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0화
정자를 지나가고 있는데 주종과가 자기가 잘 아는 몇몇 공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전에 또 설옥인 그 천한 여인을 봤네. 날 보자마자 울고불고하며 용서를 구하더군. 내가 어떻게 그런 여인을 아내로 맞을 수 있겠나!”
이에 그 몇몇 공자들은 설옥인을 희롱하며 주종과를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추어올렸다.
그런데 연회를 베푸는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에 가까워졌을 때쯤 극적인 상황이 일어나고 말았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연회가 열리는 영안후부 대청에 모여 있었는데, 어쩌다 설옥인이 넘어졌고, 그 바람에 종아리가 조금 드러나게 되었다. 그때, 영안후부 부인이 냅다 달려오더니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아이고, 내 딸아! 드디어 널 찾게 되었구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얼른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보자 영안후부 부인이 이리 답했다.
“17년 전 제 딸아이가 한 살이었을 때 제가 딸을 데리고 별장에 놀러 갔었어요. 그런데 가던 도중 산적을 만나는 바람에 딸아이를 잃어버리게 됐습니다. 그동안 계속 딸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 딸아이는 왼쪽 종아리에 초승달과 비슷한 모양의 붉은 반점이 있었는데 이 소저에게 그 반점이 있네요!”
설옥인은 마침 딱 열여덟 살이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영안후부 부인과 조금 닮기도 했다. 무엇보다 왼쪽 종아리에 실제로 초승달 모양의 붉은 반점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한쪽에 서 있던 주종과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쳐다보며 입을 떡 벌리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설 시랑侍郞 서제庶弟의 서녀가 실은 영안후부 적장녀였다고? 지금 장난해?’
알고 보니 그와 정혼했던 설옥인이 그가 그토록 바라던 후부의 적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파혼을 한 것이다!
주종과는 얼른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소저…….”
그러자 설옥인은 눈을 부라리며 경멸이 가득한 얼굴로 팩 쏘았다.
“누구세요? 구역질나니까 이러지 마시죠!”
지금 엽연채의 마음속은 이러했다.
‘푸하하하하! 웃다가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네!’
진씨와 주묘서 자매도 놀라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진씨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웃다가 배꼽이 다 빠지겠네!”
영안후부 부인은 설옥인을 데리고 먼저 자리를 떴다.
영안후부 사람들은 설씨 가문으로 찾아가 세상을 뜬 설옥인 생모의 유품에서 오래된 작은 옷을 한 벌 발견하게 되고, 그 옷이 바로 영안후부 적장녀가 실종된 날 입었던 그 옷임을 확인했다.
영안후부 부인은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고, 그다음 설옥인의 생모를 모셨던 어멈을 찾아가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그 어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때 일을 밝혔다.
그해에 설옥인의 생모는 잘못을 저질러 별장으로 쫓겨나 있었다. 당시 그 이낭은 한 살쯤 되는 딸아이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만 딸아이가 사고로 물에 빠져 익사하게 되었고, 이낭은 이 사실을 설씨 가문에 들켜 집안에서 쫓겨날까 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우연히 길에 쓰러져 있는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고 마침 이 아이도 한 살쯤 되어 보여 설씨 가문 딸로 삼았던 것이다.
이낭은 원래부터 총애를 받던 사람이 아니라 별장 안에서도 이들 모녀에게 크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이낭은 그렇게 아이를 제 아이로 숨겨 키웠다.
이삼 년쯤 지난 후에야 설씨 가문에서 이들 모녀를 떠올리고는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자라면서 모습이 많이 변하기도 하고 또 총애받지 못하는 서녀이기에 아무도 아이가 바뀐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이 아이는 설씨 가문 아이가 되었던 것이다.
영국후부 사람들은 설옥인을 데려가 적혈법으로 친자인지 확인했고 결국 혈육임이 증명되었다. 증인과 물증이 모두 갖춰졌으니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었다.
설씨 가문 서자의 서녀였던 설옥인이 한순간에 영안후부 적장녀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영안후부는 도성에서 별로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귀족이었지만, 어쨌든 설옥인도 후부의 적장녀가 되었으니 서제의 서녀였던 원래의 신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사람이 된 셈이었다.
영안후부에서 설옥인의 신분을 인정했다는 걸 알게 된 주종과와 비 이낭은 뼛속 깊이 후회가 되어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비 이낭은 영안후부 대문 앞으로 달려가 울부짖었다.
“옥인아, 옥인아. 내 착한 며느리야! 사월에 있었던 일은 그저 오해였다. 난 아직 네가 우리 종과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안다. 너희는 원래 정혼을 했던 사이니 당연히 혼인을 해야지!”
이 소동에 영안후부 하인들은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곧장 밖으로 달려 나와 그녀를 쫓아내며 큰소리를 쳤다.
“썩 꺼지지 못할까. 우리 가문에 설옥인이라는 사람은 없다. 우리 큰아가씨 존함은 원남옥이시다! 설옥인 같은 게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그쪽 가문과 정혼을 한 적도 없다. 설령 정혼을 했다 하더라도 이미 파혼하였는데 무슨 낯짝으로 이곳을 찾아온단 말이냐! 썩 꺼지거라!”
이 이야기를 알게 된 진씨와 주묘서는 숨넘어갈 듯이 웃어 댔다. 그들은 두 모자가 매일 그곳을 찾아가 망신당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럼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흡족할 것이었다.
하지만 비 이낭의 이러한 행동은 당연히 주씨 가문의 체면을 깎는 짓이었다. 비 이낭이 또 소란을 피우려고 하자, 주 백야는 얼른 사람들을 보내 그녀를 집으로 끌고 와 가둬 버렸다.
주종과는 꿈에서조차 후부의 적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에 들어 하는 명문가 적녀들은 전부 자신을 퇴짜 놓았기에, 저와 정혼을 했었던 설옥인을 더더욱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편지를 써서 설옥인에게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설옥인이 그를 상대할 리가 있겠는가? 그 역겨운 편지는 단 한 통도 영안후부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때부터 주종과는 집안의 큰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엽연채도 주종과와 비 이낭 일로 즐거워했다. 그녀가 못된 사람이라 웃음거리가 된 사람을 보며 즐거워한다고 흉보지는 마시기를. 이게 다 이 모자가 웃겨도 너무 웃긴 사람들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 * *
오늘 엽연채와 제민은 기분전환을 하러 함께 거리로 나갔다. 그런데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와 제민은 깜짝 놀라 얼른 한쪽으로 물러났다. 포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오더니 엽연채의 맞은편에 있는 한 요릿집 앞에서 멈춰 섰다.
포졸들은 몸을 돌려 말에서 내린 후 요릿집 옆에 있는 담벼락에 뭔가를 붙인 후 곧장 말을 타고 쏜살같이 그곳을 떠났다.
황방皇榜(국가 대사를 알리는 공고문)이었다.
백성들은 바로 그 주위로 몰려들었고 황방에 적힌 내용을 보더니 모두 낯빛이 확 변했다. 몇몇은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세금이 왜 또 오른 거야?”
“그러게 말이야. 작년에도 올랐는데 올해 또 올리겠다는 거야!”
“도대체 백성들은 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이유는 다들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서남쪽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이었다. 군수품이 부족한 줄은 알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자신들의 이익을 해치는 일이면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원망과 욕설을 퍼부었다.
엽연채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증세를 하는 지경에 이른 걸 보니 주운환 쪽 상황이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적어도 군수품과 군량, 마초가 부족한 것인데 이것들은 모두 승리를 거두기 위한 핵심 요소였다.
엽연채는 더는 거리 구경을 할 기분이 아니라 장수 상점에 가서 실을 좀 산 뒤 집으로 돌아가 『지지地志』를 몇 권을 펼쳐 봤다.
“아가씨.”
이때, 경인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송화 골목 그 집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좀 더 기다려 보시죠!”
“어째서?”
한쪽에 앉아 수를 놓고 있던 추길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경인이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집은 개만도 못한 것들이 살던 집이잖아. 더럽다고 꺼리며 사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어. 애초에 아가씨도 그 인간들을 내쫓으려고 하지 않으셨잖아.”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쫓아내 버렸다면 어떻게 엽승덕이 이 웃기는 상황을 겪게 할 수 있었겠니.”
쫓아내 버렸다면 은정랑은 아마 바로 허서를 데리고 다른 곳에서 지냈을 것이다. 엽연채는 은정랑이 따로 모아 둔 돈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됐다면 엽승덕은 은정랑이 날린 이 직격탄을 맞지 못했을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 누구도 은화를 잔뜩 가져와 집 같은 걸 살 엄두를 못 내고 있어.”
경인이 이리 말을 잇자 추길은 더욱 의아해했다.
“왜?”
“내가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몇 명 찾긴 했어. 하지만 서북쪽에서 2년 동안 전쟁을 하고 있고 이젠 서남쪽에서도 전쟁이 일어나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잖아. 국고는 이미 바닥이 났다고 하더라.
이제 옥안관에서도 언제까지 전쟁을 할지 모르는데 군량과 마초, 무기를 아직 다 확보하지 못했대. 게다가 증세를 한다는 이야기도 밖에 퍼졌고 황제 폐하께서는 추국연秋菊宴을 준비한다고 하더라!”
‘추국연?’
엽연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추국연은 무슨. 군수품을 마련하기 위해 거상들을 불러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행사지!’
“그런데 서북쪽을 위해 작년에 벌써 추국연을 두 번이나 열었으니 이번에는 열어도 효과가 없을지도 몰라!”
경인은 그리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 거상들이 집을 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이런 시기에는 감히 여유 자금이 있는 걸 드러내지 못하는 거지.”
엽연채는 집을 팔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닌 군수품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물건은 할머님께 일단 놔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팔겠다고 전해 드려야겠구나.”
그 물건들을 저번에 가지고 나왔지만 엽씨 가문 물건이므로 팔고 나서 받은 돈은 엽씨 가문에 돌려줘야 했다.
* * *
조정에서는 거상들을 부르기 위해 다시 한번 추국연을 열려고 했다.
정선제는 어서방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유 재상과 육부의 상서, 양왕과 태자는 하좌에 서 있었다.
“증세를 알리는 황방을 붙였습니다. 한데 최근 2년간 서북쪽 전쟁 때문에 재정 소모가 매우 커서 더는 증세를 할 수 없사옵니다. 그랬다가는 민중 봉기가 일어날지도 모르옵니다.”
공부상서 종병이 우려를 표했다.
“게다가… 올해 누리의 충해가 심각해서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할 듯하옵니다!”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외란外亂이 멈추지 않는 데다가 내란까지 더해지고 있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 정도가 아니었다.
정선제는 팔꿈치를 녹나무 책상 위에 기대고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일단 추국연부터 열게!”
전지신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지금 상인들이 모두 우는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도 제대로 바치지 못했으니 올해도 많지 않을 것이옵니다.”
정선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다른 방법을 제시해 보거라.”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들며 양왕을 불렀다.
“양왕!”
이 아들은 항상 머리 회전이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