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5화
“생각 좀 해 보겠네.”
진씨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이 말을 건넨 후 매파를 돌려보냈다.
매파 오씨가 나가자 진씨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주묘서는 뒤에 있는 침실에서 걸어 나와 진씨 곁에 앉더니 창백한 얼굴로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님, 서씨 가문은 어떠세요?”
강심설이 이리 의중을 물어 오자 진씨는 표정이 확 굳어졌다.
“종4품 소관小官에 불과하다. 서 공자도 그저 수재에 불과하고.”
강심설의 눈빛엔 조롱기가 스쳤지만 차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을 받았다.
“하지만 큰아가씨는 이미 열여섯이에요. 더는 미루시면 안 됩니다. 혼처를 찾기가 더욱 힘들어질 뿐이에요. 보세요. 일 년을 꼬박 찾아봤지만 적당한 혼처는 찾지 못했잖아요. 게다가 최근에는… 혼담을 꺼낸 가문이 이 가문뿐이에요.”
진씨의 낯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강심설이 말한 대로가 아니었다면 방금 전 매파 오씨를 당장에 쫓아냈을 것이었다.
백 이낭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마님, 지금 셋째 도련님이 사율이를 베어 기세가 좋은 편입니다. 차라리 좀 더 기다려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대소저가 나이를 한 살 더 먹어도 가세만 괜찮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진씨는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강심설은 냉소를 지으며 백 이낭에게 면박을 주었다.
“셋째 도련님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네. 그 사율이라는 장군도 적을 얕보고 무려 3만 명이나 적은 군대를 이끌고 왔고. 즉 사율이는 셋째 도련님이 다수의 병력으로 소수의 병력을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준 게지. 앞으로 만날 서노의 대장군이라는 사람은… 들어 보니 맹장이라고 하더군!”
진씨도 강심설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주운환을 낮잡아 봤다. 얼마 후면 주운환은 옥안관에서 죽을 텐데, 그렇게 되면 주묘서는 눈을 더 낮춰서 시집을 가는 길밖에 남지 않을 것이었다.
진씨는 거듭되는 집안의 성쇠盛衰에 진저리가 났다. 최근 엽연채 덕분에 집안의 평판이 좀 더 좋아지기는 했지만, 진씨는 여전히 주운환이 조만간 목숨을 잃을 거라고 생각했다.
진씨가 백 이낭을 쏘아보자 그녀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입을 다물었다.
“서 공자를 본 적이 있느냐?”
진씨가 주묘서를 쳐다보며 물었다. 주묘서는 입술을 꽉 물고 싫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보긴 봤어요. 외모는 진지항보다는 더 나은데 양왕 전하나 태자 전하와 비교하면… 한참 못 미쳐요!”
백 이낭은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어째서 매번 양왕과 태자와 비교를 한단 말인가?
진씨는 외모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진지항보다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그럼 정말로 준수하게 생긴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생각해 보자꾸나.”
강심설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주묘서 같은 여인이 무슨 대단한 가문에 시집가려고 한단 말인가?’
“마님,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조급해하실 것 없습니다.”
반면 백 이낭은 또다시 진씨에게 조언을 해 줬다. 백 이낭은 주운환이 이미 자신의 능력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그는 범인凡人이 아니며 오히려 남들보다 뛰어난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진씨는 도통 편견을 버리지 못했다.
잠시 후, 일상원을 나온 백 이낭은 곧장 궁명헌으로 향했다.
백 이낭은 엽연채에게 안부를 물으며 주운환의 소식을 들은 게 있는지 물어봤다. 엽연채는 없다고 말했고 백 이낭은 관심 어린 말을 몇 마디 건네며 잠시 앉아 있다가 그곳을 떠났다.
* * *
이튿날 아침이 밝자마자 엽연채는 제민과 함께 궁으로 향했다.
황후의 봉의궁에 도착해 보니 황후와 태자비가 모두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좌 왼쪽에는 월안 공주와 이영 공주가 앉아 있었고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부인 둘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오른쪽엔 호나타의 바둑 선후배와 북림과 동안에서 온 소저들이 앉아 있었다.
북림, 동안 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공주가 한 명씩 왔는데 둘 다 어린 소녀였다. 반면 호나타는 이미 시집을 간 사람이라 정 황후가 엽연채같이 이미 혼인한 부인을 불러 동석하게 한 것이었다.
호나타는 엽연채와 제민을 보자 아니꼬운 기분이 들었지만 얼른 감정을 억누르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붙였다.
“해주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네. 부인의 실력에 정말 탄복했다오. 나에게도 한 수 가르쳐 주겠는가?”
“그러겠습니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 황후는 사람을 시켜 아래에 있는 찻상 위에 바둑판을 깔았다.
엽연채와 호나타는 각자 다른 생각을 품은 채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호나타가 엽연채를 보며 말했다.
“부인은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으니 금은 장신구로 치장을 해야 하지 않겠소. 우리 북연에는 대제에 없는 장신구들이 아주 많다오. 지난번에 우리 북연이 바둑 대결에서 진 대가로 군량을 대기로 했는데 차라리 절반은 금은보석으로 바꾸는 건 어떻겠소? 주 장군은 분명 부인이 아름답게 치장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할 터인데.”
그 말에 엽연채는 표정이 굳어서는 상석에 있는 사람들을 힐끗했다. 과연 정 황후는 태자비와 한담을 나누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비쭉거리며 속으로 그녀의 뻔뻔함을 욕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그 늙은 황제가 벌인 짓이겠지!’
북연이 풍요로워지기는 했지만 갑자기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식량을 내주기는 영 부담스러울 것이다. 게다가 식량 창고가 거의 비어 버린 상황에서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면 위기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니, 북연은 금은보석을 내줄지언정 식량 창고를 여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북연 사절단은 분명 절반은 식량으로 나머지 절반은 금은으로 주겠다고 정선제와 협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선제는 그리되길 절대로 원치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인지라 대제가 궁핍하고 곤란한 상황으로 보이는 것을 몹시 꺼렸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짐은 상관없다만 주 부인이 주 장군에게 쌀을 보내려고 했던 것이니 정말 바꾸고 싶으면 주 부인과 상의하여 바꾸도록 하라.”
지금 호나타가 면전에서 이에 대해 물어보자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제가 원하는 장신구는 부군께서 사 주실 겁니다. 굳이 바둑 대결을 통해 얻어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호나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더 이상 바둑을 둘 마음이 들지 않아 건성으로 바둑돌 몇 개를 놓더니 미소를 지으며 적당히 마무리했다.
“주 부인은 정말 뛰어난 바둑 실력을 가졌구려. 정말 감탄스럽군.”
정선제가 문제를 엽연채에게 떠넘기자 북연은 내기의 내용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호나타는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엽연채에게 직접 물어본 것이고, 확실한 대답을 얻게 되자 이제서야 포기하게 되었다.
점심 식사를 한 뒤 호나타 등 외국 공주들은 역관으로 돌아갔다.
이미 어떤 대답이 나올지 짐작하고 있었던 호막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준 식량을 먹다가 목이 메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안 하나 보지! 이리 다급하게 식량을 원하는 걸 보니 대제의 곳간은 이미 텅 비어 버린 걸지도 모른다. 차라리 대제가 휘청거리는 틈을 타 우리가 공격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염소수염을 기른 사신이 반대하고 나섰다.
“대제가 아직 그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힘을 비축해 두려는 것뿐입니다. 또 정말 군대를 일으키려고 해도 시간이 필요하옵니다.”
그러자 호막은 싸늘한 눈빛을 보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듣자하니 응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변방을 지키던 풍씨 가문 조부와 손자들도 잇달아 참살되었다고 한다. 서북의 강왕과 허 장군은 움직일 수가 없고 영국후부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주씨 가문 사람을 쓴 건데, 그자는 문신이고 햇병아리에 불과하다. 민심을 달래는 용도인 게지.”
“그자는 얼마 전에 사율이를 벴습니다. 얕잡아 보시면 아니 되옵니다.”
“사율이는 벴지만 서노의 금도 대장군을 이기진 못할 것이오!”
염소수염 대신이 입장을 고수하자 호막은 반박하며 아래턱을 매만지더니 냉소를 흘렸다.
“저들이 서남의 열두 개 주를 잃고 나면 우리가 거주醵州를 공격하면 되오! 정씨 가문 식충이들은 한방에 나가떨어질 것이오.”
염소수염은 땀을 닦으며 또다시 반대했다.
“저희 장군들은 강왕도 막아 내지 못할 겁니다!”
“하, 저들이 서남의 열두 개 주를 잃게 되면 강왕은 서노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제 코가 석 자일 텐데 어디 우리를 상대할 틈이 있겠소.”
“하지만 그리되어 대제가 정말로 점령되면 서노와 남쪽 오랑캐가 대제를 마음대로 주무를 텐데, 그럼 저희 북연은…….”
“우리도 대제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해야 하오!”
호막이 사나운 눈빛을 번뜩였다.
“때가 되면 삼면에서 협공을 해 올 텐데, 우린 당연히 서노와 남쪽 오랑캐를 막아 내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때 우린 이미 대제의 성을 몇 개 차지했을 터. 서노의 군대가 오면 우린 대제의 주州 몇 개를 내어 주고 항복하면 되오. 그렇지 않으면 서노가 우리 대연마저 공격할 테니 말이오.”
그제야 염소수염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했다.
“전하는 정말 현명하십니다!”
북연 사람들은 한동안 상의를 했고 이튿날 아침이 밝자마자 북림, 동안과 함께 조회에 나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정선제는 호부시랑 진무를 시켜 북연에 사신으로 가서 양식을 철저하게 점검하게 했다.
“황제 폐하, 걱정 마십시오. 군량은 최대한 빨리 보내겠습니다. 주 장군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호막은 냉소를 짓더니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그 말에 정선제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제에 하례하러 왔던 세 나라의 사람들이 떠나기가 무섭게 시위 한 명이 다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전보입니다!”
정선제는 저도 모르게 희끗희끗한 눈썹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고하거라!”
“옥안관에서 급보가 왔사옵니다. 서노의 금도 대장군이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옥안관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이제 군량은 3일 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시위의 보고에 정선제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전지신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폐하, 지금 군량을 준비한다고 해도 아마 소용없을 것이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정주定州와 사주沙州에서 군량을 조달하라고 하거라.”
정선제의 명이 떨어지자 조정 신하들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정주와 사주에는 분명 군량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다. 말이 좋아 ‘조달’이지, 백성들에게서 빼앗고 착취하는 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