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13화 (413/858)

제413화

많은 이들의 칭찬 속에서 두 사람은 이각 정도 바둑을 두었고 어느덧 대국은 중반에 이르렀다.

검은 옷의 소녀는 여전히 차분하고 느긋해 보였지만 유곡요는 낯빛이 조금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이야기를 하던 대제 사람들도 대부분 입을 다문 후였다. 그들 중에는 바둑을 아주 잘 두는 귀공자들과 규수들이 꽤 있었는데 이쯤 되니 유곡요가 열세에 처해 있으며 아주 제대로 밀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이제 겨우 중반에 이른걸요. 유곡요 소저는 아직 실력을 드러내지 않은 것뿐이에요.”

엽이채는 조금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요. 차분한 마음으로 천천히 두다 보면 만회하실 겁니다.”

한 귀공자가 거들고 나섰다.

유곡요는 심호흡을 했다. 지금 자신은 열세에 처해 있으며 검은 옷의 소녀에게 밀리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검은 옷의 소녀를 쳐다봤다. 소녀는 시종일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평온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득의양양한 표정조차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유곡요를 가장 압박하는 부분이었다.

‘침착해야 한다, 침착! 이제 겨우 중반에 이르렀을 뿐이고 실력을 발휘할 여지가 많으니 반드시 역전승을 거둘 것이다.’

유곡요는 자신을 격려하며 금세 마음을 다잡고 더욱 신중하게 바둑을 두었다.

하지만 두면 둘수록 유곡요의 표정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열세에 처한 그녀의 상황에 반전이 일어나기는커녕 더욱더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에 있던 귀공자와 규수들은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졌고 이 상황이 아주 마뜩지 않았다. 보아하니 판세를 뒤집기란 몹시 어려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각쯤 지나자 두 사람의 대결은 확실히 판가름이 났고, 귀공자와 규수들은 전부 침묵을 지켰다. 착 가라앉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은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유곡요는 청초한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고 이마에선 땀방울이 천천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몹시 지쳐 보이던 그녀는 결국 고개를 숙이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결과를 받아들였다.

“제가… 졌네요.”

그 말에 대제의 귀공자와 규수들은 모두 낯빛이 확 변했다.

대국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유곡요 입에서 졌다는 말이 나오자 순간 창피함과 굴욕감이 곱절이 되어 밀려왔다.

하필 유곡요는 바둑 실력으로 유명한 대제 최고의 재녀였고, 대제 제일의 여성 바둑꾼이라고 불렸다. 유곡요는 사실상 대제 전체의 얼굴이었는데, 그런 유곡요가 패배한 것이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그 검은 옷의 소녀는 우쭐거리지 않고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녀가 겸손하고 예의 바를수록 유곡요는 마음이 더욱 편치 않았다.

“와, 바둑을 정말 잘 두네요!”

이때, 갑자기 누군가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검은 옷을 입은 또 다른 여인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유곡요의 상대와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이 여인이 좀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녀는 이십 대로 보였는데, 외모가 청초했다.

“언니, 왔군요.”

검은 옷의 소녀는 고개를 들더니 다가오는 여인을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동문同門임이 틀림없었다.

그 검은 옷의 여인은 소녀 옆에 앉아 바둑판을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유곡요에게 말했다.

“소저도 바둑을 아주 잘 두는군요. 마음 아파할 필요 없습니다. 이 아이는 저희 북연 제일의 여성 바둑꾼이거든요. 제 후배인데 바둑 실력이 저보다 더 좋아요.”

이 검은 옷의 소녀가 북연 제일의 여성 바둑꾼이라는 말에 유곡요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차마 자신도 대제 제일의 여성 바둑꾼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주위에 있던 대제 사람들도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저. 전 소저의 기풍棋風(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나타나는 기사棋士의 독특한 방식이나 개성)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저랑도 한 판 두실래요?”

검은 옷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권유했다.

그 말에 유곡요의 청초한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방금 전 받은 충격 때문에 바둑을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진심으로 대국을 요청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품위를 잃어버리는 셈이었다.

게다가 북연 여인 한 명한테 졌다고 또 지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지금 바로 한 판을 이기게 되면 자신의 체면뿐만 아니라 구겨진 대제의 체면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자 유곡요는 또다시 자신감이 충만해졌고 대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 수 가르쳐 주세요.”

“언니, 여기 앉아요.”

검은 옷의 소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검은 옷의 여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검은 옷의 여인은 자리에 앉았고 유곡요는 그녀와 바둑돌을 쥐고 색깔을 맞추는 방법을 통해 이번에는 검은 돌을 잡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눈 후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바둑알을 스무 번에서 서른 번쯤 놓자 유곡요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검은 옷의 여인은 확실히 방금 전 그 소녀보다는 바둑 실력이 좋지 않았다.

‘이번에는 신중하게 임해 반드시 이길 것이다!’

유곡요는 심신을 안정시킨 후 천천히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는데 대국이 중반에 이르자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 또다시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아직 만회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다시 스무 번에서 서른 번쯤 두고 나니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유곡요는 낯빛이 싹 변했다.

‘설마 또 졌다는 말인가?’

그녀는 필사적으로 만회하려 했지만 결국 또 지고 말았다. 낯빛이 새파랗게 질린 유곡요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졌네요.”

대제 사람들은 안색이 싹 변했다. 어떻게 또 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체면이 바닥에 떨어져 뭉개진 기분이들어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결국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체면을 제대로 구긴 유곡요도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두 판의 바둑 대결 때문에 청휘원의 분위기는 조금 어두워졌다. 전력을 다해 조성해 놓은 화려한 분위기가 고작 바둑 대결 때문에 착 가라앉아 침울해졌다.

“유곡요 소저가 졌네요!”

상관운은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과 기가 팍 꺾인 유곡요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상관운은 줄곧 유곡요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은 최고의 명문가 규수이기에 늘 서로 비교하며 경쟁해 왔다.

유곡요는 대제 제일의 재녀이고 상관운은 대제 제일의 미녀였다. 두 사람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는데 지금 유곡요가 바둑 대결에서 패배하니 상관운은 좀 고소한 기분이 들었다.

반면, 원남옥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유곡요는 대제의 얼굴이지 않은가!

조앵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엽연채를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호숫가로 가요.”

하지만 조앵기는 전에 호수에 빠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호숫가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석가산으로 향했다.

* * *

청휘원 일은 금세 황제의 귀로 전해졌다.

궁침宮寢(황제가 거처하는 궁)에 있는 정선제는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때에는 빨리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는 대제의 황제이고 때마침 북연 등 타국의 사람들이 대제에 왔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는 대국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타국의 사신들이 그에게 알현을 청한 뒤에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북연의 사자使者가 청휘원에서 바둑 대결을 펼쳤는데, 대제 측이 연달아 두 번을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선제는 화가 나 수염이 다 삐쭉삐쭉 곤두설 것만 같았다.

“북연이 무슨 뜻으로 그리했다는 말이냐? 식량 이야기는 어찌한단 말이냐!”

정선제는 식량을 빌리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아직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는데 그들이 대제를 깔아뭉개며 잔뜩 위풍을 뽐낸 것이었다. 바둑에서 패배하여 비웃음을 사게 됐는데 대제가 북연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견제를 받게 될 수도 있었다.

대제는 아직 그 정도로 무너지지 않았다!

옆에 있던 채결이 새파란 얼굴로 말했다.

“폐하, 곧 연회가 시작됩니다.”

정선제는 그제야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청휘원은 유곡요가 바둑 대결에서 두 판이나 져 버린 일 때문에 분위기가 좀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나랏일에 신경을 쓰는 대제 사람들은 우울한 얼굴로 서 있었고, 태평한 성격이거나 자기 일만 신경 쓰는 사람들은 여전히 즐겁게 놀고 있었다.

북연 사람들과 또 다른 두 나라의 사자들은 연회를 맘껏 즐기며 이따금씩 재미있는 일로 하하호호 큰 웃음을 지었다.

이때, ‘꽹’ 하고 큰 소리가 울렸다. 궁 안의 라鑼가 울린 것인데 이는 국연國宴(나라에서 국빈들에게 베푸는 연회)이 시작됐으니 사람들에게 궐 안으로 들라는 신호였다. 이런 국연은 늘 웅장한 대전에서 치러졌다.

엽연채와 조앵기 등은 물가에 지은 정자에서 물고기를 보고 있었는데, 라 소리를 듣더니 얼른 사람들과 함께 대전으로 향했다.

그들이 청휘원을 나오자 주종과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다정한 얼굴로 원남옥을 쳐다보며 알은체했다.

“남옥 소저!”

엽연채는 입을 빼쭉거렸고 원남옥은 역겨워서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원남옥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역겨우니까 가까이 오지 마시죠?”

그 말에 주종과는 낯빛이 확 변했다.

“소저, 우린 오랫동안 정혼한…….”

“오랫동안 정혼한 사이인데 그쪽에게 파혼당하지 않았나요?”

원남옥은 경멸이 가득한 얼굴로 이치를 따졌다.

‘오! 촌철살인! 예전보다 훨씬 보기 좋은데!’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었다면 엽연채는 원남옥이 다른 사람과 뒤바뀌었다고 생각했을 만큼 달라졌다. 과연 신분은 한 사람의 언행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였다.

주종과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자신을 쳐다보는 엽연채의 조롱 섞인 눈빛을 보니 더는 이곳에 남아 있기 부끄러워 얼른 돌아서서 떠났다.

엽연채는 정말이지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주종과의 낯짝이 보통 두꺼운 게 아니라 성벽에 견주어도 될 정도니 과연 비 이낭의 자식다웠다.

“가죠!”

상관운이 말했다.

엽연채 일행은 백옥이 깔린 널찍한 큰길을 따라 이리저리 걸어가다가 마침내 대전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한 무리의 환관들이 서 있었는데 일행을 보더니 얼른 다가와 공손히 자리를 안내했다.

엽연채는 조앵기 등과 흩어진 후 대전 안으로 안내를 받았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상석에는 금룡金龍이 날아오르는 문양이 조각된 의자와 탁자가 자리했고, 그 위에는 용과 봉황이 수놓인 비단이 깔려 있었다. 좌우 양쪽에는 연회석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용 문양이 조각된 기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태후와 태자가 앉는 자리였다.

3층 계단을 내려오니 양왕과 노왕 등 몇몇 황자와 공주가 앉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하좌와 뒤쪽에는 황실 종친과 공훈이 있는 귀족들이 자리했다.

오른쪽 제일 앞자리에는 유 재상과 육부의 상서 등 권신들이 자리했고 그 밑으론 다른 관리들과 귀족들이 앉아 있었다. 뒤쪽에는 공훈이 있는 후부의 귀족들이 몇 줄에 걸쳐 앉아 있었다. 대전의 중앙은 신하들이 황제를 알현하고 가무를 감상하기 위한 용도로 비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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