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24화 (424/858)

제424화

“바둑 대결이 있는 이상 우리가 도전을 받아 줘야지. 군량 문제도 해결하면서 너도 원수를 갚고 원한을 풀 수 있으니까.”

엽연채의 이 말에 제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을 거야.”

“서로 도와서 일을 성사시킨 거지 뭐.”

엽연채도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방으로 향했다.

“가자. 가서 옷 갈아입자.”

* * *

이튿날, 대제와 북연이 벌인 세 판의 바둑 대결은 온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다.

대제 사람들은 모두 엽연채의 대단한 바둑 실력과 대제를 도와 군량 문제를 해결한 일을 칭송했다. 보기 드물게 훌륭한 여인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유곡요와 제민이 작년에 적성대에서 벌였던 바둑 대결도 다시 끄집어내 이야기했다.

“그 제민이라는 사람은 유곡요에게 지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그 북연 공주를 이긴 거지?”

“맞아. 작년에 정도 여승을 이기긴 했지만 그분이 아픈 틈을 타 이긴 거라고 했어. 결국 제민이 정도 여승의 제자인 유곡요에게 지면서 그분은 평판을 회복할 수 있었지.”

하지만 제민이 북연 공주를 이긴 건 사실이었다. 반면 유곡요는 해주와 북연 공주에게 졌을 뿐만 아니라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예인에게도 졌다.

이어 제민이 궁에서 어떤 늙은 여승처럼 결과에 승복하지 못해 꾀병을 부린 것 아니냐고 했던 말도 밖으로 전해졌다.

당혹스러워하던 사람들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됐다.

“사실 제민이 정도 여승을 이겼던 건데, 그 여승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병이 도진 거라고 핑계를 댄 거군.”

“내가 주워들은 소식이 하나 더 있는데, 제민은 실력이 없어 유곡요를 이기지 못한 게 아니라 감히 이길 수가 없었던 거래! 유곡요가 재상의 손녀이니까!”

사람들은 사건의 전말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제민이 정도 여승을 이긴 건 사실인데 그 여승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꾀병을 부린 후 자신의 제자인 유 재상의 손녀가 도전에 응하도록 했던 것이다. 일개 농가 소녀인 제민이 어찌 감히 재상의 손녀에게 밉보일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일부러 져 줬던 것이다.

유곡요는 이 소식을 듣고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궁에서 돌아온 후 유곡요는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제민은 자신의 적수가 못 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이기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유곡요가 아닌 손씨와 엽승신 그리고 엽이채였다.

“그러니까 그 농가 소녀가 원래 이겼어야 했던 거잖아! 우리가 알아봤던 소식도 사실이었던 거고. 그런데 그 소녀는 결국 졌어…….”

그리 말하는 손씨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우리의 은화 일만 냥이!!”

엽승신은 포효했다. 하지만 이제 와 우짖는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제민은 이제 2품 현주가 되었으니 아무리 복수하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었다.

* * *

제민이 현주에 봉해졌다는 사실은 금세 주씨 가문 사람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비 이낭은 그 소식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이내 쿵쿵 소리를 내며 일상원으로 달려갔다.

“마님, 마님. 지난번에 제게 제민이라는 아이가 괜찮아 보인다면서 그 애에게 둘째 도련님의 혼담을 꺼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상석의 진씨는 ‘풉’ 소리를 내며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입 밖으로 뿜어낼 뻔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지난번에 원치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누가 그랬습니까? 저희가 얼마나 원했는데요.”

비 이낭이 흥분한 목소리로 잡아떼자 진씨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이 혼사에 아주 동의하는 바다. 자네가 그 소저를 설득할 수 있다면 내가 당장 가서 혼담을 꺼내도록 하지.”

진씨가 자신을 도와줄 마음이 없다는 걸 안 비 이낭은 이를 악물더니 곧장 궁명헌으로 향했다. 문안으로 들어서자 엽연채와 제민이 바둑을 두는 모습이 보였다.

“셋째 마님… 호호호.”

안으로 들어오던 비 이낭은 제민을 보더니 두 눈을 반짝였다.

전에는 제민에게서 촌티가 흐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청초하고 탈속한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더욱더 제민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주종과는 명문가 적녀를 미치도록 원했지만 그를 원하는 상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제민은 명문가 적녀는 아니지만 만수절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 줬고 게다가 현주로 봉해졌으니 이런 봉호와 평판이면 아내로 들여도 체면이 설 것이었다.

고관대작의 적녀와는 다르나 그들과 똑같은 품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엽연채는 고개를 들어 비 이낭을 쓱 보았다.

“이낭은 또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아유, 둘째 도련님 때문이지요!”

비 이낭은 제민에게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종과, 그러니까 둘째 도련님이 마음에 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참 나!”

제민은 그녀의 손을 확 뿌리치며 어이없어 했다.

“누가 그 뻔뻔한 놈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건가?”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난번에 둘째 도련님에게 시집오고 싶다고 했잖아요!”

비 이낭은 화가 나 목청을 높였다.

“그땐 예를 들었던 것뿐이네!”

제민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정말 그리 말했다고 해도 그쪽에서 거절하지 않았는가?”

“저희는… 생각 좀 해 보면 안 됩니까…….”

“아. 생각했다는 게 여기저기 욕지거리를 하고 다닌 거군. 내가 자네의 소중한 아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고 떠들고 다닌 게 그 생각했던 건가 보지? 그것참 고맙네!”

제민은 찬웃음을 흘렸고, 엽연채는 냉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한 소리 했다.

“이낭은 체면을 좀 챙기게!”

비 이낭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무안한 얼굴로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문 입구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서성이고 있는 주종과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비 이낭의 낯빛을 보더니 일이 성사되지 않았음을 알고는 할 수 없이 그녀와 함께 그곳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씨 가문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하인들도 전부 수군거렸다.

어떤 하인이 말했다.

“얼마 전에 설옥인이 서자의 서녀여서 싫다며 혼사를 물리더니 결국 설옥인의 진짜 신분이 밝혀졌잖아. 놀랍게도 후부의 적장녀였지! 그러자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라고. ‘옥인 소저…….’ 깔깔깔!”

또 다른 하인이 맞장구를 쳤다.

“며칠 전에는 제민 소저가 둘째 도련님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하자 욕지거리를 하며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다고 했지. 첩실로도 턱도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이제 그 소저가 현주에 봉해지자 또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민아…….’ 하고 불렀대. 하하하하!”

주씨 가문 사람들은 주종을 불문하고 전부 웃다가 기절할 지경이었다.

엽연채와 제민 역시 밖에서 떠도는 소리를 듣더니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댔다.

추길이 말했다.

“아가씨. 연초에 마님과 다른 가족분들과 함께 불공을 드리러 사찰에 갔던 거 기억하세요? 그때 한 노승이 둘째 도련님의 운명을 점쳤잖아요.”

“맞다, 그랬지!”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길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 그 노승이 둘째 도련님에게 열심히 살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라고 하셨어요.”

엽연채는 이 말을 듣고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드디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그 말인즉 주종과는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위해 산다는 뜻이었다. 그는 자신을 불태워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존재인 것 같았다. 실로 위대하지 않은가!

“아가씨.”

이때, 혜연이 용 문양이 그려진 황금색 첩자帖子를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엽연채는 그 첩자를 보고는 어리둥절했다.

‘나한테 궁첩宫帖이 올 이유가 뭐가 있지?’

엽연채가 첩자를 건네받아 펼쳐 보자 제민이 곁에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황후 마마께서 나랑 네게 입궁하여 그 북연 공주 일행과 배석하라셔.”

엽연채는 비웃음을 흘렸다.

* * *

한편, 온 집안의 웃음거리가 된 주종과는 밖으로 나갈 면이 서지 않아 처소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쉴 새 없이 주운환을 저주했다.

이 치욕은 원남옥과 제민이 그에게 준 것인데 어째서 주운환을 저주한다는 말인가? 주종과는 이 모든 것이 주운환이 과거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고, 주운환의 그의 운을 빼앗아 갔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진씨는 주종과의 혼사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차라리 그가 한평생 장가를 들지 않기를 바랐다. 장가를 들어 재수 없는 며느리를 들이고 빌어먹을 종자를 낳게 되면 집안의 양식만 낭비하게 될 테니 말이다.

물론 그쪽을 신경 쓸 여력도 없긴 했다. 진씨는 지금 주묘서의 혼사 때문에 가슴이 빠짝빠짝 타들어 갔다.

일상원엔 진씨와 백 이낭, 강심설이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하좌의 권의에는 사십 대로 보이는 단정한 옷차림의 한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머리에 커다란 붉은 꽃 한 송이를 꽂고 있었는데, 바로 오씨 성을 가진 매파였다.

매파 오씨는 매파 고씨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평판이 꽤 괜찮은 매파였다.

오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뗐다.

“주씨 가문 대소저는 심성이 곱고 지혜로운 분이라 얼마나 많은 집안에서 소인보고 이 댁에 방문해 혼담을 꺼내 달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제가 고르고 골라 믿을 만한 집안의 공자 한 분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진씨는 백자 찻잔을 들고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얼마나 많은 집안에서 이 댁에 방문해 혼담을 꺼내 달라고 했는지 모른다. 고르고 골라 믿을 만한 집안의 공자를 소개해 준다.’라는 말이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매파 오씨더러 먼저 혼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으니 모를 수가 있는가.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그들에게 혼담을 꺼냈으니 진씨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어느 댁 공자인가?”

오씨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주 귀한 가문의 자제입니다. 바로 국자제주國子祭酒이신 서 대인의 외아들입니다.”

진씨는 국자제주의 집안이라는 말에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국자제주는 그저 종4품 관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요즘 혼담을 꺼내는 집안이 너무나 적기에 진씨는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매파 오씨는 진씨의 표정을 보고는 그녀가 탐탁지 않아 한다는 걸 기민하게 눈치채고 얼른 말을 덧붙였다.

“서 공자는 겨우 열여덟 살밖에 안됐는데 이미 소년 수재이고 외모도 아주 수려합니다. 게다가 서씨 가문은 자손이 많지 않아 아들은 서 공자뿐이고 하나 있는 누이는 이미 출가했으며 형제자매는 없습니다. 부인과 노부인도 부드럽고 상냥한 분들입니다.”

그녀는 그럴듯한 말로 서 공자를 포장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주묘서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모른다며 주묘서에 대한 서 공자의 감정 또한 깊다고 이야기해 줬다. 그가 지난번 영안후부의 생일 축하연에서 주묘서를 보고 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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