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2화
“아휴……. 이 올림머리는 누가 해 준 거야?”
엽연채는 손을 뻗어 올림머리를 만졌다.
“으……!”
조앵기는 아파서 외마디 소리를 내더니 얼른 손을 뻗어 올림머리를 잡았다.
“아파!”
“아픈데 왜 했어?”
할 말을 잃은 엽연채에게 조앵기는 눈꼬리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대꾸했다.
“양왕 전하가 이 머리를 하라고 하셨어.”
그 말에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이건 또 무슨 취미래!’
“우리 저쪽에 가서 놀자.”
조앵기는 금세 까르르 웃으며 엽연채의 손을 잡았다.
엽연채가 화원을 쳐다보니 여러 형태의 정자들이 들쭉날쭉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시를 읊거나 경치를 감상하거나 투호投壺를 하며 아주 시끌벅적했다.
그중에는 괴상망측한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옷차림을 보니 딱 봐도 대제 사람은 아니었다. 이들은 바로 조공을 바치러 온 북연을 포함한 세 나라의 사람들이었다.
조앵기는 엽연채를 끌고 백옥이 깔린 오솔길을 따라 햇빛에 반짝이는 호숫가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파란색 옷을 입은 한 소녀가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화려하고 귀티 나는 차림을 한 이 소녀는 엽연채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
엽연채는 그녀를 보자 순간 멍해졌다.
“설 소저… 아니, 원 소저라고 불러야겠군요.”
과거에는 설옥인이었지만 이제는 원남옥이 된 그녀가 둥글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엽연채는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역시나 사람은 신분과 자신감이 생기면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해요. 원 소저.”
“제가 감사해야 하죠.”
원남옥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부인이 절 말리지 않았다면 전 그 파렴치한 사람들 때문에 석가산에 부딪쳐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그럼 어떻게 지금처럼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겠어요.”
“오. 잘 지내고 있는 거예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저희 어머니는 아들 둘에 딸은 저 하나뿐이에요. 한시도 잊지 않고 제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셨는데 이제 제가 돌아왔으니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몰라요. 지금 제 혼사 때문에 조바심을 내고 계세요!”
“그런데 소저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원래 이름에도 ‘옥’ 자가 있었네요.”
“그런 게 아니에요. 제 본명은 원래 원남이에요. 그런데 ‘옥’ 자에 이미 익숙해져서 어머니 아버지와 상의한 후에 남옥으로 바꾸기로 했어요.”
원남옥은 싱글벙글 웃으며 알려 주었다.
과거를 굳이 깨끗이 지워 버릴 필요가 있는가? 이름에 ‘옥’ 자를 남겨 두어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과거에 억울하고 암담한 삶을 살았음을 알게 할 것이다. 지금 그녀는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하여 새롭게 태어났다. 이는 누구나 깜짝 놀랄 만한 특별한 경험이 아닌가.
“주씨 가문 셋째 부인.”
이때,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가 고개를 돌리니 보석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모란꽃이 수놓인 진홍색 옷이 이 여인의 미색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 사람은 바로 대제 최고의 미인이라 불리는 금위군 대장 상관수의 여식인 상관운이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엽연채 쪽으로 걸어왔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운은 까르르 웃으며 ‘그’ 화제를 꺼냈다.
“유곡요가 그런… 사람에게 시집갔죠. 쯧쯧. 들어 보니 부인이 그 제민이라는 소저를 구해서 데려갔다고 하던데요.”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네, 맞아요.”
상관운은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다. 이어 시선을 천천히 조앵기에게로 향하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왕비 마마. 안녕하셨습니까!”
“그래요. 그쪽도 잘 지냈죠!”
원남옥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맹하게 보이는 소저가 왕비란 말인가?’
그녀도 얼른 조앵기에게 예를 올렸다.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어서 일어나요.”
조앵기는 그리 말하고는 엽연채를 끌어당기며 그녀의 뒤로 숨으려고 했다.
원남옥은 궁에서 베푸는 연회는 한 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어 당연히 조앵기를 못 알아봤지만, 그래도 그녀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현 왕조에서 가장 젊은 왕비는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이 노왕비이고 다른 한 명이 양왕비였다. 노왕비는 거의 마흔 살이 다 되었고 양왕비는 겨우 스물 몇 살이라고 들었다.
‘그럼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바로 그 양왕비라는 말인가?’
좀 전에 봤을 때는 열네 살 정도의 어린 아가씨라고 생각했고 엽연채보다도 어려 보였다.
“저쪽이 시끌벅적한 것 같은데 함께 보러 가시지요.”
상관운이 한 곳을 가리키며 제안했다.
엽연채가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니 오래된 단풍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그 주위를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또 많은 북연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엽연채 일행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기도 전에 잘 아는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바로 엽이채였다.
엽이채는 엽연채를 보자 표정이 굳더니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본 것처럼 고개를 돌리며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엽연채는 냉소를 지었다. 그녀도 엽이채를 상대할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엽이채는 입만 열었다 하면 조롱하는 말을 뱉는데, 대화는 무슨 대화인가.
“저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봐요!”
상관운이 말했다.
그러나 나무 주변은 물 샐 틈도 없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상관운은 앞에 있는 사람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좀 비켜 봐요.”
상관운은 대제 귀족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고, 금위군 대장인 상관수도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받고 있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보더니 친절하게 자리를 비켜 줬다.
그들이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보니 커다란 단풍나무 아래에 소녀 둘이 서로를 마주 보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엽연채 일행 방향으로 앉아 있는 사람은 검은 옷 차림의 소녀로,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며 평범하게 생겼다. 소녀는 양쪽으로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렸고 머리에 묶인 알록달록한 끈을 가슴 앞부분에 드리우고 있었다. 꽃과 새 문양이 수놓인 검은색 웃옷과 치마를 입고 반짝이는 은색 머리 장신구를 꽂은 모습이었다. 양손에는 각각 대여섯 개의 금팔찌와 은팔찌를 차고 작은 승마화를 신고 있었다.
독특한 차림을 보니 이 소녀는 북연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유곡요였다.
바닥에는 평범한 모포 한 장이 깔려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가운데에는 바둑판 하나가 놓여 있고 두 사람은 바둑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주위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북연 사람도 있고 대제의 귀공자와 규수들도 있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바둑 대결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저기 봐요. 바둑을 두고 있네요.”
조앵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그러네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원남옥이 다가와 물었다.
그녀는 과거 비천한 서녀에 불과했기에 한 달 용돈이 적었다. 그래서 좀 더 윤택한 생활을 위해 모든 시간을 구럭을 뜨거나 수를 놓는 데 썼고 이를 통해 용돈을 벌었다. 그러니 금琴을 타고 바둑을 두며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의 고상한 문화 활동을 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엽연채는 유심히 살펴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어요. 결과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속으로는 유곡요의 실력이 이 열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검은 옷의 소녀에게 못 미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유곡요에게 밉보일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대국 중인 두 사람이 대제 사람과 북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대제 사람인 자신이 어떻게 대제 사람이 질 거라는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잘못해서 정선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자신은 죄인이 되는 것이었다. 유곡요가 이긴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약 지기라도 하면 그녀가 입방정을 떨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설령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대제 사람이 질 거라는 말을 꺼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엽연채는 감히 평가를 입에 올리지 않고 묵묵히 대결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누가 이기고 질지는 잠시 후면 분명해지니 말이다.
엽연채가 고개를 숙이고 보니 바둑 대결은 방금 막 시작된 참이었다. 북연 소녀는 차분하고 느긋해 보이며 유곡요도 한가하게 여가 활동을 하는 느낌이었다.
북연 소녀는 검은 돌을 잡았고 유곡요는 흰 돌을 잡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돌아가며 한 수씩 바둑을 두었다.
처음 열 번을 둘 때까지 유곡요는 열세에 처해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유곡요도 아주 느긋해 보였다.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실력을 발휘해 상황을 바꿀 여지가 아주 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고 상대방이 우쭐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봐요. 유곡요 소저가 정말 잘 두네요!”
그녀를 칭찬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름 아닌 엽이채의 목소리였다.
“맞아요. 유곡요 소저가 북연 소녀의 길을 전부 다 막아 버렸어요.”
다른 누군가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이 사람 또한 엽연채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엽연채는 그녀를 본 지 꽤 오래되었는데 바로 장국후부의 포기였다.
엽이채와 포기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더니 엽연채를 쓱 쳐다봤다.
엽연채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제민 때문에 유곡요와 엽연채는 적이 되었고, 유곡요는 엽승덕을 이용해 엽연채 모녀의 평판까지 더럽혔다.
엽이채와 포기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 유곡요가 바둑을 잘 두고 있으니 자신이 울컥 분이 치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엽연채는 콧방귀를 뀌었다.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하시지!’
두 사람이 앞장서서 말하자 주위에 있던 대제 사람들도 잇달아 칭찬의 말을 꺼냈다. 하지만 북연 사람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제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질 것을 알기에 감히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