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14화 (414/858)

제414화

연회석은 남녀의 자리를 구분하지 않았고 집안사람들끼리 모여 앉았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오른쪽 뒷자리에 일렬로 차려진 기다란 탁자 세 개에 나뉘어 앉았다. 주 백야와 진씨가 한 탁자에, 주종과와 주묘서가 한 탁자에, 엽연채와 주묘화가 한 탁자에 앉았다.

주비양과 강심설은 전부터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 참석하겠다고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의 자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엽연채가 위를 올려다보니 양왕과 함께 앉아 있는 조앵기의 모습이 보였다. 크고 동그란 그 올림머리가 너무 부각돼 한눈에 딱 들어왔다.

‘뭐 하러 저렇게 큰 올림머리를 했단 말인가? 설마 눈에 확 띄라고 저런 건 아니겠지? 조앵기가 늘 사고를 치고 다니니 멀리서도 한눈에 딱 띄라고?’

엽연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그래, 뭐.’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엽연채는 시선을 천천히 유곡요 쪽으로 향했다. 유곡요는 초빙풍과 유 재상 뒤에 앉아 있었는데, 암담하고 몹시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환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굽히고 예를 올리며 만세 삼창을 했고 정선제는 자리에 앉으라고 면례해 줬다.

정선제와 정 황후는 상석에, 태후와 태자 부부는 그 좌우로 앉았다.

관현악기가 내는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가늘고 부드러운 듣기 좋은 소리였고 요란하지 않은데도 흥겹고 따스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북연 사신과 북림北臨 사신, 동안東安 사신이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자 하옵니다!”

밖에서 환관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 대제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가장 앞에 있는 사람들은 북연 사람들이었다.

선두에는 삼십 대 사내가 있는데 그는 사선으로 단추가 달린, 초록빛을 띤 금색 도포를 입고 있었고 외모 또한 시원시원하게 잘생겨 보였다. 그의 뒤로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여인과 열 명쯤 되는 관리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세 여인 중 두 사람은 바로 청휘원에서 유곡요와 바둑을 두었던 사람이었다.

선두에 서 있던 사내가 앞으로 다가가 공수하며 인사를 올렸다.

“북연의 태자 호막과 사신들이 대제의 황제께 하례하옵니다.”

그가 말하는 사이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붉은색 괘자褂子을 입은 사내 둘이 뒤에서 커다란 물건을 들고 걸어왔다. 그 물건은 기묘한 전통 문양이 수놓인 붉은색 비단으로 덮여 있었다.

북연 태자 호막이 붉은 비단을 벗겨 내자 용 모양으로 조각된 박달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은 입 안에 구슬을 품고 있었는데, 그 구슬은 그윽한 향기를 풍겼다. 침향목으로 만들어진 구슬이었다.

정선제는 생일 축하 선물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북연은 예전과 다름없이 좀스러웠다.

이런 박달나무는 대제에 남아돌았다. 입 안에 든 구슬 모양의 침향목과 조각 솜씨가 좀 볼 만하다지만 그래 봤자였다.

북림과 동안에서도 각각 청년 한 명과 중년 사내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북림의 3황자와 동안의 1황자가 대제 폐하의 생신을 감축드리옵니다.”

그들의 뒤에서도 누군가가 생신 선물을 들고 나왔다. 하나는 복숭아를 들고 있는 장수長壽의 신이 그려진 커다란 혈옥 도자기 병이었고, 다른 하나는 음악에 따라 덩실덩실 춤을 추는 원숭이였다.

정선제는 원숭이의 재롱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예전 같았으면 귀중한 선물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고 그저 신선함과 즐거움만 신경 썼겠지만 올해는 달랐다. 몇 년간 지속되는 전쟁 때문에 국고가 바닥이 났으니 어디 이런 관상용 선물들을 바라겠는가. 게다가 조금 후에 그들에게 답례품도 줘야 했다.

과거 교만하고 기백이 넘치던 대국이었던 대제는 이들의 초라한 선물을 보며 속으로 이들을 비웃고 답례품을 배로 돌려주었다. 대제의 재력과 종주국으로서의 도량을 한껏 드러내는 처사였다.

하지만 이젠 국고가 바닥이 났고 옥안관에 군량과 마초를 조달하는 것조차 문제가 되어 버렸는데, 답례품을 그리 내줄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자 정선제는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얼굴에는 미소를 띠었다.

“좋군. 선물은 모두 정리하고 그대들은 자리에 앉게나.”

북연, 북림, 동안 세 나라 사신들은 얼른 공수했다.

“황송하옵나이다. 폐하.”

그리 말하고는 환관의 안내를 받아 자리로 걸어갔다.

모두 자리에 앉은 후, 환관이 상을 내오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맛있는 요리와 좋은 술이 번갈아 상 위에 올려졌다.

다시 음악이 연주되자 무희들이 자리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한참 동안 술을 마셨고 무희들이 한 곡을 더 춘 뒤 자리에서 물러나자 부드러운 음악 소리만 남게 되었다.

이때, 북연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일어서더니 술잔을 들고 정선제를 향해 공수하고 말했다.

“폐하! 만수무강하시고 무궁한 복을 누리시옵소서.”

탁자 앞에 앉아 있던 정선제가 어리둥절해하며 보니 그녀는 평범한 차림에 이십 대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말쑥하게 생겼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평범한 외모였다.

“그대는…….”

북연의 태자 호막이 그녀를 소개했다.

“이 아이는 제 다섯째 누이동생인 호나타이옵니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했다. 방금 전 청휘원에서 유곡요와 바둑을 두고 뛰어난 기량을 보였던 사람은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던 소녀였다. 이십 대로 보이는 이 여인은 나중에 왔는데 생김새도 별로이고 기백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바둑 실력 또한 그 소녀에게 못 미쳤다.

엽연채는 이 두 여인 중 주목해야 할 사람은 어린 소녀라고 생각했기에, 이십 대의 여인이 북연의 공주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북연 공주 호나타가 말했다.

“대제 백관의 우두머리의 적장손녀가 대제 제일의 재녀라고 들었습니다. 바둑 실력으로 유명해 대제 제일의 여성 바둑꾼이라고 불린다고 하던데요. 저도 바둑 두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대제 제일의 여성 바둑꾼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오늘 이렇게 황제 폐하의 만수절에 참석하게 되었으니 그분께 가르침을 청하고자 하옵니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대전 안에는 정적이 흘렀고 대제 사람들은 모두 표정이 굳었다.

3국의 사자들이 오자 대제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였다. 방금 전 청휘원에서 유곡요가 두 여인과 바둑 대결을 벌였다가 결국 다 패배했는데 이 소식은 금세 대제 백관들의 귀에 전해졌다.

그런데 지금 북연 공주가 대제 제일의 재녀이자 최고의 여성 바둑꾼에게 또다시 가르침을 청한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방금 전 대제 제일의 여성 바둑꾼은 그들에게 패배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정말로 유곡요를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고의로 이러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고의일지도 몰랐다. 하나 설령 그렇대도 대제 제일의 여성 바둑꾼이 이미 북연 사람에게 졌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만약 청휘원 바둑 대결에서 패배한 일이 없고 지금 겨루다가 지게 되면 넓은 도량으로 ‘바둑 실력이 부족하니 패배를 인정해야겠군요.’라고 말하며 드높은 기개를 보여 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제의 바둑 대표는 이미 비공식적으로 진 상태였고, 북연 공주는 자신은 대제의 바둑 대표가 유곡요라는 걸 모른다는 듯 바둑 대결을 제안했다. 대국을 펼치기도 전에 패배를 인정하게 되면 기세를 꺾고 들어가는 격 아니겠는가.

정선제는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유 재상은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고 자신의 실력을 너무 과시하고 다니는 유곡요를 속으로 원망했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 바둑판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과 바둑 대결을 하려고 했다.

대제의 명문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래도 괜찮았다. 지면 졌다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하필이면 다른 나라 사람에게 진 것이 문제였다. 오늘은 황제의 생신이고 타국에서 사신들이 온다는 걸 분명히 알았는데도 그녀는 또 바둑판을 가지고 나와 실력을 과시하다가 이런 꼴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태자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북연 사람들은 항상 호전적이군. 올 때마다 이것저것 겨루자고 하는데 몇 년 전에 금琴 대결에서 우리 두베 공자에게 참패를 당하지 않았는가. 아직도 지는 게 두렵지 않은가?”

그 말에 대제의 신하들은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묘기화가 마지막에 남긴 평판과 태자와 엮이면서 남긴 오점이 저절로 떠오른 것이다. 신하들 중 일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코만 만졌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쭉거렸다.

‘묘기화를 언급하다니, 뻔뻔하기도 하지!’

호나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좌절을 겪을수록 점점 더 용감해진다고 하죠.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몇 년 전에 저희 북연 금사琴師 연주자들이 두베 공자의 모습을 보고 돌아온 후 실력이 크게 늘었습니다. 다음번에 기회가 되면 다시 와서 두베 공자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이 말이 나오자 대전 안에는 정적이 흘렀고 태자는 표정이 잔뜩 굳었다. 두베 공자는 이미 그의 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어떠신가요?”

호나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 대제 제일의 여성 바둑꾼은 오늘 참석하지 않은 건가요? 이거 참 아쉽네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대제 사람들은 전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그녀가 유곡요를 찾지 않았으면, 그래서 더는 망신을 당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호나타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내일 그분의 댁에 방문해야겠군요.”

그 말에 정선제와 태자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멀쩡히 살아 있는 유곡요를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게다가 보아하니 북연을 포함한 세 나라는 방금 전 청휘원 바둑 대결에서 패배한 사람이 대제 최고의 재녀 유곡요임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금은 능청스레 모른 척하고 있지만, 내일이면 이 북연 공주는 이렇게 말할 것이 분명했다.

“어제 바둑 대결에서 졌던 분이 대제 제일의 재녀이자 최고의 여성 바둑꾼이었나 보네요? 진 게 뭐 대수라고, 제가 찾는데도 그분은 사람들 사이에 숨어 대답도 하지 못하더군요.”

그리되면 대제는 체면이 한층 바닥에 떨어지게 될 것이었다. 유곡요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비겁하게 숨기나 하는 옹졸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게 될 테니 말이다. 대제는 이미 북연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걸 보여 주고 만 것이다.

정선제와 태자는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유곡요는 낯빛이 새파래졌고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면 대제는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 것이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망신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유곡요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잔뜩 경직된 얼굴로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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