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19화 (419/858)

제419화

주 백야는 사람들 사이로 움츠러들어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엽연채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대제 최고의 재녀라고 했을 때 주 백야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며느리는 어째서 말썽 부리기를 이리도 좋아하는 걸까.’

진씨는 콧방귀를 뀌며 엽연채를 욕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집안에 화를 부르는구나!”

한쪽에 자리한 엽이채와 장박원도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빌어먹을 계집애. 주제넘게 나서다니, 잠시 후에 바둑 대결에서 지면 개망신을 당하게 될 거다. 방금 전 스스로 대제 제일의 재녀라고 치켜세울 때 역겨워 죽는 줄 알았네! 어쩜 저리 뻔뻔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바둑 대결에서 지면 저렇게 날뛸 수도 없게 되리라. 엽연채는 온 나라의 죄인이 될 테고 군량도 얻을 수 없을 테니, 엽연채의 서자 부군은 변방에서 굶어 죽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 분명했다.

엽이채와 장박원은 생각할수록 흥분이 되어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번 궁에서 베푸는 연회에 참석한 것은 정말이지 현명한 선택이었다.

원래는 2품 고명부인이 된 엽연채의 기고만장한 꼴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화를 자초한 모습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부부는 끅끅거리며 숨이 넘어갈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장찬이 고개를 홱 돌려 쳐다보니 두 사람은 입을 가리고 음흉한 표정으로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장찬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그들을 싸늘하게 쳐다봤다. 엽이채와 장박원은 그 눈빛을 느끼고는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하, 할아버지!”

“자중하지 않으면 쫓아낼 것이다!”

장찬이 써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엽이채와 장박원은 바로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엽연채를 비웃고 있었다.

“아아!”

그때, 사람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엽이채와 장박원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보니 소리를 낸 사람들은 북연 사람들이었다.

염소수염을 기른 사십 대로 보이는 한 사신이 웃으며 말했다.

“해주가 실력을 드러내기 시작했구나! 어제 저 아이가 저와 바둑을 두었는데 바로 저 수법을 썼습니다. 순식간에 제 길을 막아 도저히 반격할 수가 없어 그대로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죠.”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엽연채와 해주의 대결을 쳐다봤다.

흰 돌과 검은 돌은 처음부터 호각을 다투며 서로 한 수도 물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양쪽 다 틀에 박힌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볼 만한 부분이 거의 없었다. 그저 평범한 대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도저히 바둑 고수들의 대결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결을 벌이는 내내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전 검은 돌이 갑자기 마늘모 행마(행마行馬는 바둑 등에서 수를 두는 것을 말하며, 마늘모 행마법은 한자漢字의 ‘구 자口’처럼 두는 것으로, 구 자의 모서리에서 대각선 방향의 모서리로 이동하는 것)하여 삼삼三三(바둑판의 네 모서리에서 양쪽 방향으로 셋째 줄이 만나는 곳)에 안착하면서 바둑 대결에 빛을 밝힌 것이다.

해주는 초반에는 지극히 평이한 수를 두고 있었다. 그저 상대의 길을 막는 평범한 수 말이다. 그런데 한순간에 조금의 물결도 일지 않던 잔잔한 해면 위로 어마어마한 높이의 파도가 치솟아 오르더니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바둑을 잘 아는 대제 쪽 사람들은 전부 깜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록 적이라지만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는 특출한 실력이었다.

“대단하구나!”

양왕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가늘고 긴 손가락을 구부려 입술 위에 갖다 대며 이리 평했다.

“흥미롭군.”

그 곁의 조앵기는 분홍색 빛이 비치는 토자포兔子包(토끼 모양 만두) 하나를 두 손으로 들고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안에는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소가 들어 있었다. 상큼한 향이 입 안으로 들어와 미뢰를 자극하자 그녀는 가는눈을 떴다. 너무 맛있어서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하.”

한편, 북연 사람들은 다들 더없이 득의양양한 모습이었다.

호막은 바둑판의 상황을 지켜보며 당연하다는 눈빛을 보이더니 고개를 돌려 정선제를 쳐다봤다.

상석의 정선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막이 아주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려는 찰나, 갑자기 정선제의 두 눈이 또 번쩍 뜨였다.

호막이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엽연채의 가늘고 고운 손이 백옥 바둑돌을 살짝 집어 들더니 바둑판 위로 내려놓았다.

그녀는 소목小目(바둑판의 네 모서리에서 양쪽 방향으로 셋째 줄과 넷째 줄이 만나는 곳)에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그저 평범한 ‘막기’ 기술에 불과하지만 방금 전 해주가 일으켰던 어마어마한 높이의 파도가 해면 위에서 일렁이다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까지 뒀던 모든 수가 한순간에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해주는 어안이 벙벙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흑옥 바둑돌을 끼워 둔 손가락이 순간 멈칫하더니 다시 바둑통 안으로 들어갔다.

북연 사람들도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쳐다봤다. 특히 해주와 바둑을 둔 적이 있는 사람들은 해주의 이 기술을 무너뜨리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대제의 아름다운 여인이 단박에 이 기술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누군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절묘하군!”

호막도 놀라서 멍해져 있었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해주와 이 정도까지 막상막하로 둘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소름이 끼쳤고 해주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참하게 생긴 해주는 얼굴을 굳힌 채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평온하게 바둑을 두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가 너무 약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엽연채는 한 방에 자신의 기술을 무너뜨렸다. 심지어 나이도 자신보다 한두 살쯤 어려 보이는데 말이다.

해주는 마음이 무거워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엽연채를 쳐다보았고, 엽연채도 무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했다. 엽연채의 두 눈동자는 햇빛을 받으며 찰랑이는 물결처럼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다.

해주는 숨을 깊게 한번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킨 후, 바로 검지와 약지로 바둑돌 하나를 집어 들어 바둑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녀가 포석해 둔 길이 다시 대부분 살아났다.

그러나 엽연채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검은 돌이 가는 곳을 전부 그녀의 흰 돌로 막았다.

해주의 돌은 가는 곳마다 높은 파도를 일으켰지만 이내 해면 위로 스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엽연채가 번번이 길을 막았고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자 해주의 기세는 순식간에 시그러졌다. 이제 그녀의 돌은 이미 대부분 죽었고 집을 잃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형국이었다.

낯빛이 하얗게 질린 해주는 손을 들 기력조차 없었고 콩알처럼 굵은 땀방울이 이마를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얼빠진 표정으로 눈앞의 바둑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이래서는…….’

“그쪽이 졌군요.”

엽연채는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해주의 머릿속에서 굉음이 울리는 듯하더니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렇다. 자신이 졌다. 이건 졌을 때 보이는 판세였다.

당연히 자신은 이런 판세를 수도 없이 봐 왔다. 하지만 이런 건 상대방에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자신에게는 수년간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호막과 북연 사람들은 전부 꼼짝 않고 멍하니 있었다. 그들은 대전 입구에 있는 커다란 바둑판을 쳐다보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못 놓은 거 아닙니까? 잘못 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호막은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해주의 뒤로 걸어갔다. 그가 진짜 바둑판을 보니 검은 돌은 군대가 패배하여 군사들이 대오를 이루지 못하고 줄행랑을 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미 반격의 여지를 완전히 상실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해주가! 해주가……!”

염소수염을 기른 북연 사신은 더더욱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해주의 신봉자였고, 그에게 있어서 해주는 절대로 지지 않는 천하무적의 기사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패배한 것이었다. 심지어 무슨 유명 인사나 대가에게 진 것이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대제 사람에게 지고 말았다. 그것도 해주보다 한두 살쯤 더 어려 보이는 젊은 여인에게 말이다.

‘최고의 미인이나 되어서 나라와 백성에게 재앙이나 가져다줄 것이지 바둑은 왜 둬서!’

“와, 와아……! 이겼다!”

대제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놀라서 환호성을 질렀다.

바둑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은 방금 전 상황을 보고는 놀라서 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어떻게 바둑을 이렇게 둘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말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해주도 대단하지만, 엽연채의 실력은 그를 능가하니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해주는 의심할 여지 없이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고 북연이 그리 추앙할 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엽연채를 만났고, 그녀보다 실력이 조금 떨어져 결국 패배하고 만 것이다.

“하하하!”

정신이 돌아온 정선제는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크게 웃더니 눈썹을 치켜올리며 호막을 쳐다봤다.

“북연 태자는 보거라. 이 사람이 바로 우리 대제 제일의 재녀이자 최고의 여성 바둑꾼이다! 우리 대제의 자랑이다!”

호막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직까지도 해주가 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해주도 여전히 멍한 얼굴로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다. 충격을 크게 받아 넋이 나가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해주가…….”

염소수염 사신은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해주는 우리의 보배입니다! 드넓은 바다처럼 모든 것을 망라하고 변화무쌍…….”

이때, 양왕이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술잔을 들어 올리더니 코웃음을 쳤다.

“모든 것을 망라하길 바란다면 아예 아해阿海라고 부르지, 주珠(진주)는 무슨! 바닷속의 주는 말일세 파도가 한번 쏴 하고 밀려오면 그대로 휩쓸려 가 버리네! 그런데 무슨 바다의 보배라고! 쯧쯧.

북연 황제께서 참 이름 하나도 제대로 못 지으시는군! 다음번에 이름을 지어 줄 땐 우선 『설문해자說文解字』부터 보거나 교양 있는 사람을 찾아 지어 달라고 하게!”

그 말에 대전의 분위기는 경직되었다. 북연의 사신들은 화가 치밀어 올라 하마터면 벌떡 일어나 화를 낼 뻔했다.

“이, 이런…….”

염소수염 사신은 한참 동안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지만 반박의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로 해주海珠는 그저 바닷속에 있는 진주 하나에 불과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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