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9화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지만, 바깥에 떠도는 소문은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엽연채도 결국엔 당연히 그 소문을 접하게 되면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제민이 말했다.
“풍씨 가문과 태자가 공을 가로채려는 것뿐이야.”
“저들이 저렇게 한다는 건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야.”
엽연채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쩌면 이미 포석을 깔았겠지.”
그렇게 또 열흘 정도가 흘렀다. 백성들이 동요하기 시작할 때쯤, 갑자기 시위들이 궁에서 튀어나와 준마를 타고 요릿집마다 달려가 뭔가를 붙였다. 이에 백성들은 깜짝 놀랐고 그 주위를 에워싸고 보니 황방皇榜이 붙어 있었다.
“저기 뭐라고 적혀 있는 거야?”
백성들은 잇달아 그 주위를 에워쌌고 글자를 모르는 이들도 앞으로 다가섰다.
“글자를 모르면 비키시오. 내가 볼 테니!”
커다란 책장을 등에 진 한 서생이 앞으로 비집고 나오며 말했다.
“주 장군이 응성을 탈환한 후 남쪽 변방 지역으로 가서 남쪽 이민족을 무찔렀다고 적혀 있군요. 서노와 남쪽 이민족은 고개를 숙이고 신하가 되어 복종하겠다고 했고, 매년 대제의 조정에 나와 황제 폐하께 하례하겠다고 합니다.
주 장군의 군대는 이미 도성으로 돌아오고 있다는군요. 구월 초사흗날에 도성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서생의 느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위엔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장군께서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시는구나!”
이 소식은 금세 온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고 도성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 * *
그 시각 태자부.
태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살아서 남쪽 이민족의 영역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풍씨 가문 형제의 매복 공격도 피하다니!”
송초는 고개를 숙인 채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연한 결과였다. 풍씨 가문 형제가 주운환을 갖고 놀 수 있었다면, 과연 그렇게 허겁지겁 옥안관으로 도망가 주운환이 구해 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 * *
황방이 붙자 도성 전체가 시끌시끌했다. 그 이튿날에는 궁에서 나온 장인들이 궁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높은 단壇을 하나 설치했다.
지금 주씨 가문은 온 집안이 떠들썩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평소 방문객이 거의 없어 적막하던 주씨 가문 저택은 찾아오는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일부 귀부인들은 특별히 엽연채를 보러 오려고 했으나 진씨가 막아섰다. 첩자帖子가 전부 일상원으로 보내지니 그녀는 엽연채가 바빠서 시간이 없다며 방문을 전부 거절하고 엽연채와 그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이에 일부 사내들만이 주씨 가문에 방문했고 주 백야와 주비양이 그들을 대접했다.
주씨 가문은 그야말로 화려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주방은 손님들의 왕래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주방 어멈 이씨는 남몰래 검은색 찬합을 꺼내더니 예쁜 간식거리가 든 접시 몇 개를 찬합 안으로 넣었고, 틈을 봐서 몰래 찬합을 들고 문을 나섰다.
그런데 뜻밖에도 입구에서 또 다른 주방 어멈 황씨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손에 찬합을 들고 있었다.
“아이고. 언니, 어디 가는 길이었어요? 위쪽에 진지를 올리라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요.”
이 어멈은 그녀를 쓱 훑어봤다.
“내가 어딜 가겠니. 그러는 넌, 넌 어디 가는데?”
황 어멈은 그리 말하며 이 어멈이 들고 있는 찬합을 힐끗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딱 마주치자 밀치락달치락하며 먼저 문밖으로 뛰어나가려고 용을 썼고, ‘쿵쿵’ 소리를 내며 서로 뒤지지 않으려고 서과원을 향해 냅다 달려갔다.
궁명헌 안으로 들어가자 방에서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주방 어멈은 얼른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이고, 마님. 정말 즐거운 분위기가 가득하네요.”
이 어멈이 찬합을 들고 먼저 문턱을 넘어섰다.
“사돈댁에서 부인과 소저들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황 어멈도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들이 소청에 도착하자 추길과 혜연이 그들을 막아섰다. 혜연과 추길뿐만 아니라 다른 여종들 몇 명도 이곳에 서 있었다.
“이 어멈과 황 어멈이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추길은 코웃음을 쳤다.
황씨와 이씨가 동쪽을 쳐다보니 주렴 너머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복을 입고 장신구를 걸친 여인들이 보였다.
한 사람은 진홍색 운금雲錦 한 필을 펼치고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은 수를 놓은 눈부신 빛깔의 긴 배자를 들고 있었다. 또 한 명은 몇 가지 장신구를 들고 있었다. 그들 모두 중간에 있는 사람에게 옷과 장신구 등을 대 보는 중이었다.
안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엽연채는 그들에게 둘러싸여 옷자락만 보였다.
“마님께 옷을 지어 드리려는 거니?”
황 어멈이 미소를 지으며 추길에게 물었다.
“그런데요.”
추길은 목소리를 길게 냈다.
“며칠 뒤면 도련님이 돌아오시니 당연히 곱게 치장하셔야겠지.”
이 어멈이 말했다.
“이건 내가 직접 만든 간식거리야. 마님께 갖다 드려. 사양 말고 손님 대접하는 데 쓰시도록 하렴.”
“내 것도! 내 것도 갖다 드리렴!”
황 어멈은 황급히 찬합을 작은 원탁 위에 올려놓은 후 열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안에는 간식거리가 담긴 접시 두 개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당증소락糖蒸酥酪이었고 다른 하나는 계화율분고桂花栗粉糕였다. 이어 두 번째 칸을 열어 보니 여의고如意糕와 매괴소玫瑰酥가 들어 있었다.
“하, 이렇게 말라서 딱딱해진 것들을 가져왔어요? 이거 봐요. 난 진주비취탕원珍珠翡翠汤圓과 연엽갱蓮葉羹, 매화첨탕梅花甛汤과 향나음香糯飮을 가져왔거든요!”
이 어멈도 이에 질세라 얼른 자신이 가져온 모란꽃이 그려진 검은색 찬합을 열었다.
“두 분 다 고마워요. 우선 여기에 두세요. 이따가 마님과 손님들이 하시던 일을 마치면 나와서 드실 거예요.”
혜연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오더니 동화 한 움큼씩을 두 사람의 손에 쥐여 주었다.
“혜연아, 뭘 이런 걸 주니. 됐어. 이건 마님께 보이는 내 마음이야.”
두 주방 어멈은 얼른 돈을 거절했고 침실 쪽을 쳐다봤지만 엽연채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더 꾸물거리다가 마지못해 그곳을 떠났다.
추길은 그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다시 탁자 위의 간식거리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딱 봐도 저 사람들이 직접 만든 거네. 들어간 재료만 해도 이삼백 문은 들었겠다.”
추길은 그리 말하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전에는 백채소육사나 줬었지. 집안 공금을 쓰면서도 잘게 다진 고기 조각도 많이 안 넣어 주려고 했잖아. 그런데 이젠 자기 사비를 써서 음식을 보내네.”
“권세 있는 자에게는 아첨하고 권세 없는 자는 업신여기며, 이익이 되는 것은 좇고 해가 되는 건 피하는 게 세상 이치지 뭐. 일일이 신경 쓰지 마.”
혜연은 그렇게 대꾸하며 침실로 걸어갔다.
“아가씨, 간식 좀 드세요.”
몇 사람이 엽연채를 둘러싸고 그녀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바로 엽영교와 제민, 엽미채였다.
“그래. 금방 가마.”
엽연채는 고개를 돌리더니 엽영교를 째려보며 말했다.
“가을에 지은 옷 몇 벌도 아직 새것인데 굳이 또 새 옷을 지을 필요가 뭐가 있어요.”
“어떻게 새 옷을 안 짓니?”
엽영교는 엽연채의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가며 이리 설득했다.
“그 옷들은 너무 수수해. 오랜만에 보는 건데 당연히 곱게 치장해야지.”
엽연채는 입을 배죽거리더니 제민과 엽미채를 데리고 소청으로 향했다.
“큰형부는 도성으로 들어오면 곧장 성문에서 황궁으로 가는 거예요?”
간식거리를 맛보던 엽미채가 물었다.
“응, 맞아. 성문에서 보면 큰길이 있는데, 그 길이 바로 황궁 대문과 통하는 장명가야.”
“여기 오다가 백성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황궁 근처에 무슨 단을 설치해 놓은 것 같아요.”
엽연채가 대꾸하자 엽미채가 ‘단’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개선대凱旋臺야.”
제민이 두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전에 노점상을 할 때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다 들었거든. 개선하는 장군은 보통 성문에서 곧장 황궁 안으로 들어간대. 길 양쪽에 늘어선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으며 떠들썩하기 이를 데 없다더라.
장군은 장명가를 지나 황궁으로 들어간 다음 황제 폐하를 알현하게 돼. 그런데 개선대는 말이지, 황제 폐하께서 중신들을 거느리고 높은 개선대 위에 서서 도성으로 돌아오는 장군을 맞이하는 거야. 황제 폐하께서 한 장군에게 베풀어 주는 가장 큰 영광이지!”
“와!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엽미채는 몹시 놀라며 연초 일을 거론했다.
“올해 초에 강왕 전하와 허 장군께서 개선하셨던 장면이 기억나요.”
“맞아!”
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강왕 전하와 허 장군은 성문에서 곧장 궁으로 들어갔지. 황제 폐하께서 궁 밖으로 나와 맞이하시지는 않았어. 그러니 네 형부는 지금 정말 큰 영광을 누리게 되는 거야!”
입에 숟가락을 물고 그 이야기를 듣던 엽연채는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연채야. 요릿집은 예약했어?”
“네.”
엽영교의 물음에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명가 옆에 있는 회미천하요.”
“저희가 예약한 게 아니에요.”
추길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보탰다.
“회미천하 주인이 직접 방문해서 가장 좋은 자리를 저희 주씨 가문에 주겠다고 했어요. 저희 주씨 가문 사람들이 와서 체면 좀 살려 달라면서요. 장명가 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몇몇 다른 요릿집 사람들도 저희에게 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저희는 당연히 가장 좋은 곳을 골랐죠.”
“황제 폐하께서 연채 네 부군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시니까 그날 네 부군을 잘 봐 둬야 해. 안 그러면 며칠이 지나서야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제민의 말에 엽영교가 의아해했다. 엽영교는 제민과 오늘 처음 정식으로 만나 서로 알게 된 사이지만, 제민이 시원시원한 성격에 총명하고 이야기도 잘 통한다고 느꼈다.
“내가 전에 들은 이야기가 많거든. 전조前朝도 그렇고 대제에서도 황제께서 장군을 아주 아끼시면 말이지, 직접 장군을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가신 후 궁 안에서 며칠 동안 머무르게 하며 이야기를 오래오래 나누신다고 하더라. 지금 황제 폐하께서 개선대마저 설치하셨으니 아마 네 부군과도 그런 시간을 가지시려 하지 않겠어?”
제민은 그리 말하며 미간을 씰룩였다. 뜻밖의 이야기에 엽연채는 말문이 막혔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물었다.
“아까부터 숟가락만 물고 뭐 하는 거니? 향나음 다 식겠다. 어서 먹어!”
엽영교가 그녀를 흘기며 한마디 하고 나서야 엽연채는 고개를 숙인 채 향나음을 떠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