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1화
부름을 받은 양왕은 콧방귀를 뀔 따름이었다.
“제겐 계책이 없습니다! 태자 전하께 계책을 내라고 하시죠!”
정선제는 이마를 받치고 있던 손이 확 미끄러졌고 화가 나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태자는 표정이 확 굳어졌다. 자신에게 무슨 계책이 있겠는가!
양왕은 비웃는 눈빛으로 태자와 정선제를 쓱 쳐다봤다. 그는 이 두 사람을 확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변방에 있는 주운환이 떠오르자 이렇게 말했다.
“계책이 하나 있사옵니다.”
“말해 보거라!”
정선제는 양왕의 행동에 화가 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으나 꾹 참고 귀를 기울였다.
“식량을 빌리는 것이옵니다!”
“식량을 빌린다?”
양왕의 말에 태자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낯빛이 새파래졌다.
“양왕의 말은 북연 등의 소국에 식량을 빌려야 한다는 뜻인가?”
“그건 불가능하다!”
정선제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박에 그 의견을 묵살했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로부터 북연은 겁이 많고 약한 나라라 불리며 늘 대제의 비위를 맞춰 왔다. 하지만 최근 십여 년간 북연은 점차 풍요로워졌고 이에 따라 점점 더 거슬리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대제를 대하는 태도 또한 예전만큼 공손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제는 북연을 업신여기면서도 조금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부적절한 계책이옵니다.”
유 재상도 반대를 표했다.
“어떻게 저희 같은 대국이 그 비굴하고 약해 빠진 북연에 원조를 요청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저희가 북연에 고개를 숙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맞소! 절대 불가능하오!”
태자는 그리 말하더니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양왕을 쏘아봤다.
“그야말로 우리 대제의 체면이 깎이는 일이오.”
“체면을 깎이는 수준의 단순한 일도 아니옵니다. 지금 북연은 나날이 강대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북연과는 비교할 수 없사옵니다.”
병부상서 오봉이 염려를 내비치자 정선제와 태자 등의 얼굴에는 분노와 증오심이 가득 떠올랐다. 그들은 북연이 강해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봉의 말을 자르지는 않았다.
오봉이 이어서 말했다.
“북연에 식량을 빌리게 되면 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서북쪽 전쟁이 잠잠해지니까 또 서남쪽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상황에서 저희가 북연에 식량을 빌리게 되면 북연은 저희 대제의 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고 생각할 겁니다. 북연이 저희가 위급한 틈을 타 공격해 오면 대제는 협공의 위기에 빠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흥. 고작 북연 그 겁쟁이들이 어찌 우리 대제를 건드릴 수 있겠소!”
태자는 화가 나 큰소리를 쳤다. 그의 대제가 어떻게 북연 그 보잘것없는 나라의 위협을 받는단 말인가.
아무튼 대국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든 나라의 정세를 숨기기 위해서든 식량을 빌리는 계책은 어불성설이었다.
“양왕.”
정선제가 또 양왕을 쳐다보았으나 양왕은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태자 전하와 재상의 말이 일리가 있군요.”
정선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젠 세금을 부과하고 거상들에게서 돈을 받아 내는 쪽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럼 다음 달에 있을 만수절萬壽節은 어떻게 치러야 할까요?”
전지신이 다른 화제를 거론하자 태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명했다.
“예년과 똑같이 치르시오! 안 그러면 북연 그 조무래기들이 우리 대제의 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고 생각할 것이오.”
정선제는 심호흡을 하더니 머리가 좀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더는 못 버틸 것 같아 손사래를 쳤다.
“태자가 말한 대로 하거라. 오늘은 이만 하자꾸나!”
태자와 전지신 등은 얼른 공수했고 정선제는 채결의 부축을 받으며 그곳을 떠났다.
양왕도 황궁을 떠나 양왕부의 서재로 돌아왔다. 그가 박달나무 책상 앞에 앉자마자 언서가 얼른 서신 한 장을 가져왔다.
서신을 열어 본 양왕은 차가운 눈빛을 보이며 냉소를 지었다.
‘으흠. 나쁘지 않구나!’
* * *
호부와 예부 쪽은 추국연을 준비하며 다음 달에 있을 만수절도 준비했다. 권신들과 3품 이상 고관들의 집안은 전부 만수절에 참석하라는 궁첩宫帖을 받았다.
칠월 스무여드레에 열린 추국연은 그날 어서방에서 예상했던 것처럼 수확이 미미했다.
다시 닷새가 흘러 만수절이 열리는 팔월 초이튿날이 되었다.
엽연채가 저잣거리에 떠도는 소문을 들어 보니 정선제의 탄신일은 원래 오월 초닷샛날인 것 같은데 후에 어찌 된 일인지 팔월 초이튿날이 되었다고 한다.
확실히 오월 초닷샛날은 독월毒月 독일毒日이니 확실히 좋은 날이 아니긴 했다.
팔월 초하룻날, 요릿집에 있던 엽연채는 저 멀리 북연의 사신이 행렬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장명가를 지나 황궁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엽연채는 창턱에 기대어 행렬이 지나가는 모습을 쳐다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오, 공자께 조달할 군량과 마초가 도착했구나!’
엽연채는 북연의 행렬이 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정국백부에서는 진씨와 주묘서가 만수절에 입궁하는 일로 몹시도 분주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대가족이 나란히 동쪽 측문에서 엽연채를 기다리고 있었다. 엽연채가 도착해 보니 자신이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이었다.
주묘서는 아주 화려하고 귀해 보이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원보계元寶髻 머리에 비취 머리 장신구를 꽂아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로 귀엽고 아리따워 보였다. 그녀는 흐릿한 매화 문양이 들어간, 앞섶이 교차하는 연분홍색 상의에 수선화 문양이 들어간 은실로 지은 마면군을 입고 있었다. 청아한 분위기에 귀여움이 더해져 눈에 확 띌 정도로 매력적인 단장이었다.
주묘서는 치장에 꽤나 공을 들였고 진씨는 흡족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엽연채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낯빛이 어두워졌다.
진씨는 엽연채가 미웠지만 엽연채가 남보다 돋보이게 자신을 과시하려는 치장은 즐기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엽연채도 치장에 꽤나 공을 들였다.
엽연채는 맵시 있는 대금유군을 입고 있었다. 수수한 담홍색 상의와 오밀조밀한 붉은 꽃문양이 들어간 하얀빛을 띤 노란색 유선군을 입고 가느다란 허리에는 비단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치마에는 흰색 낙자絡子(물건을 담을 수 있는 장신구의 일종)와 금보禁步(치마가 바람에 날리지 않게 치마를 누르고 걸음걸이에 유의하게 하는 장신구의 일종)를 드리우고 가볍고 얇은 고급 천으로 만든 수홍색 피백披帛을 걸치고 있었다. 느긋한 걸음걸이의 그녀는 아름다운 빛깔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엽연채는 원래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 외모로 사람들의 기를 죽일 정도였는데, 이렇게 공을 들여 꾸며 놓으니 주변의 모든 색깔을 전부 흡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씨는 짜증이 확 치밀어 올라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셋째가 아주 곱게 차려입었구나!”
그러자 엽연채가 아름다운 눈으로 진씨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곱기는요. 큰아가씨도 아주 화려하시네요.”
“네 큰시누이는 아직 정혼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눈부시게 차려입어야 하지.”
진씨가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넌 이미 혼인을 했는데 이리 화려하게 꾸며서 뭐 하려고? 어서 가서 갈아입고 오거라.”
사내를 꾀어내려고 그리 꾸몄냐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싫습니다!”
엽연채는 딱 잘라 거절했다.
“이제 사람들이 모두 제 부군을 알아보니 곱게 치장해서 부군의 체면을 세워 줘야죠.”
진씨는 화가 나서 몸을 비틀거렸다.
“에휴. 시간도 다 됐는데 안 가고 뭐 하는가?”
주 백야는 한숨을 쉬었다. 뭘 또 이리 소란을 피운단 말인가.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연채야.”
이때, 제민이 꽃문양이 조각된 작은 상자를 들고 그녀에게 달려왔다.
“이걸 빠뜨리고 갔어.”
“아!”
엽연채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 상자를 혜연에게 건넸다. 상자 안에는 연지와 물분이 들어 있었다. 외출할 때 가지고 가야 할 물건이었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제민에게 당부했다.
“오늘은 집에 있어. 어디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응.”
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종과는 추길이 아니라 제민이 물건을 전달하러 온 걸 보더니 낯빛이 확 변했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제민을 노려보며 말했다.
“다, 단념하라고 했지! 난 널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다!”
제민은 입꼬리를 빼죽거렸고 엽연채도 정말이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이 사람은 남들 웃겨 주려고 태어났나?’
진씨는 이미 마차에 올랐고 주묘서와 주 백야는 그녀와 같은 마차를 탔다. 엽연채는 주묘화와 함께 다른 크고 화려한 마차를 탔다. 주씨 가문에서 최근에 구입한 좋은 마차였다. 이러면 외출할 때도 편하고 체면도 더 살릴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곧장 궁문을 향해 나아갔다.
반 시진 후, 마차는 드디어 궁전으로 들어섰고 동화문의 커다란 뜰 안에 멈춰 섰다. 사람들은 한 명씩 마차에서 내렸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꽤 많은 명문가 귀부인과 규수들이 이곳에 멈춰 선 마차에서 내리거나 짝을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비단옷을 입은 우아한 자태의 여인들이 북적거렸고 갖가지 장신구들이 눈이 부시게 반짝거렸다.
멀리서 보니 아주 떠들썩하고 호화로운 분위기라 전쟁으로 인해 국고가 텅 비어 버린 모습으론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엽연채와 진씨 등은 마차에서 내린 후 규수와 귀부인들을 따라 함께 안으로 걸어갔다.
이번에 청휘원淸暉園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손님을 맞이했는데 황궁에서 가장 크고 좋은 화원이었다. 여러 개의 문과 정자, 다층 건물들을 지나 마침내 청휘원에 도착하니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또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씨는 주묘서와 주묘화를 데리고 쿵쿵거리며 어디론가 가 버렸다. 엽연채는 그들이 또 명문가 공자를 낚으러 갔다는 걸 알고 굳이 따라가지 않았다.
“연채! 연채!”
그때, 누군가의 귀여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근처에 있는 석가산 옆으로 한 소녀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름 아닌 조앵기였다.
조앵기는 은실로 수놓은 흐릿한 꽃문양이 들어간 하얀빛을 띤 노란색 상의에 분홍색 제흉유군齊胸襦裙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제흉유군을 입고 있었고 색깔 또한 대부분 분홍색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머리 형태가 조금 특별했다. 웬일로 비선계飛仙髻 머리를 하고 있었다.
조앵기는 앞머리는 전부 쓸어 넘겨 밝고 매끈한 이마를 훤히 드러냈고, 머리카락을 묶어 양쪽으로 크고 동그랗게 머리를 틀어 올린 후 금실로 머리를 휘감아 놓았다. 미간에는 선홍색 복숭아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조앵기가 크고 동그란 올림머리를 이고 저렇게 껑충껑충 뛰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보는 엽연채가 다 지칠 지경이었다. 하필 조앵기는 얼굴도 작아서 더욱 조그맣고 가냘프며 애처롭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