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7화
엽연채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창턱에 엎드려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추길과 혜연은 정원에서 비질을 하고 있었는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엽연채를 보니 몹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추길이 눈시울을 붉히며 한탄했다.
“분명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왜 한번 가면 되돌아오지 못하는 곳에 가 버리신 거야? 넋이 나간 아가씨 좀 봐.”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니?”
혜연은 그녀를 쏘아보더니 옅은 한숨을 쉬었다.
“잔말 말고 우린 우리 할 일이나 잘하자!”
이후로 두 사람은 말없이 비질만 했다.
제민은 파초나무 아래에 앉아 신발 밑창을 만들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하지만 엽연채를 위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하든 간에 엽연채가 그를 걱정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이런저런 말들로 위로를 해 봤자 오히려 엽연채를 귀찮게 만들 뿐이었다. 일부러 강한 척하는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 줘야 하는데 이 또한 그녀를 무척 난처하게 할 터였다.
한편, 주종과 모자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웃다가 미칠 지경으로 말이다.
* * *
일상원은 주묘서의 정혼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진씨는 이미 녹지를 보내 매파 오씨를 불러오게 했고,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탑상에 앉아 있었다.
“들어 보니 남쪽으로 간 장수들은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운을 뗀 강심설의 눈빛엔 조롱기가 스쳤다.
“이젠 그 서씨 가문에서도 혼사를 원치 않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진씨의 낯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주운환 그 빌어먹을 종자는 죽음을 자초하는 일을 좋다고 나서서 하는 인간이라 끝내 집안까지 말려들게 하리라는 걸 말이다.
“마님, 매파 오씨가 왔습니다.”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머리에 커다란 붉은 꽃을 꽂고 진녹색 비갑을 입은 매파 오씨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렸다.
“아이고, 부인, 평안하셨습니까?”
“앉게.”
진씨가 자리를 권하니 오씨는 미소를 지으며 착석하더니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부인, 지난번에 말씀드린 혼사는 잘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렇네.”
진씨가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오씨의 말투를 들어 보니 그 서씨 가문이 꺼려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입을 열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거절의 말을 꺼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매파 오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 장군께서 서노군을 쫓아내셨다고 하죠. 정말로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저희 같은 사람들은 귀족분들 사이를 오가며 중매를 서다 보니 들은 소문이 좀 있습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뒷말을 더했다.
“지금 주 장군께서 남쪽 이민족의… 영역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쯧쯧……. 그곳은 코끼리 몇 마리가 들어가도 다시 나올 땐 뼈만 남는 곳인데 말이죠.”
오씨는 진씨가 적모이고 주운환은 서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운환이 그곳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진씨는 그 말을 듣더니 역시나 표정이 변했다.
“게다가 듣자 하니 풍씨 가문에는 아직 젊은 장수 둘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매파 오씨는 쯧쯧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분들이 나중에 돌아오면 이 공로가 누구 것이 되겠습니까? 어쩌면 주씨 가문을 짓밟으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진씨는 기가 막혀 혀를 찼다. 일부러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결과가 생길까 봐 두려운 게 아니었다면 자신이 서씨 가문을 원했을 리가 있겠는가?
“혼사는…….”
진씨가 뒷말을 뱉기도 전에 오씨가 끼어들었다.
“주씨 가문 소저께서는 참으로 복도 많으십니다. 서씨 가문은 조금도 대소저를 꺼려하지 않고 일편단심 진심으로 소저를 며느리로 들이려고 합니다.”
“아…….”
진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서씨 가문 나리께서는 종4품 관리이시지만 서 공자는 아주 훌륭한 사내입니다. 주씨 가문 대소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주씨 가문이 앞으로 어찌 되든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매파 오씨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씨가 이렇게나 고운 사내를 어디 가서 찾겠습니까? 소저들이 시집갈 때 가세만 따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인품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 말을 듣자 진씨도 조금 감동스러웠다.
“자네 말이 맞네.”
“그럼 부인, 승낙하신 겁니까?”
“그래. 날짜를 잡아 양가가 상견례를 하도록 하세.”
진씨는 얼른 대답했다. 그녀의 눈엔 지금 서씨 가문이 아주 괜찮아 보였다.
논의를 마친 후 매파 오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상원을 나온 그녀는 퉷 하고 침을 뱉으며 궁시렁거렸다.
“주 부인은 진짜 속물이야. 서씨 가문만 눈이 삔 거지. 이래서 언니가 이 댁 혼사는 맡지 않은 거군.”
그녀가 말한 언니는 매파 고씨였다.
진씨는 줄곧 매파 고씨가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첨하고 권세 없는 사람들은 멸시한다며 그녀를 욕해 왔다. 하지만 실상은 그런 게 아니었다. 고씨는 주묘서의 형편없는 인성 때문에 그녀를 어느 가문 자제에게 소개해 줘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좋은 사내를 소개해 주면 그자를 곤경에 빠뜨리게 되며 자신의 평판에도 흠집이 나게 될 것 아닌가.
매파 오씨의 곁을 따르던 어린 여종이 말했다.
“그럼 왜 이분들의 혼사를 맡으신 거예요?”
“돈 되는 일을 꺼려서야 쓰겠느냐?”
오씨는 대수롭지 않단 듯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서씨 가문이 마음에 들어 한 거고 난 그저 대신 다리를 놓아 준 것뿐이다. 서씨 가문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니 주 대소저가 시집가게 된다면 그 소저의 복인 게다.”
오씨는 서씨 가문으로 가서 말을 전했다.
* * *
이튿날, 서씨 가문 부인은 서 공자를 데리고 함께 주씨 가문에 방문했다.
지금은 가세를 따지며 집안을 고를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진씨가 보니 서 공자는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잘생기고 우아한 사내였고 꽤 괜찮아 보여 혼사를 승낙했다.
그리하여 양가는 사주단자를 교환했고 주묘서의 혼사는 이렇게 정해졌다.
소식을 들은 추길은 궁명헌으로 돌아와 혜연과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큰아가씨의 혼사가 정해졌어. 국자제주의 집안과 정혼했대. 전에는 눈이 머리에 달려 명문가 세자들조차 마음에 안 들어 했잖아. 군왕郡王에게 시집가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지금…….”
“셋째 도련님이 분명 그곳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 급하게 혼처를 정한 거지. 만약 정말로 그리된다면… 서씨 가문에도 시집갈 수 없을 테니 말이야.”
혜연은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됐으니 이 일은 아가씨에게는 전달하지 마. 그랬다간 아가씨 기분이 울적할 테니까.”
“알겠어.”
추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남쪽 이민족은 정말 괴이했다. 병력이 강한 건 아닌데 그들이 쓰는 기이한 전술은 공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군대를 통솔하는 재능과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서 대적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듣자하니 대제도 여러 번 남쪽으로 출병했는데, 여러 장수들이 목숨을 잃었고 심지어 시체도 온전히 수습하지 못했다.
남쪽에서는 일부러 그리하는 듯했다. 그들의 영역으로 들어간 장수들의 시체는 매번 들짐승에게 끌려 나왔고, 곤충들에게 뜯겨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조정 신하들은 주운환 일에 대한 대응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장 열띤 토론을 벌인 곳은 다름 아닌 태자부였다.
태자는 서재의 녹나무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송초, 전지신, 요양성은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지금 주운환이 남쪽 이민족의 영역으로 들어갔으니 아마 시체도 온전치 못할 겁니다.”
요양성이 말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 장군은 정말로 놀라운 사람입니다.”
송초가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나이가 어린데도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스스로 나서서 출정을 청한 것도 결코 경솔한 행동이 아니었을 겁니다. 아마 미리 어느 정도 방법을 강구했겠지요.
주 장군은 서자이니 그동안 조용히 숨어서 기회를 노렸던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내 조용히 있다가 장원이 되고 출정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어리석은 선택도 하지 않을 겁니다. 자신이 없었다면 그들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았겠죠.”
전지신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래서 그자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 게다, 지금 이 말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전지신과 요양성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난번 주운환이 출정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극렬하게 말렸던 사람이 바로 자신들 두 사람이었다. 게다가 군사를 5만만 내어 줘야 한다는 말까지 했고, 그때 주운환은 전지신의 멱살을 잡고 내팽개치기까지 했다.
이번에 그가 돌아오면 말도 못 하게 잘나가게 될 거고 높은 사람이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어떤 복수를 하려고 들까? 이건 전지신과 요양성 둘 모두 원치 않는 미래였다.
“전하, 그자는 까다롭고 이상한 자라 굴복시키기 어려울 듯하옵니다.”
요양성이 말했다. 그 말인즉 주운환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건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송초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저희 대제는 지금 장수가 부족합니다. 그자가 있어야 대제는 안정을 유지할 수 있사옵니다.”
“송 공자는 참으로 그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먼.”
전지신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서노에서 가장 용맹한 금도 대장군이 참살되었네. 사율이와 장수 몇 명도 모두 전사했고. 서노는 이미 팔다리가 잘린 호랑이라 이 말일세. 지금 이런 상황에선 주운환이 없다고 해도 정 노장군과 강왕 전하가 계시니 서노는 전쟁이 썩 내키지 않을 것이네. 아무도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려고 하지 않겠지.
그러니 대제와 서노는 강화할 수밖에 없을 거고, 양국은 함께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회복하려고 할 것이네. 고로 지금 주운환이 죽는다 해도 대제의 흥망에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네.”
“맞습니다.”
요양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 주운환은 굴복시키기 어려운 자입니다. 현재 풍씨 가문의 젊은 두 장수가 아직 살아 있으니 차라리 그 두 장수가 공을 차지하게 하고 그들이 서노군을 쫓아냈다고 하면 됩니다. 어쨌든 풍씨 가문 사람들은 지금껏 전하의 사람이었으니까요.”
요양성은 그리 말하고 나니 갑자기 속에서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태자비의 아버지이자 태자의 장인이었다. 그런데 태자에게는 풍 측비도 있었다. 요 몇 년간 풍씨 가문의 세력이 커지자 자신은 늘 태자가 풍 측비에게서 아들을 본 다음 태자비를 자리에서 쫓아낼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동안 풍씨 가문과 적잖이 힘겨루기를 했고 풍씨 가문 사람들이 싹 다 죽어 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지금은 주운환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 풍씨 가문은 공을 가로챈다 해도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풍씨 가문 두 젊은 장수는 성을 지킬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