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0화
호막을 비롯한 북연의 사신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어찌나 부끄러운지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들의 황제가 교양 수준이 낮다고 타국에서까지 망신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대제의 신하들은 떠들썩하게 웃어댔다.
푸후훕.
북림과 동안 쪽에서도 간간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웃음을 참았다. 그들은 북연과 동맹국이니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엽이채와 장박원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이 빌어먹을 계집애가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태자는 엽연채의 매혹적인 자태를 보며 두 눈을 번뜩였다. 방금 전 그 바둑 대결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태자비는 그녀의 재능에 놀라 흠모하는 태자의 표정을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 손에 들고 있던 떡은 그녀가 꽉 움켜쥐어 순식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
“허허허.”
호막은 냉소를 짓더니 이렇게 주의를 돌렸다.
“아직 두 판이 더 남아 있습니다!”
그 말에 대전 안은 또다시 조용해졌고 해주의 참패에 넋이 나갔던 북연 사신단은 호막의 말에 가까스로 정신이 돌아왔다. 모두 남은 두 경기에 정신을 집중했다.
방금 전까지 엽연채의 특출한 실력을 경모하며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대제의 조정 신하들도 일순간 하던 말을 멈추더니 침묵했다. 눈썹꼬리에서 기쁨이 잔뜩 느껴지던 정선제도 표정이 굳어지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사람들은 모두 바둑판에 시선을 두었는데 이어 낯빛이 갑자기 확 변했다.
제민은 여전히 열세에 처해 있었다. 아직 버티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북연 공주를 당해 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유곡요가 두고 있는 마지막 바둑판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예인에게 밀리고 있었다.
대제의 두 사람이 모두 열세에 처해 있었다.
정선제는 저도 모르게 낯빛이 확 변했고 매서운 눈빛으로 유곡요와 제민을 쳐다보며 속으로 능력 없는 두 사람에게 욕을 퍼부었다.
한편, 아무리 대국에 집중하고 있었다고 해도 선수 네 사람 역시 방금 전 상황을 듣고 있었다.
호나타의 마음속에서는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일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바둑 실력을 가져 가장 큰 기대를 받고 있던 해주가, 불패의 대명사인 해주가 그만 지고 만 것이다.
그러니 자신과 예인은 더더욱 절대로 지면 안 됐다. 다행히 자신은 지금까지 줄곧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이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다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던 호나타는 고개를 들어 제민을 쳐다봤다.
‘참으로 성가신 사람이다! 고약膏藥처럼 끈덕지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구나!’
그 옆, 유곡요는 낯빛이 창백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역전되었다는 말인가? 게다가 엽연채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 대단한 해주를 이긴 것이다.
“하하.”
예인은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유곡요를 쳐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제가 왜 천원에 바둑돌을 두었다고 생각하세요? 상대를 얕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맞아요. 전 확실히 상대를 얕봤습니다! 왜냐하면 소저는 정말로 실력이 떨어지니까요! 제가 몇 수 물려 줬는데도 이렇게밖에 못 두는데 대제 최고의 재녀라고요? 어쩐지 방금 전에 대제의 황제께서 최고의 재녀는 엽연채라고 하시더군요.”
유곡요는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내가 그런다고 동요할 것 같은가?”
“하, 누가 동요하게 한다는 겁니까. 전 그저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뿐이에요.”
예인은 그녀를 비웃었다.
예인은 정말로 유곡요를 흔들어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저 하고 싶은 말을 담아 두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자신은 바둑을 두며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뿐이었고, 상대가 약한 걸 보니 비웃는 말을 몇 마디 뱉은 것뿐이다.
전에 자신의 스승은 이런 심성으론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고 말했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몰랐다. 확실히 자신의 실력은 호나타와 해주에게 못 미쳤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을 이기는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유곡요는 예인의 말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지면 안 된다! 절대로 져서는 안 돼!’
대제의 신하들과 정선제도 초조한 마음으로 커다란 바둑판을 쳐다봤다.
초빙풍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둑판을 뚫어지게 지켜보며 혼잣말했다.
“부인이 반드시 이겨야 할 텐데…….”
그는 유곡요가 미웠고 어떤 밤엔 그녀가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곡요가 이기기를 간절히 바랐다. 마치 그녀가 이기면 자신 역시 뭔가를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고개를 들어 제민의 냉담한 얼굴을 볼 때마다 초빙풍은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제민은 바둑을 둘 때 항상 이렇게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영기가 느껴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승패에 상관 없이 늘 이렇게 변함없는 표정으로 말이다.
초빙풍은 제민이 이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지기를 바랐다.
“아이고, 끝났네!”
갑자기 몇몇 대제 사람들이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초빙풍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더니 우선 제민의 바둑판을 살펴봤다. 아무 변화도 없는, 조금 전과 다름없는 판세였다. 이어 시선을 유곡요 쪽으로 향했는데 그녀의 활로는 이미 다 막힌 상태였다.
“쯧쯧쯧, 제가 우리 바둑 선후배들 중 가장 실력이 모자란 사람이에요!”
예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목소리 역시 크고 또랑또랑해 대전 안에서 메아리쳤다.
북연 사람들은 비웃음을 날렸다. 어쨌든 최고의 재녀라는 평판을 듣던 유곡요가 지금 북연의 세 사람 중 실력이 가장 처지는 예인에게 졌으니 말이었다.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한 것이다.
유 재상은 고개를 숙이며 손으로 이마에 난 땀을 닦아 냈다. 그의 낯빛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이런…….”
정선제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방금 전 엽연채가 가져온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이젠 화를 낼 기력조차 없었다.
“아직도 졌다고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예인이 ‘흥’ 콧방귀를 뀌자 유곡요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두 눈엔 핏발이 서 있었다.
‘어찌 이럴 수가……. 내가 패배하다니!’
이럴 바에야 차라리 대결에 앞서 대전 상대를 고를 때 해주나 호나타를 고르는 게 나았다. 어차피 이미 이 두 사람에게 졌으니 차라리 그들과 겨루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대결에 앞서 대전 상대를 고를 때 엽연채가 마치 자신을 특별히 배려해 주는 양 바둑 실력이 가장 처지는 자와 붙게 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패배였다.
‘이제 어찌하면 좋은가?’
유곡요는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될 지경이었고 백기를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이, 이럴 리가 없어! 부, 분명 아직 활로가 있을 거야! 분명 있을 거야!’
찾아내기만 하면 역전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었다.
유곡요는 초조하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둑판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러더니 마침내 두 눈을 반짝였다.
‘저기 고목高目(바둑판의 네 모서리에서 양쪽 방향으로 넷째 줄과 다섯째 줄이 만나는 곳)이 있었구나!’
흥분한 유곡요는 손에 들고 있던 바둑돌을 바둑판 쪽으로 휙 가져가더니 ‘탁’ 소리를 내며 고목 위에 올려놨다. 순식간에 주위에 있는 흰 바둑돌이 살아나자 그녀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전승을 거두면 된다. 유곡요는 반드시 그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대로 잘 두기만 하면 어쩌면 대역전의 명승부를 만들어 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순간, 역시 ‘탁’ 하는 쟁쟁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곡요가 깜짝 놀라 보니 예인이 비소를 날리며 검은 돌을 오오五五(바둑판의 네 모서리에서 양쪽 방향으로 다섯째 줄끼리 만나는 지점)에 놓았다. 그러자 판세는 순식간에 예인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고 유곡요는 발버둥 칠 여지마저 전부 사라져 버렸다.
“패배를 인정했다면 그래도 그쪽을 높이 평가할 수 있었을 텐데.”
예인은 냉소를 지었다.
대전 안의 사람들은 전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패배한 게 뻔히 보이는, 만회할 수 없는 국면이었다.
북연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고 유 재상은 더는 견딜 수가 없었는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요야!”
유곡요는 낯빛이 확 변했고 입술은 하도 세게 물어 금방이라도 피가 나올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결국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제… 제가 졌네요.”
“하하. 이미 그렇게 보였어요. 지금까지 괜히 질질 끌어서 오래 앉아 있느라 어깨와 허리가 안 펴지네요.”
예인은 ‘흥’ 콧방귀를 뀌고는 두 손으로 등 뒤를 받쳤다.
“짐작한 대로군요!”
북연 태자 호막은 쥘부채를 살살 흔들며 말했다.
정선제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엽연채는 뜻밖의 수확이었다지만, 큰 기대를 걸었던 유곡요가 패배를 했다.
이로써 양쪽 다 한 번씩 이기게 됐다.
이제 대결의 승패와 군량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은 전부 제민에게 달렸다. 그런데 그녀가 이길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태연하긴 해도 대결을 시작한 후로 계속 열세에 처해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한편, 유곡요는 이곳에 머무를 낯이 없어 얼른 자신이 둔 창피한 수를 흩뜨린 다음 흰 돌을 바둑통 안에 집어넣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초빙풍은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한 번 보고는 다시 제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자 유곡요가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제민이 지나 안 지나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예요?”
초빙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유곡요는 그의 옆에 앉더니 제민을 응시하며 냉소를 지었다.
“저도 졌는데 제민이 이길 수 있겠어요?”
초빙풍은 입에 가벼운 웃음을 띠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이렇게 말했다.
“맞소. 제민이 어떻게 이길 수 있겠소.”
대전 안의 사람들은 귓속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흥. 어서 패배를 인정하거라!”
호막은 매서운 눈빛을 번득이며 차가운 목소리로 조소했다.
그의 곁으로 돌아온 해주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하지만 제민과 호나타의 대결을 보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민이 지겠죠?”
대제의 신하들 사이에서도 이런 반응이 나왔다.
“유곡요만도 못한 사람이 이긴다면 그게 이상한 거죠.”
엽이채는 낮은 목소리로 제민을 낮잡아 보았다.
“맞소. 이기는 게 이상하지!”
장박원도 적대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동조했다. 그는 제민에게 악감정이나 편견 같은 건 거의 없었지만, 제민이 지게 되면 대제도 지게 되니 군량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임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면 주운환은 옥안관에서 제대로 전쟁을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결국 주운환은 그곳에서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제민은 작년에 적성대에서 유곡요에게 졌잖아요…….”
대제 사람들은 전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엽연채만은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민 또한 입꼬리를 쓱 올리더니 손에 쥐고 있던 흑옥 바둑돌을 목외目外(바둑판의 네 모서리에서 양쪽 방향으로 셋째 줄과 다섯째 줄이 만나는 곳)에 놓았다.
호나타는 그 모습을 보며 그저 평범한 수를 두었다고 생각했고 흰 돌을 하나 집어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제민은 계속해서 돌을 두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열 수 정도를 두었을 때, 호나타는 돌연 깜짝 놀라고 말았다. 판세가 확 변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