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22화 (422/858)

제422화

초빙풍은 제민의 놀라운 성과에 이미 깜짝 놀랐는데, 그녀가 현주의 봉호까지 받게 되자 아예 넋이 나가 버렸다. 이어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쓰라림과 씁쓸함, 괴로움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제민은 봉호를 받게 됐으니 더 이상 자신의 첩실이 될 수 없었다. 아니, 바둑 대결에서 이긴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집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비록 허울뿐인 현주에 불과하고, 유곡요의 신분과 비교하면 유명무실한 것이기는 하나 이것만으로도 아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아주 많은 것들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만약 자신이 유곡요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고 제민과 혼인했다면, 제민은 바둑 대결에서 이겼고 현주의 봉호까지 받게 됐으니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전여라고 해도 황제는 제민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됐을 것이다.

제민의 명성이 높아지면 몇 년 전 묘 공자처럼 귀족들의 사랑을 받을 테고, 집으로 그들을 초대해 바둑 두는 법을 가르쳐 주거나 바둑 기술을 함께 연마하면 자신도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되면 자신이 벼락출세할 날이 있었을 텐데. 어디 지금처럼 설움을 참고 살겠는가.

자신은 매일같이 동료들에게서 무시하는 시선을 받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의 비아냥거림을 참아야 했다. 이젠 심지어 하인들마저 싫은 내색을 보였다. 이런 시선들이 초빙풍을 고통스럽게 했고 더할 나위 없는 모욕감을 주었다.

초빙풍은 그럴 때마다 잠시 인내하면 다 지나갈 것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 시기를 버텨 내어 벼락출세하게 되면 더는 이런 시선들을 참을 필요가 없게 된다.

하지만 실은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유씨 가문에 기대어 높은 자리에 오른 일이 앞으로 평생 동안 자신을 쫓아다니며 인생의 치욕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자신은 이 길을 걸을 생각이었다. 지위가 높은 사람, 대신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후회도 원망도 하지 않을 것이라 결심했다.

그런데 지금 제민이 눈앞에서 현주의 봉호를 받았다.

초빙풍은 눈앞에 놓인 권력 앞에 후회가 들었다. 유곡요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아내로 맞이했어도 자신은 마찬가지로 단번에 출세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어디 지금 같은 처지로 전락했겠는가?

유곡요를 아내로 맞이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제민이었고 제민도 자신을 사랑했다.

‘그런데 왜…….’

더없는 후회가 몰려온 탓에 초빙풍은 폐인이 되어 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여 넋이 빠져 있었다.

한편, 엽연채와 제민 등은 황송하다는 말을 건넨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제민은 갑작스럽게 온 것이라 따로 자리가 없었기에, 엽연채가 그녀를 자신이 있던 자리로 데리고 갔다.

진씨와 주묘서는 엽연채가 또다시 잘나가게 되자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었다.

“셋째 아가…….”

주 백야가 엽연채를 불렀다. 그는 항상 말썽을 일으키는 엽연채에게 화가 났지만 어쨌든 눈앞의 일이 해결되었으니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만 당부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거든 먼저 집안사람들과 상의를 하거라.”

“예.”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제민을 데리고 아까 앉아 있던 탁자로 돌아갔다. 주묘화가 옆으로 자리를 내어 주자 세 사람이 모두 한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진씨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엽연채가 상을 받은 건 그렇다 쳤다. 어쨌든 그녀는 이미 봉호를 받은 부인이니까. 하지만 제민은 비천한 농가 소녀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찌 현주가 되었단 말인가!

“바둑을 둘 거면 왜 네 큰시누이를 부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이득을 보게 한 것이냐. 네 큰시누이도 바둑을 둘 줄 안다.”

진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자 엽연채는 낯빛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이렇게 받아쳤다.

“큰아가씨가 유곡요보다 바둑을 잘 두나요?”

진씨는 낯빛이 어두워졌으나 물러서진 않았다.

“유곡요보다 잘 둘 필요가 있느냐? 유곡요는 대결에서 지지 않았느냐? 방금 있었던 대결 전에도 두 판이나 졌다고 들었다. 네가 유곡요 대신 묘서를 부르겠다고 제안했다면 황제 폐하께서는 분명 그리하라고 하셨을 게다.”

설령 졌다고 해도 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귀인들 앞에서 얼굴도장을 찍을 수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럼 대결 전에 바둑을 둘 사람을 구했을 때 왜 부인께서는 대소저에게 자발적으로 지원해 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제민이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그 말에 진씨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렇게 변명을 했다.

“셋째가 언급하지 않았으니…….”

“연채가 대소저가 출전하고 싶어 하는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제민은 냉소를 지었다.

“두 분은 아무 말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두 분이 고작 하사품 때문에 지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연채는 그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고 대소저를 부르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던 거죠.

정말로 출전하고 싶었다면 자발적으로 지원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본인이 정말로 하고 싶은데 왜 굳이 다른 사람이 언급해 줘야 하는 거죠? 본인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면 안 되나요? 어디가 부족하거나 고장 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감히!”

주묘서는 버럭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제민은 되레 눈 흰자위를 번득이더니 그녀에게 익살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묘서는 분이 나 죽을 지경이었지만 주위로 손님들이 가득하니 감히 성질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제민은 코웃음을 쳤고 더는 상대할 마음이 들지 않아 그들을 무시했다. 본래 자신은 엽연채가 데리고 왔다고는 하나 어쨌든 주씨 가문의 손님으로 지내고 있으니 진씨와 주묘서를 참아 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젠 봉호를 받게 되었고 황제가 저택까지 하사했으니 더는 이 두 사람을 참아 주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난 주묘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음식만 먹었는데, 그녀 옆에 앉아 있던 주종과가 고개를 돌리더니 다정한 얼굴로 제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민아…….”

엽연채와 제민은 입꼬리를 삐죽거렸고 제민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쓱 쳐다보며 말했다.

“민이라고요? 그쪽은 누군데요?”

주종과의 표정이 확 굳어졌고 준수한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연회는 한참 동안 더 지속되었고 사람들이 실컷 먹고 마시고 난 후에야 자리는 파했다.

사람들이 잇달아 몸을 일으켜 떠나고 있는데, 어린 환관 한 명이 다가와 공손하게 말을 건넸다.

“황후 마마께서 부인과 현주를 부르셨습니다.”

“알겠네.”

엽연채와 제민은 환관을 따라 그곳을 떠났고,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는 진씨의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환관을 따라간 엽연채와 제민은 금세 봉의궁鳯儀宫에 도착했다.

상석에 앉아 있던 정 황후는 두 사람을 보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겼다.

“주 부인이 얼굴만 빼어나게 아름다운 줄 알았지, 이렇게 재능이 넘치는 사람인 줄은 생각도 못 했네. 과연 대제 최고의 재녀로 손색이 없구먼.”

엽연채는 얼굴이 붉어졌다. 방금 전 대전에서 스스로를 최고의 재녀라고 칭했을 땐 별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 다른 사람이 그녀를 이렇게 부르니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마, 과찬이시옵니다. 그저 소인이 가진 장기 하나를 보여드린 것에 불과하옵니다. 보통의 여인들처럼 금도 좀 연주할 수 있고 시도 좀 지을 수 있는……. 최고의 재녀라는 칭호는 감당하기 어렵사옵니다.”

정 황후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유곡요가 그 칭호를 갖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

엽연채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정 황후는 이어 그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대부분 방금 전에 있었던 바둑 대결에 관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봉의궁을 나오자 또 어린 환관이 찾아왔다. 그는 제민에게 황제가 저택을 하사했는데 어떤 저택을 고를 것이냐고 묻더니, 제민을 데리고 사물소司物所로 가서 필요한 물품을 고르게 했다.

엽연채는 봉의궁에서 떨어진 한 정자에서 제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조앵기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연채야!”

“응.”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해?”

“오늘은 황제 폐하의 생신이라 저녁 식사를 함께 해야 돼.”

조앵기는 그렇게 말하며 소매 안쪽에서 기름종이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엽연채에게 건넸다.

“자, 이거 받아.”

“이게 뭔데?”

엽연채가 손에 받아 들자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고 열어 보니 안에는 분홍색 빛이 비치는 토자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엽연채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건 우리 쪽과 대사大使 쪽에만 있는 간식거리야. 그 중에 이 토자포가 정말 맛있거든. 난 두 개나 먹었으니 하나는 연채에게 주려고 싸 왔어.”

엽연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미소와 함께 답례했다.

“아, 고마워.”

“어서 먹어 봐!”

엽연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앵기의 모습을 보자 벌써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호의를 거절하기는 어려워 하는 수 없이 한 입 베어 물었다.

“이거 정말 예쁘다.”

갑자기 조앵기가 엽연채의 허리춤의 벽옥환碧玉環 위에 달려 있는 낙자絡子를 보며 말했다.

“이런 모양은 본 적이 없어.”

“아, 내가 만든 거야. 줄까?”

조앵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집에 돌아가면 내 것도 몇 개만 만들어 줘.”

“하지만, 우린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조앵기의 바깥출입은 정말이지 너무 엄하게 통제됐다. 그래서 다음 만남은 언제쯤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내가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줄게. 정말 쉬우니까.”

이 말에 조앵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소완이에게 배우라고 할게.”

그 말에 엽연채는 어리둥절했다.

“왜 소완이에게 배우라고 해? 나는 너한테 가르쳐 줄 거야! 너도 집에서 한가하게 지내잖아. 평소에 딱히 할 일도 없고 화본 보는 것도 질렸을 텐데. 낙자를 만들고 자수를 놓아 보면 어때? 낙자 하나라지만 직접 만들어 내면 너도 성취감을 느끼게 될 거야.”

“성취감? 그게 뭔데?”

조앵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옅은 한숨을 쉬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야 지금은 말해 줘도 모르겠네. 직접 낙자 하나를 완성하면 그게 뭔지 알게 될 거야. 자!”

엽연채는 지금 제대로 된 실이 없었으나 궁인을 불러 실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춤에 달린 낙자 두 개를 모두 풀어 조앵기에게 실을 건넸다.

조앵기는 손에 실을 쥐고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낙자나 수를 놓는 것 같은 일은 시녀들이 하는 모습만 보았지, 자신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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