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8화
엽연채의 말에 유곡요는 표정이 확 굳어졌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분명 자신의 명성이 가장 높은데 한낱 조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유곡요는 제민을 도와준 엽연채를 미워했지만 그녀의 바둑 실력에는 승복했다. 하지만 제민은 분명 자신보다 못한데 왜 제민이 자신을 제치고 부조장이 되었다는 말인가?
예전 같았으면 유곡요는 당당히 반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 호나타와 해주에게 졌고, 그들의 실력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어찌해도 저 두 사람은 상대할 방도가 없었으니, 남은 사람은 예인밖에 없었다. 예인이라는 자가 바둑 실력이 제일 떨어진다니 말이다.
유곡요는 달갑지 않았지만 이내 싸늘하게 미소를 짓더니 돌아서서 제민에게 말했다.
“저 북연 공주 마마는 나도 이기지 못했는데 네가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하하!”
제민은 맑고 투명한 눈을 위로 향하더니 피식 웃고는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소저, 작년에 적성대에서 소저를 봤을 때 전 소저가 정말로 귀하고 고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속세를 초월한 선녀나 고상한 선비처럼 보였죠. 볼 수는 있지만 다가갈 수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보니 진창에 미끄러져 굴렀는지 온몸에 오물이 묻어 있는 모습이군요.”
유곡요는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제민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더는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대전 중앙에는 금실로 용을 수놓은 검붉은 커다란 모포와 박달나무로 만든 바둑판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여섯 명은 노란색 비단을 씌운 두툼한 부들방석 위에 앉아 대국을 시작했다.
먼저 바둑돌을 쥐고 색깔을 맞추는 방법을 통해 엽연채는 흰 돌을 잡고 해주는 검은 돌을 잡게 되었다. 같은 방법으로 각 조가 잡게 될 돌이 다 결정되었다. 엽연채와 유곡요가 흰 돌을 잡게 되었고 제민이 검은 돌을 잡게 되자 상대방은 이 반대로 바둑돌을 잡게 되었다.
여섯 명이 바둑통을 땅 위에 놓자 위에서 채결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대결을 시작하겠소! 대결 시간은 한 시진이오!”
그는 그리 외치며 한쪽에 놓인 짐승의 머리 모양 장식이 붙어 있는 황금 향로 안에 커다란 노란색 불향佛香을 꽂았다. 이 향은 특별 제작된 향으로 정확히 한 시진 동안 태울 수 있었다.
향이 어른어른 피어오르자 아래에 있는 여섯 명은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를 나눈 후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해주는 엽연채를 쳐다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 그 화원에서 저희가 바둑 두는 걸 보고 있었죠.”
그리 말하며 손에 들고 있는 흑옥 바둑돌을 오른쪽 상단에 두었다.
“맞아요.”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소저의 바둑 솜씨가 아주 훌륭하더군요.”
해주는 또다시 엽연채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부인은 정말 용모가 빼어나시군요.”
이 둘도 없는 자태 때문에 보자마자 바로 엽연채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방금 전 화원에서 했던 대결은 그저 놀이에 불과했어요.”
해주의 말인즉 자신은 유곡요와 대국을 벌일 때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니 그 경기를 보고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보였어요.”
엽연채는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에 끼운 백옥 바둑돌을 왼쪽 하단에 두었다.
해주는 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옷깃을 바르게 하고 단정하게 앉았다.
해주는 엽연채의 바둑 실력이 분명 유곡요보다 뛰어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 봤자 자신의 바둑 선배 정도의 실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엽연채를 얕잡아 보거나 봐주면서 바둑을 둘 수는 없었다. 이 대결에 북연이 많은 양의 쌀을 보내야 하는 문제가 걸려 있는데 어찌 어린애 장난하듯 할 수 있겠는가.
상대가 개미이든 코끼리이든 간에 반드시 전력을 다해야 하며, 기회를 엿봐 상대를 단번에 쳐부숴 버려야 했다. 후환은 미리 제거해야 하는 법이었다.
옆에 있는 제민과 유곡요도 대결을 시작했다.
호나타는 제민을 힐끗 쳐다봤고 두 사람은 침착하게 화점花點을 차지했다. 이 제민이라는 사람은 중요한 자리에서 유곡요에게 졌다고 했다. 분명 바둑 실력이 꽤 괜찮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머릿수를 채우려 데려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자신의 실언으로 하마터면 북연을 위기에 빠뜨리게 됐기에 호나타는 아주 신중하게 바둑을 두었다.
그 옆, ‘탁’ 소리와 함께 흑옥 바둑돌이 바둑판의 한가운데에 있는 화점 위에 올려졌다. 예인이 먼저 바둑돌을 둔 것이다. 그녀는 바둑돌을 둔 뒤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곡요는 예인이 정중앙 화점에 바둑돌을 놓는 모습을 보더니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이게 무슨 뜻이지? 나를 깔보는 것인가?’
바둑을 둘 때는 우선 바둑판의 네 귀퉁이에 있는 귀를 차지한 후 귀와 귀 사이 가장자리에 있는 변을 차지한다. 귀와 변은 바둑판의 테두리인 천험天險이라 이곳을 차지하면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된다. 반면, 바둑판 한가운데에 있는 화점인 천원天元에 먼저 바둑돌을 두게 되면 안정적인 토대를 만들 수 없어 이기기 어려운 법이었다.
그런데 예인은 제일 먼저 정중앙의 화점에 바둑돌을 둔 것이다. 이는 유곡요에게 몇 수를 물려 준 것과 같은 의미로, 그녀를 깔보며 업신여기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유곡요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누군가가 이렇게 나왔을 경우, 자신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분명 한 수씩 물려 줬을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겨룬다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곡요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신 후 심신을 안정시켰다. 지금은 자존심을 챙기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유곡요는 ‘침착’이라는 한 단어만 생각했다. 이미 화원에서 연달아 두 번이나 졌는데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예인에게 또 지게 되면 평판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이었다.
평정심을 찾고 나니 지금 예인이 이리 기고만장하게 구는 게 도리어 마음에 딱 들었다.
‘그래, 얕보라고 하지 뭐!’
상대방이 먼저 이쪽을 얕보고 오만하게 굴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되었다. 유곡요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매서운 눈빛으로 엽연채를 쓱 쳐다보더니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엽연채는 해주와 바둑을 둔 적이 없으니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해주의 기풍棋風에 무한한 역량이 담겨 있다는 것을 당연히 모를 터였다. 잠시 후 엽연채와 제민은 모두 질 것이고 자신만 이길 게 분명했다. 그러면 자신은 체면을 세울 수 있을 것이었다.
유곡요는 예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상대방이 어찌하든 간에 자신은 차분한 마음으로 실력을 전부 발휘해야 했다.
정선제는 아래에 있는 여섯 사람이 바둑을 두기 시작하자 저도 모르게 목을 앞으로 쭉 뺐다. 그는 이 순간만큼은 너무 높은 자신의 의자를 원망했다. 너무 높아서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희에게 큰 바둑판이 있습니다.”
이를 알아챈 북연 태자 호막이 웃으며 말했다.
“대제의 여성 바둑 기사들과 바둑 실력을 연마해 보라고 저 아이들을 이곳에 데려왔으니, 커다란 바둑판도 함께 준비해 두었사옵니다.”
그 말에 정선제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치켜올렸다. 대제의 체면을 구겨 버리려고 미리 준비를 했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자신도 그녀들이 어떻게 바둑을 두고 있는지 보고 싶기에 그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사람을 시켜 그 바둑판을 펴거라! 채결아.”
“예.”
체결은 대답한 후 어린 환관 둘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북연의 사신 한 명이 얼른 커다란 바둑판을 가지고 나왔다.
호막이 말한 커다란 바둑판은 그저 크고 두꺼운 흰색 천에 불과했다. 흰색 천 위에는 바둑판 모양이 그려져 있고 뒷면은 대나무로 만든 지지대로 받쳐져 있었다. 커다란 바둑돌 뒤엔 바늘이 붙어 있어 바둑 기사가 바둑돌을 두면 환관이 이를 보고 바둑돌을 천에 꽂았다.
세 개의 커다란 바둑판은 대전 입구 근처에 놓여 있어 정선제가 고개를 들면 바둑판을 바로 볼 수 있었고 조정 신하들과 손님들이 보기에도 편했다.
어린 환관이 세 조의 바둑판을 본 뒤 커다란 바둑판 앞으로 가서 똑같이 바둑돌을 올려두었다.
정선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둑판을 보니 엽연채와 해주는 안정적으로 수를 놓고 있어 지금으로서는 승부를 가늠할 수 없었다. 제민은 호나타에게 밀려 열세에 처해 있었고, 유곡요 쪽은 예인이 바둑판의 화점에 바둑돌을 둔 덕분에 예인이 열세에 처해 있었다.
현재는 대제와 북연이 대등한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정선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호막이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한담을 꺼냈다.
“황제 폐하, 왜 제일 어린 저 아이를 해주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이 이름은 저희 아바마마께서 지어 주신 이름인데 바다의 보배라는 의미이옵니다.
저 아이의 바둑 기술엔 특별한 점이 없지만 드넓은 바다처럼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고 변화무쌍하옵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바둑 기술은 이미 자기 아버지를 넘어섰습니다. 북연 제일의 바둑 기사이죠! 저 아이의 기풍棋風은 늘 처음엔 풍랑이 일지 않고 고요하다가 중반에 이르면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일어나 강산에 해일이 밀어닥치는 듯하옵니다!”
그 말에 정선제와 대제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특히 유곡요와 해주의 바둑 대결을 봤던 사람들은 잇달아 좋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선제의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었다. 당시 바둑 대결에 대해서 채결이 상세하게 말해 줬는데, 처음에는 비슷하다가 중반에 이르러서 유곡요가 확 무너졌다고 했다.
정선제는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니 다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유곡요는 꽤 잘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예인이 상대를 얕보고 화점에 바둑돌을 두어 스스로를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제민은 상대에게 밀리고 있었고, 엽연채 쪽은 여전히 승패를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아래에 있는 대제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지금 이길 확률이 가장 큰 사람은 유곡요이군요.”
전지신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제민은 안 될 것 같고 엽연채 쪽은… 해주라는 아이가 저리 훨훨 날고 있으니…….”
옆자리의 사람은 미간을 잔뜩 째푸렸다. 북연이 세 사람을 내보낸 건 간교한 술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기새마田忌賽馬(1등 말은 상대방의 2등 말을 상대하게 하고, 2등 말은 상대방의 3등 말을 상대하게 하고, 3등 말은 상대방의 1등 말을 상대하게 하여 2승 1패로 이기는 전략) 방법을 사용할 걸 그랬소. 엽연채는 북연 공주와 대결을 했어야 했소.”
전지신이 이어서 말했다.
“북연이 응했겠소?”
옆에 있던 여지가 냉랭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정말로 엽연채를 북연 공주와 붙여 놓았다고 해도 해주가 유곡요와 붙고 예인이 제민과 붙을 텐데 그럼 북연도 진다는 것을 알지 않겠소? 저쪽이 바보도 아니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잔뜩 얼굴을 굳히며 실망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