 구월이 찾아왔다. 구월은 찬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추워지는 계절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이른 아침부터 온 장명가가 사람들로 빽빽이 둘러싸여 훈기가 그득했다. 구경을 나온 귀족들은 진작에 장명가 양쪽에 자리하고 있는 요릿집을 예약해 뒀다. 2층 귀빈실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거리의 모습에 한눈에 들어왔다.
엽연채와 주 백야도 가족들을 데리고 회미천하 2층 귀빈실로 갔다. 밖을 내다보니 백성들이 길 양쪽에 서서 서로 밀치락달치락하고 있었다. 장명가는 길게 쭉 뻗은 대로라 엽연채가 길을 따라 앞을 내다봐도 그 끝이 다 보이지가 않았다.
엽연채는 줄곧 창가에 서서 밖을 보고 있었고, 주 백야는 원탁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마음이 몹시 복잡했다. 그는 전쟁이 무서웠고 집안이 더는 그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시 과거 시험을 보는 건 조상들에게 떳떳치 못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속으로 죄책감 또한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죄책감을 느낀다 한들 아들이 자신의 전철을 밟는 것은 원치 않았다. 참혹했던 전장의 온갖 광경을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했을 때 진정으로 기뻤다. 조상들 앞에 면목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계속 전장에 나가게 되면 결국 맞이하게 되는 건 끝없는 실패뿐이니 말이다.
그런데 가장 뛰어난 아들이 출정하겠다고 뛰어나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상심하고 절망했으며 주운환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아들은 살아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크나큰 영광을 한 몸에 누리며 금의환향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탁자에 앉아 있는 주 백야의 마음속에서 갖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오늘 이곳에 온 사람은 자신과 엽연채, 주비양 부부뿐이었다. 진씨와 주묘서가 오지 않으니 당연히 주묘화는 올 수 없었고, 강심설은 이곳에 주비양을 따라왔다.
주 백야는 고개를 들어 가족들을 살펴보다가 진씨 모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입을 살짝 오므렸다. 사실 자신도 올지 말지 고민했으나 끝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고 와서 보고 싶기도 했다.
“학해 도련님, 연자갱蓮子羹 좀 드셔 보세요.”
만월이 연자갱이 담긴 작은 접시를 강심설 앞에 놓아 줬다.
강심설은 주학해를 안고 연자갱을 조금씩 그에게 먹여 줬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싸늘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흘낏했다. 주비양이 오지 않았다면 자신도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저리 곱게 차려입었대.”
강심설이 냉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만월은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누구겠어? 당연히 셋째 도련님께 보여 주려는 거겠지!’
엽연채는 오늘 공을 들여 치장했다. 진홍색 웃옷에 담홍색 제흉유군을 입은 그녀는 가슴 앞부분에 비단 끈으로 만든 커다란 매듭을 달고 붉은색 비단 끈을 아래로 늘어뜨린 차림이었다. 머리에는 금색 술이 늘어진 복숭아꽃 모양의 유리 보요를 꽂아 본래도 고운 외모가 더욱 빛났다.
“깃발이 왜 이렇게 많지?”
한편, 엽연채는 창밖을 살펴보다 의아해했다. 자신이 서 있는 창틀만 해도 깃발이 두 개나 꽂혀 바람을 맞아 나부꼈다.
“조정에서 분위기를 더 내려고 걸어 놓으라고 한 것 같아요.”
혜연의 대꾸에 엽연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창틀에 기대어 있는 그녀는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보기도 하고 머리를 살짝 옆으로 기울여 보기도 하며 끊임없이 각도를 조절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거리의 전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깃발이 가리고 있으니 주운환이 어찌 자신을 볼 수 있겠는가?
이각을 기다리자 근처에서 갑자기 열렬한 환호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와! 주 장군께서 돌아오셨다!”
환호성이 점점 더 커지자 엽연채와 혜연 등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환호성과 요란한 외침이 뜨거운 열기처럼 그들의 얼굴로 덮쳐 왔다. 감정이 격양된 백성들은 양쪽으로 늘어서서 주운환을 환영했고, 군중의 열기가 고조되자 병사들은 장총을 교차하며 흥분한 백성들을 막아섰다.
아래를 보니 군대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고 전부 군장을 한 상태였다. 멀리서 말을 타고 오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전장에서 묻혀 온 난폭한 기운과 승리를 거두고 도성으로 돌아와 느끼는 고조된 감정이 함께 느껴졌다.
“아가씨, 도련님이 보여요! 도련님이에요! 우와아아!”
흥분한 추길이 소리를 질렀다.
엽연채가 몸을 거의 반쯤 내미니 은갑銀甲을 입은 미끈한 몸매의 한 사내가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며 커다란 말을 타고 천천히 이쪽으로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래는 백성들로 미어터졌고 사방에는 화려한 꽃이 가득하고 오색 깃발이 나부꼈다. 엽연채가 길을 내려다보니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명가의 환호성 속, 주운환의 흐릿한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이렇게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엽연채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늘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 왔는가.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고 도성 사람들이 모두 주목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니 엽연채는 마음이 들떴다. 다만 아무리 용을 써도 그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어머, 저쪽으로 가시네요!”
추길과 혜연도 비집고 들어와 밖을 내다봤고 구경을 하고 싶은 몇몇 여종들도 껴서 창가에 섰다.
“아가씨, 아가씨! 어서 보세요! 지금 안 보시면 지나가 버릴 거예요!”
추길이 그리 말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창문 앞으로 몰려든 여종들만 보일 뿐 엽연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추길은 몸을 돌려 방 안을 훑으며 그녀를 찾았다.
“아가씨? 아가씨는?”
혜연도 이 말에 고개를 돌렸다가 엽연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