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3화
“음, 우선 이 알록달록한 실 세 줄을 가지런히 놓아 봐.”
엽연채는 먼저 시범을 보였다. 조앵기도 그건 당연히 할 수 있었다. 그다음에 엽연채는 매듭을 잡는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조앵기는 두 단계까지는 이해가 됐지만 그 뒤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못 하겠어…….”
조앵기가 난처해하자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다독였다.
“몇 번 해 보면 할 수 있어.”
“그래?”
조앵기는 검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엽연채가 몇 번 더 시범을 보였지만 조앵기는 여전히 하지 못했고 끈기가 부족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난 머리가 좋지 않으니까 이런 건 배워도 못 해.”
“누가 그래? 한 번에 배워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는 어렸을 때 한나절을 배우고 나서야 할 수 있었어. 너는 겨우 몇 번 손을 움직여 본 것뿐인데 이대로 그만두겠다고?”
“진짜? 연채 너도 한나절 동안 배워야 했어?”
조앵기는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럼! 왜 아니겠어? 자, 다시 봐 봐. 이렇게 통과시키면 돼.”
조앵기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시도해 봤고 좀 더 배우고 나자 마침내 낙자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나비 모양의 낙자였다. 조앵기는 낙자를 보며 입에 가벼운 웃음을 띠었고 매우 흡족해했다.
“봐, 해냈잖아!”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은 예쁘지가 않으니 돌아가서 여러 번 연습해야 돼. 그럼 기술을 터득할 수 있을 거야.”
“응응!”
조앵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엽연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게 이렇게 잘해 주는 사람은 너뿐이야.”
“연채야.”
이때, 제민이 어린 환관을 따라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조앵기를 보더니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어머! 여기서 뭐 하세요?”
“이거 봐요. 내가 만든 나비 모양 낙자예요.”
조앵기는 분홍색 낙자를 들어 올렸다.
“오. 예쁘네요.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게 되셨군요.”
제민이 미소를 지었다.
“저택은 골랐어?”
엽연채가 말했다.
“도성 북쪽에 있는 걸로 골랐어. 주씨 가문에서 멀지 않은 매죽梅竹 골목에 있어. 삼진원三進院 뜰이고.”
“좋네. 그럼 시간이 늦었으니 우리도 이만 출궁해야겠다.”
엽연채는 그리 대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조앵기에게 응원의 말을 남겼다.
“돌아가서 열심히 연습해야 돼.”
엽연채는 몸을 일으켜 어린 환관을 따라 그곳을 떠났다. 조앵기는 헤어지기 못내 아쉬웠는지 그들을 동화문까지 바래다주고 나서야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조앵기는 새로운 것을 배워 열정이 끓어오르고 있었기에 얼른 집으로 돌아가 낙자를 열 개쯤 만들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저녁 식사를 한 뒤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평정소축으로 돌아온 조앵기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후 소완을 붙잡아 실을 한 아름 가져오게 한 뒤 서차간의 귀비의에 앉아 낙자를 만들었다.
이때, 양왕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고개를 숙인 채 그곳에서 낙자를 만들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여기서 뭐 하느냐?”
“낙자를 만들고 있어요.”
조앵기는 고개를 들고 쭈뼛거리며 그를 쳐다보더니 아직 완성이 덜 된 낙자를 집어 들고 말했다.
“보세요. 이 나비 모양 낙자를 제가 절반 정도 만들었어요.”
그녀는 살짝 우쭐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양왕은 ‘피식’ 냉소를 짓더니 그녀 옆에 앉았다.
조앵기가 그를 힐끗 쳐다보니 그는 자신이 낙자를 만드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조앵기는 더욱더 자신의 능력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실을 이리저리 넣고 감자 손에 들고 있던 나비 모양 낙자는 금세 완성에 가까워졌다.
이때, 양왕이 탑상 위에 남아 있는 실 몇 가닥을 집어 들더니 순식간에 나비 모양 낙자 한 개를 만들어 냈다. 게다가 조앵기가 만든 것보다 모양도 더 예뻤다.
조앵기는 순간 말문이 막혔고 표정이 아주 어두워졌다. 양왕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배운 지 얼마나 됐느냐?”
조앵기는 손동작을 멈추고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한나절이요…….”
“한 번 보면 바로 할 수 있는 걸 배우는 데 한나절이나 걸렸다고?”
양왕이 냉소를 짓자 조앵기는 고개를 더 푹 숙이며 말했다.
“누가 그러던데… 다른 사람들도 배울 때 다 이렇다고 했어요…….”
“너처럼 이런 걸 배우는 데 한나절씩이나 걸리면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굶어 죽었을 게다. 널 달래려고 한 말을 진짜라고 믿다니. 역시 넌 어리석구나!”
양왕은 손에 든 나비 모양 낙자를 그녀를 향해 집어 던진 후 방을 나섰다.
조앵기는 자신의 품으로 미끄러지는 나비 모양 낙자를 쳐다보다가 다시 자신의 손에 들린 낙자를 쳐다보니 정말 꼴사납게 생겼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비 모양 낙자를 조그만 수람繡籃(자수 용품을 담아두는 바구니) 안에 집어 던진 후 고침靠枕(허리에 받치거나 기댈 수 있게 두는 등받이 베개) 위로 엎드렸다.
안으로 들어오던 소완은 의기소침한 얼굴로 엎드려 있는 조앵기를 보고 의아해했다. 옆에 있는 수람 안에 쌓여 있는 많은 실과 그 위에 놓여 있는 만들다 만 나비 모양 낙자가 눈에 들어왔다.
소완은 수람을 들더니 분홍색 옷을 입고 엎드려 있는 조앵기를 쳐다보며 말했다.
“왕비 마마, 안 만드실 거예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단히 흥미를 보이던 조앵기는 시들시들한 모습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엽연채와 제민 등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황제가 제민에게 하사한 저택은 작은 집이었지만 어쨌든 그녀에겐 정착할 곳이 생긴 셈이었다. 그 집은 일부 관원들이 살았던 곳인데 결국 좌천되어 거주지마저 옮기게 되자 조정으로 환수된 집이었다. 그러니 지금 하사품으로 내린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 보수가 덜 되었고 필요한 것들이 갖춰져 있지 않아 제민은 엽연채를 따라와 주씨 가문에서 좀 더 지내기로 했다.
궁명헌으로 돌아온 제민은 갑자기 ‘쿵’ 소리를 내며 엽연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내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해 줘서 정말 고마워.”
“아이 참, 어서 일어나!”
엽연채는 깜짝 놀라 얼른 제민을 부축해 일으켰다.
“연채 너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줘. 안 그러면 내 마음이 편치 않을 거야.”
그러나 제민은 또다시 엽연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두 번 더 올렸다. 그러고 나서야 혜연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네가 없었다면 내겐 오늘 같은 날이 없었을 거야.”
제민은 자신을 배신한 초빙풍을 원망했다.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착하고 대자대비한 보살이 아니었다. 자신을 버린 초빙풍을 보고도 미소를 지으며 ‘상관없어. 그저 쓰레기 같은 사내 하나를 잃은 것뿐인걸. 이제부터 각자의 길을 걸으며 서로 상관하지 않으면 돼.’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도저히 이런 태연함과 침착함을 보일 수가 없었다.
제민은 평범한 사람이었고 마음속에 어두운 면도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달갑지 않았다.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어떻게 뒷바라지를 했는데, 초빙풍은 자신을 버리고 지체 높은 가문의 규수를 아내로 맞이했다. 게다가 그것으로 모자라 자신에게 첩실이 되라고 강요까지 했다.
제민은 꿈에서까지 초빙풍을 바닥에 패대기친 다음 마구 짓밟아 짓이기고 싶었다. 꿈에서라도 그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 그가 애당초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하며 매일매일 괴로움에 시달리길 바랐다.
하지만 이런 증오심을 감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엽연채에게 폐를 끼치고 있었고 자신이 복수를 하는 데 남에게 도와달라고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엽연채는 한 번도 자신에게 빚진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복수는 대체 언제쯤 할 수 있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엽연채가 이렇게 기회를 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엽연채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도 나한테 큰 도움을 줬어!”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없었다면 우리는 바둑 대결에서 승리해 군량을 얻어 내지 못했을 거야. 그럼 변방의 전황戰況은 더욱 힘들어졌겠지.”
“그런데, 연채 넌 꼭 이런 대결이 있을 줄 미리 알았던 것 같아.”
그 말에 엽연채는 순간 당황했다. 사실 전생에서도 이런 대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생에서 이맘때쯤에 자신은 장씨 가문에서 병에 걸려 다 죽어 가고 있었다. 사는 게 지루하고 고통스러웠고 추길은 그런 자신을 위해 밖에서 들은 재미있는 일을 자주 들려주었다.
한번은 추길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저께가 만수절이라 아주 시끌벅적했어요. 그런데 우리 대제가 대결에서 참패를 하고 말았어요. 그 북연이 또 와서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올해는 바둑을 두었다고 해요. 이미 유씨 가문 소저를 이겼는데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북연이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느꼈나 봐요. 여성 바둑꾼을 셋 데려오겠다고 했고 제대로 된 대결을 하자며 기어코 삼판이승제를 적용해 대결을 하자고 했답니다.
황제 폐하는 어찌할 수가 없으셨다고 해요. 대제에는 뛰어난 여성 바둑꾼이 없는데 상대방은 기어코 도전을 해 온 거죠. 응하지 않으면 대국의 면모를 잃게 될 테니 결국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세 사람을 뽑아 출전시켰는데 결국 전부 다 졌다고 해요.”
자신은 그래도 바둑에는 좀 흥미가 있었던 편이라 추길을 시켜 대국 기보를 가져오게 했다. 하지만 추길이 가져온 기보를 보니 북연 여성 바둑꾼들의 실력은 그저 그랬다. 특출한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 제민이 적성대에서 유곡요와 겨룬 바둑 대결을 보니 제민이 북연의 조장을 이길 수는 없지만 나머지 두 명은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건 말이지. 얼마 전에 한 행상行商이 하는 말을 들었거든. 그 사람이 북연 사절단을 만났는데, 그 사절단 사람들이 올해 바둑 대결을 제안할 거고 게다가 여성 바둑꾼들을 내보낼 거라고 했대.”
제민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거구나.”
“안 믿길 수도 있겠지만, 널 구했을 당시엔 결코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어.”
“아냐, 당연히 믿어.”
제민은 시원시원하게 미소를 지었다.
엽연채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제민을 구할 때 진심으로 제민을 돕고 싶었던 것이지 결코 그녀를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후, 변방 쪽의 전황은 점점 더 긴박해지고 누리의 충해도 일어난 데다가 조정에서는 세금을 더 올린다고 하니, 주운환의 군수품과 군량 확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만수절이 언급되자 그제야 전생에 있었던 바둑 대결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