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21화 (421/858)

제421화

“이런……!”

커다란 바둑판을 쳐다보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어떻게 이럴 수가? 판세가 변했잖아!”

“이건……!”

흥분한 정선제가 두 눈을 번쩍 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민이 열세였는데, 열 수 정도를 두는 사이 반전이 일어나 이젠 제민이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었다.

북연 사람들은 안색이 확 변했다. 더욱이 호막은 참을 수가 없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나타야. 이겨야 한다.”

호나타는 소름이 확 끼쳤다. 고개를 들어 제민을 보니 그녀는 비웃음과 득의양양함이 섞인 눈빛으로 저를 힐끗 보았다.

호나타는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바둑을 두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는 곳마다 제민이 길을 막았고 흰 돌의 열세는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대전 안에선 놀라움이 섞인 탄성이 터졌다. 반전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게다가 제민은 방금 전 성공적이었던 방어에서 공격 태세로 전환해 맹렬한 기세로 호나타를 몰아붙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유곡요는 놀라서 소리쳤고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말했다.

“이런 판세에서 제민이 어떻게……!”

이런 판세에서는 자신도 결코 역전승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농가 소녀 따위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분명 자신에게 졌던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이겼던 호나타를 누르며 반격할 여력조차 없게 몰아붙일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밀리고 있었어. 바둑판의 절반 이상을 빼앗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실력이 확 상승해 역전을 하다니.”

주위에 있던 대제의 귀공자와 규수들은 모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제민이 어떻게 유곡요를 넘어설 수 있지……?”

이 수군거림을 들은 엽연채는 코웃음을 쳤다.

‘제민은 바둑판의 절반 이상을 뺏긴 채로 태연하게 공격을 받아 내고 있었어. 실력이 없다면 어떻게 그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겠어? 일정한 상황을 유지하려면 아주 뛰어난 바둑 실력이 필요한 법이야.’

앞부분의 상황이야 어쨌든 간에 지금 제민은 맹렬한 공세를 퍼부어 흰 돌의 요충지를 차지하려고 했다. 제민이 쉼 없이 몰아붙이자 호나타는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이 망할…….”

“전 내기 바둑에서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습니다.”

제민은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집념과 광기로 가득 찬 눈빛을 띠었다.

“지면 대가가 너무 크니까요! 전 가난해서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거든요.”

그 말에 대전 안은 들썩들썩했다.

“민아…….”

초빙풍은 그 말에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전 안에 있는 제민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는 이 순간 마을에서 재능이 넘쳐흐르는 천재 소녀라고 불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을에서 지낼 때는 그녀에게서 빛이 나고 바둑도 정말 잘 둔다고 생각했었다. 바둑 내기에서 이기고 올 때마다 그녀는 늘 승리의 대가로 얻은 동화나 조그만 은화를 들고 교활한 어린 여우 같은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후에 도성에 오고 나선 자신은 그녀가 발하는 빛은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며, 그조차 도성에 들어오자마자 뒤덮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제민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해도 세차게 몰아치는 도성의 비바람을 당해 낼 수는 없으며 결국엔 격류 속으로 잠겨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민이 다시 일어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진흙탕에서 일어나 우뚝 설 줄을 말이다! 그녀는 개똥벌레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환히 밝혀 줄 수 있는 등불이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한 수에 승패가 명확히 드러났다.

호나타는 눈앞의 상황을 보자 낯빛이 하얗게 질리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처음 지는 것은 아니었다. 해주에게도 져 봤고 스승에게도 져 봤으며 유명 인사에게도 져 봤다. 그리고 가끔은 예인에게도 졌다. 그녀는 질 때마다 완전히 승복했기에 고개를 숙이고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앞에 있는 제민의 실력은 자신도 인정은 하나 지금 이건 단순한 바둑 한 판이 아니라 쌀 십만 말이 걸려 있는 대결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호나타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둑돌을 집어 바둑판에 내려놓았고 제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맞섰다.

제민은 지금 호나타가 느낄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대가가 너무 크기에 패배할 수도 패배해서도 안 되었다.

대전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사람들은 바둑을 두는 두 사람만 쳐다봤다. 둘은 마지막 순간까지 바둑을 두었고 더는 바둑돌을 둘 곳이 없자 호나타는 그제야 손을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내가 졌구나.”

얼굴이 백지장이 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비틀거리더니 결국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공주 마마! 공주 마마!”

북연의 사신단 중 두 명이 앞으로 튀어나와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순간 내뱉은 자신의 실언 때문에 북연이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됐으니, 승부욕이 강한 호나타는 그 충격을 감당할 수가 없어 그렇게 기절하고 말았다.

“들고 가거라!”

호막이 싸늘한 목소리로 명했다.

그러자 사신 무리에서 여인 둘이 얼른 호나타를 들고 대전 밖으로 나갔고 대제의 어린 환관이 그들을 쉴 곳으로 안내했다.

제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제야 대전 안의 사람들은 정신이 돌아왔다.

“이, 이겼다!”

대전 안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사람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제민을 쳐다봤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건 불가능해. 분명 나에게 졌었는데…….”

유곡요는 입술을 꽉 깨물며 제민을 노려봤다.

“어때요?”

제민은 입꼬리를 쓱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영기가 담긴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로 유곡요를 쓱 쳐다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유곡요의 고운 얼굴은 표정이 싹 변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제민은 더는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북연 태자 호막을 쳐다보며 말했다.

“작년에 늙은 여승 한 분이 저와 바둑을 두었는데 결국 저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병이 도져 진 거라면서 뻔뻔스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죠. 지금 북연의 공주 마마께서 갑자기 혼절하셨는데, 태자 전하께서도 병이 도진 거라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시겠죠?”

그 말에 유곡요는 누군가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것처럼 뺨이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저 말은 자신의 스승이 작년에 정말로 제민에게 졌는데 결과를 인정할 수 없어 병이 도졌다는 핑계를 댔다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물어볼 새가 없었다. 상석의 정선제 등이 이미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지 않겠지.”

정선제는 미소를 지으며 호막을 비롯한 북연 사신들을 훑어봤다.

“북연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 정말로 병이 도진 거라면 내일 또 한 판을 두면 된다. 하지만 바둑을 둘 때마다 병이 도져서는 안 될 것이다.”

호막과 북연 사람들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젠 우길 수조차 없게 되었다.

호막은 창백한 얼굴로 앞으로 나오더니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북연 사람은 한번 내뱉은 말은 지킵니다! 이미 동의한 일이니 당연히 이행할 것입니다.”

“하하하. 좋다.”

정선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짐은 전부터 북연이 가장 신용을 잘 지키는 나라임을 알고 있었다. 오늘 대결은 정말 훌륭했다. 모두에게 후한 상을 내리겠다.”

그가 그리 말하자 엽연채, 제민이 대전 앞으로 나왔고 유곡요도 이를 악물며 할 수 없이 앞으로 나왔다. 세 사람은 일렬로 나란히 섰고 해주와 예인도 앞으로 나와 세 사람 뒤에 섰다.

“북연 공주 호나타에게는 진주 두 두斗(부피의 단위)와 궁주宫綢(고급 견직물) 열 필을 상으로 내린다. 그리고 여성 기사 해주와 예인에게는 진주 한 두와 궁주 여섯 필을 하사한다.”

정선제가 말했다.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혜주와 예인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옆에 있는 호막과 북연 사신들은 하나같이 낯빛이 창백했다. 겨우 이 정도 하사품은 패배한 대가로 그들이 전달해야 할 군량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됐다. 하지만 자신들이 자초한 일이니 그저 울분을 참으며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정선제는 북연을 위로한 후 대제의 공신들에게 진심이 듬뿍 담긴 상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유곡요를 쳐다봤다.

유곡요는 비록 대결에서 패배했지만 어쨌든 대결에 참여했고, 결과적으로 대제가 이기기도 했으니 정선제는 유곡요에게 통 크게 상을 내렸다.

“진주 한 두와 궁주 여섯 필을 하사하겠다.”

해주, 예인과 동일한 하사품이었다.

“황송하옵나이다. 폐하.”

하지만 유곡요는 더 없는 굴욕감을 느낄 뿐이었다.

“엽연채는…….”

정선제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봉호를 1품 더 올리겠다. 또한 진주 다섯 두와 궁주 열 필, 옥여의 한 쌍과 황금 백 냥을 하사한다.”

대전 안의 사람들은 봉호를 1품 더 올린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더욱이 진씨는 낯빛이 확 변했고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1품 봉호이면 그녀보다 한 단계 더 높아지는 것이었다.

“민가의 제민은 듣거라.”

이어 정선제의 시선이 아래에 있는 왜소한 소저에게 향했다.

“제민을 정2품 능연凌燕 현주縣主에 봉하며 저택 한 채와 은화 천 냥을 하사한다.”

정선제가 하사품뿐 아니라 봉호까지 내리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봉호를 내리다니!’

비록 실권은 없다지만 봉호가 내려졌으니 그녀는 이제 귀족이 된 것이었다.

방금 전 바둑 대결을 할 때 채결은 제민의 처지를 정선제에게 알렸다. 정선제는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신분임을 잘 알고 있기에 그녀에게 봉호를 내린 것이었다.

홀몸이던 여인이 귀한 신분을 갖게 되었으니 앞으로 그녀는 바둑을 두든 다른 일을 하든 간에 도성에서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동시에 이 봉호는 그저 제민의 신분을 높여 줄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고, 일 년에 고작 은화 백 냥 정도를 주면서 황제는 자신의 넓은 도량과 인자함도 보여 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뛰어난 바둑 실력으로 큰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을 내려야 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쓸모가 있을지도 몰랐다.

제민은 자신에게 봉호를 내린다는 말에 순간 멍해지더니 얼른 정선제에게 사의를 표했다.

“황송하옵나이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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