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7화
출전할 사람을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정선제는 생각을 하며 하좌에 앉아 있는 화려하게 치장을 한 규수들과 귀부인들을 훑어봤다. 그러자 그들은 깜짝 놀라 전부 고개를 움츠리며 몸을 낮췄다. 누가 감히 출전하겠는가? 그들의 바둑 실력은 유곡요보다도 좋지 않으니 절대 나서지 않을 것이었다.
“황제 폐하.”
이때, 엽연채가 대전 중앙으로 걸어나와 정선제에게 예를 올렸다.
“추천할 사람이 있사옵니다.”
그 말에 유곡요 옆에 앉아 있던 초빙풍은 속으로 뜨끔했고 이어 가슴이 빠르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정선제가 말했다.
“친한 벗이 있는데 지금 소인의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바둑 실력이 아주 뛰어나 도성 규수들 중에 대적할 사람이 없사옵니다. 이름은 제민이라고 하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엽연채가 답하자마자 초빙풍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갑작스러운 외침에 대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고 유 재상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무엄하다! 어서 자리에 앉지 못할까!”
지금 황제가 대화를 하고 있는데 어디 감히 입을 연다는 말인가!
정선제는 초빙풍을 흘겨보고는 다시 엽연채를 쳐다보며 제안을 허했다.
“그럼 어서 불러오너라. 채결아, 가거라.”
“예.”
채결이 하좌로 내려오자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알려 주었다.
“채 공공, 밖에서 내 여종을 찾아주시게. 그 아이에게 제민을 데리고 오라고 하면 된다네.”
“예.”
채결은 먼지를 일으키며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정선제는 제민이 누구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초빙풍과 제민의 일을 스치듯 한 번 들었을 뿐이니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유곡요는 떠나가는 채결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 농가 소녀를 데리러 가려는구나!’
이어 엽연채를 매섭게 쏘아봤다. 유곡요는 화가 나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어째서 이런 귀한 자리를 농가 소녀 따위가 더럽힌다는 말인가?
게다가 유곡요는 초빙풍과 제민이 만나는 걸 조금도 바라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서 만나는 것만 생각하면 속이 뒤집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어디 그뿐일까. 농가 소녀와 함께 북연 사람을 상대해야 하게 됐으니, 이건 자신의 수준을 격하시키는 꼴이었다.
유곡요는 내키지 않아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녀가 먼저 북연 사람들에게 두 번이나 지는 바람에 대제를 난처한 상황에 빠뜨렸으니 감히 입을 열 수는 없었다.
불만을 초빙풍에게 쏟아내는 수밖에 없는 그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그에게 냉소를 지었다.
“방금 전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대답해 봐요.”
초빙풍의 부드럽고 점잖은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제민이 나타날 거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유곡요의 이 날 선 태도도 견디기 어려웠다.
지난번 유 재상에게 꾸짖음을 당한 후 초빙풍은 앞으로 자신이 걸어갈 길이 아주 고단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곡요는 유 재상의 지지를 얻은 후로 매일같이 그에게 비아냥댔다. 그는 온 집안이 가시가 돋친 감옥처럼 느껴졌다. 한림원에서도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들이 자신을 비웃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초빙풍은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저 대화를 나누었을 뿐, 저를 조롱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고 그 때문에 너무도 괴로웠다.
그럼에도 초빙풍은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이 유곡요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고 이 길을 걷지 않았다면, 황제를 알현하고 위로 올라갈 기회 역시 없었을 것이다. 몇 년만 더 견뎌 출세하면, 더는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될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묻잖아요. 대답 안 할 거예요?”
유곡요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쓱 쳐다봤다.
“아무것도 아니었소. 그저… 실언한 것뿐이오.”
초빙풍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속으론 너무도 괴로웠다. 이렇게 순종적인 대답이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 이런 자리에서 지켜야 할 예의와 규율도 모르나 보군요. 역시 시골 출신이라 그런가 보죠. 다음번엔 이런 자리에 데리고 오지 말아야겠어요. 안 그러면 우리 가문의 체면이 말이 아닐 테니까요.”
유곡요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냉랭한 목소리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바늘처럼 마음을 쿡쿡 찔러댔으나 초빙풍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꾹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 * *
채결이 밖으로 나가자 정선제는 얼른 옆에 있는 악사에게 즐겁고 경쾌한 곡을 연주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그도 잔을 들어 북림과 동안의 사신들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상석에선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주고받았고 하좌의 젊은 규수와 귀공자들은 엽연채가 불러올 사람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민이라고 했죠? 그 농가 소녀를 말하는 거겠죠?”
엽이채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농가 소녀요?”
포기가 작은 목소리로 되묻자 엽이채는 코웃음을 쳤다.
“누구겠어요. 작년에 정도 여승이 아픈 틈을 타 바둑 대결에서 이긴 다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거들먹거리고 헛소문을 퍼뜨린 사람 말이에요. 결국 적성대에서 대결에 응했던 곡요 소저가 단번에 이겨 버렸죠!”
“아아아! 생각났어요. 쯧쯧쯧. 그 사람이었군요!”
포기는 경멸하는 얼굴로 혀를 찼다.
“두 달 전에 남의 혼례식에서 소란을 피웠다가 결국 엽연채가 구했던 그…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파렴치한 사기꾼에 불과한 사람이잖아요!”
이런 대화는 점점 더 퍼져 나가 금세 자리에 있는 대제 사람들 모두가 알게 되었다.
전지신이 상석의 정선제에게 다가가더니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황제 폐하. 주씨 가문 부인이 추천한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옵니다.”
“어째서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냐?”
전지신은 목소리를 낮춘 채 적성대에서 있었던 일과 제민이 혼례식에서 소란을 피웠던 일을 정선제에게 아뢨다.
“주씨 가문 부인이 어째서 그런 자를 추천했는지 모르겠사옵니다. 하오나 그 제민이라는 자는 유곡요에게도 상대가 안 됩니다.”
정선제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전지신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반문했다.
“그럼 뭐 어찌한단 말이냐? 반대한다면 네가 유곡요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아내면 되지 않느냐? 그 아이가 아니면 누굴 내보낼 것이냐? 네 여식을 내보내겠느냐?”
그 말에 전지신은 표정이 굳어졌다. 여식들의 바둑 실력으로는 그런 자리에 내보낼 수가 없었다. 창피를 당하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식량을 잃게 되면 대죄를 짓는 것이었다.
지금 이 바둑 대결은 고생만 하고 좋은 소리는 못 듣는 일이었다. 거기에 북연의 여성 바둑꾼들은 실력이 대단했다. 전지신은 멋쩍은 얼굴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때 궁녀 한 명이 금실로 용을 수놓은 검붉은 모포를 가져와 대전 중앙에 깐 다음, 박달나무로 만든 바둑판 세 개를 들고 와 모포 위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각각의 바둑판 위에는 흑단으로 만든 작은 바둑통 두 개가 있었고, 그 안에는 검은 돌과 흰 돌이 보였다. 그리고 바둑판 양쪽엔 밝은 황색 부들방석이 놓여 있었다.
잠시 후 밖에 있던 환관이 목청을 높여 외쳤다.
“제민이 도착했사옵니다!”
이어 청초한 얼굴의 소녀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이 소녀는 청초하고 얌전하게 생겼는데, 양미간에 서려 있는 영기英氣가 가장 눈길을 끌었고 번쩍거리는 광채 또한 이목을 끌었다. 그녀는 무늬가 없고 앞섶이 교차하는 연녹색 유군에 머리엔 연꽃 모양의 보요만 꽂은 수수한 차림새였다. 장식에 달린 짧고 가느다란 술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려 청초한 분위기가 더욱 두드러졌다.
제민이 문 입구로 걸어가니 금빛 찬란한 대전이 보였고 안에는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줄이 앉아 있었다. 제민은 조금 긴장이 됐다. 특히 상석에 앉아 있는 밝은 황색 옷을 입은 존귀한 사람들을 보니 조금 겁이 나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이내 바로 초빙풍도 여유만만하게 이런 자리에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신이 같으니 자신이 그에게 질 이유가 없었다.
제민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상석에 있는 정선제 등을 향해 예를 올렸다.
“소인 제민이 황제 폐하를 뵈옵나이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그래. 일어나거라!”
정선제가 말했다.
초빙풍은 제민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 낯빛이 점점 하얗게 질렸고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이었다. 북연 사람들이 이렇게 뛰어난 바둑 실력을 갖고 있는데 그녀가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질 것이 분명했다.
‘아니, 반드시 져야 한다!’
“오늘 북연의 사자들이 바둑으로 벗을 사귀고자 하니 짐이 그 상대로 엽연채와 유곡요, 제민을 낙점했다. 너희들은 나가서 북연의 기사들과 바둑 실력을 겨뤄 보거라.”
정선제는 피곤과 한숨이 조금 섞여 있는 목소리로 일렀다.
엽연채와 유곡요도 이미 앞으로 걸어 나온 후였다. 세 여인은 한 줄로 서서 예를 올렸다.
“대제를 위해 전력을 다해 싸우겠사옵니다.”
북연의 여성 기사들도 앞으로 걸어 나와 정선제에게 예를 올렸다.
호나타가 자신들을 소개했다.
“저는 호나타이고 이쪽은 예인, 해주입니다.”
세 여인은 똑같이 금실로 수를 놓은 화려한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엔 은으로 된 보요를 꽂고 있었다. 보고 있으니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호나타는 평범하게 생긴 이십 대 여인이었고, 예인은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사랑스럽게 생긴 여인이었다. 해주가 나이가 제일 어린데 열여섯 살쯤 되어 보였다.
엽연채도 자신들을 북연에 정식으로 소개했다.
“전 엽연채이고 이쪽은 유곡요, 제민입니다.”
호나타는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와 나머지 두 사람을 훑어봤다.
“세 사람이 각각 한 조를 이뤄 대결을 하니 실력에 따라 상대를 나누죠! 우리 세 사람 중 해주가 가장 실력이 뛰어나고 내가 그다음이고 예인이 그 뒤라네. 해주가 조장, 내가 부조장, 예인이 조원을 맡을 것인데 그쪽은 어찌할 텐가?”
이에 엽연채가 제민을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조장, 제민이 부조장, 초 부인이 조원을 맡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