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09화 (409/858)

제409화

엽승덕이 은정랑에게 배신당해 빈털터리가 됐다는 소식은 금세 엽연채의 귀로 들어갔다.

엽연채는 나한탑羅漢榻에 앉아 화본을 보고 있었고 경인은 한쪽에 서서 그녀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엽연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자업자득이지! 과연 은정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결말이야!”

“마님이 능성에 가 계신 게 아쉬울 따름이네요. 안 그랬으면 마님께서도 직접 보셨을 텐데요. 정말이지 진짜 볼 만했습니다!”

경인이 맞장구를 치는데, 혜연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가씨, 내일이 중원절中元節입니다. 저희도 명절을 보내려면 준비를 해야죠.”

“그래.”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는지 이렇게 말했다.

“참, 작년에 교외로 성묘를 갔었지! 올해도 가야겠구나! 추길아, 가서 준비를 하거라.”

그 말에 추길은 표정이 굳어졌다.

‘황야에 자리한 그 작은 묘는 셋째 도련님 생모의 묘잖아. 듣기론 그 사람은 기녀 출신이라던데! 셋째 도련님이 어렵사리 빛을 보게 됐으니 그 이야기는 가급적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은데……. 내일 마님이 또 얼마나 음흉하게 아가씨를 비웃으려고 할까.’

* * *

칠월 보름날 중원절이 되자 엽연채는 제수 용품을 준비한 후 교외로 성묘를 갔다.

황야에 도착해 보니 전과 마찬가지로 곳곳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푸릇푸릇했던 풀은 가을 찬바람을 맞아 거칠고 메말라 보이는 누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조그만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엽연채는 흰 바탕에 오밀조밀한 남색 꽃문양이 들어간 긴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다. 걸어가는 내내 치마가 바닥에 끌려 꽤 많은 풀잎들이 치마에 묻어 버렸다.

지난번 그 조그만 봉분 앞에 도착해 보니 어지러이 자라난 잡초들로 봉분이 뒤덮여 있어 금방이라도 파묻힐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위쪽에 자리한 목패木牌는 이미 색이 바래서 낡고 허름해 보였다.

그런데 목패 아래쪽에 조그만 화환이 놓여 있었다. 흰색, 빨간색, 파란색 등 갖가지 값싼 야생화를 엮어 만든 화환이 정적만이 흐르는 봉분에 생기를 조금이나마 불어넣어 줬다.

화환이 그녀가 존재했음을 아직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고 제수 용품을 내려놓았다. 혜연, 추길과 함께 주변의 잡초를 정리한 다음 향을 피우고 지전紙錢을 태운 후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는 성묘를 간 일을 진씨에게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외출을 했으니 다들 이를 알아챘을 것이고 엽연채도 일부러 숨길 생각은 없었다.

일상원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진씨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좌의 권의에 앉아 있던 주묘서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저 첩실이고 이낭일 뿐이잖아요. 셋째 오라버니의 모친은 어머니세요. 그런데 중원절에 고작 비천한 아랫것에 불과한 첩실의 무덤에 가서 향을 올리다니! 새언니는 어머니를 안중에도 안 두는 거예요! 이건 불효막심한 행동이라고요!”

그 말에 하좌에 앉아 있던 백 이낭의 표정이 굳어졌다. 좀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아유, 작년에 마님께서 셋째 도련님 내외에게 그곳에 가 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묘서는 좀 화가 난 눈빛으로 백 이낭을 쏘아봤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진씨도 기분이 언짢았다. 분명 자신이 작년에 그들에게 성묘를 가라고 했지만, 그건 엽연채 부부를 모욕하기 위함이었다. 엽연채에게 주운환의 생모는 그저 기녀에 불과하다는 걸 알려 주며 그녀가 주운환을 싫어하게 만들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효과가 하나도 없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자신이 나서서 그들에게 가라고 하면 그들을 모욕하는 일이 되지만, 그들이 스스로 가겠다고 나서면 이는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행동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년에는 성묘를 가라고 해서 갔고, 올해는 엽연채가 스스로 간 것인데 어떻게 트집을 잡겠는가? 그랬다간 체면을 구기기만 할 터였다.

진씨는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지만 엽연채를 어찌할 수가 없으니 그저 찻잔만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중원절이 지나자 날씨는 점점 더 쌀쌀해졌다.

주씨 가문은 주운환이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덕에 경사스럽고 평온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비 이낭은 지난번에 엽연채를 찾아가 주종과에게 후부의 적녀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가 제민이 주종과를 넘본다는 오해를 한 뒤론, 지레 겁을 먹어 다시는 엽연채를 찾아와 귀찮게 굴지 못했다.

하지만 주종과는 점점 나이를 먹고 있었다. 조바심이 난 비 이낭은 매파 고씨에게 혼처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매파 고씨의 화첩을 들고 뒤적거리다가 명문가 적녀를 몇 명 고른 후 매파 고씨에게 방문해서 혼담을 꺼내 달라고 했다. 매파 고씨는 표정이 굳었으나 일단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혼담을 꺼내러 갔지만 응하는 소저는 당연히 한 명도 없었다.

비 이낭은 화가 나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보다 못한 여종이 그녀를 타이르며 말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명문가의 적녀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서녀를 찾아보시죠!”

비 이낭은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고 그 말이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주종과가 펄쩍 뛰며 극구 반대했다.

“안 된다! 서녀일 바에야 차라리 한평생 아내를 맞이하지 않는 편이 낫다.”

주종과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과거 시험으로는 이미 주운환을 이길 수 없었다. 또 현재 주운환은 출정한 상태고 첫 전투에서 승리도 거뒀으니, 곧 가문에서도 동생에게 밀리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판국에 혼인에서도 뒤처지게 되면 자신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주운환에게 밀려 웃음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장가를 가지 않는 편이 나았다.

‘적녀! 적녀! 그놈의 적녀!’

자신은 반드시 고귀한 신분을 가진 아내를 맞이할 것이다! 반드시!

* * *

이튿날, 주종과는 큰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날은 영안후부永安侯府 노야가 회갑을 맞은 날이었다.

영안후부는 주씨 가문과 대대로 교분이 있는 집안이었다. 하지만 주씨 가문이 몰락한 후로는 왕래를 하지 않았는데, 이제 주씨 가문이 다시 일어서려는 모습을 보이자 다시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주묘서는 혼처를 구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혼처를 구할 기회가 있기만 하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리고 영안후부에선 특별히 따로 엽연채에게 초대장을 보냈기 때문에 엽연채는 가기 싫어도 가야만 했다.

아침이 밝자마자 엽연채는 진씨, 주묘서 자매, 주종과와 함께 문을 나서 영안후부로 향했다.

엽연채는 이곳에서 한동안 못 봤던 설옥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사월에 주운환의 장원 급제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주종과에게 파혼을 당한 후, 설옥인에게는 더 이상 혼담이 들어오지 않았다. 생모인 이낭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적모 또한 그녀를 신경 쓰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설옥인은 부쩍 여위었고 메마른 초목처럼 몹시 초췌해 보였다.

그녀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영안후부 화원에서 엽연채와 마주치더니 옅은 한숨을 쉬며 인사했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 오랜만이에요.”

“그렇네요.”

엽연채는 근처에 있는 석가산 옆에 지어진 정자를 가리켰다.

“우리 저쪽으로 가서 앉아요.”

두 사람은 정자로 걸어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엽연채는 설옥인과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 둘이서만 있으려니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엽연채는 할 수 없이 적당한 말을 꺼냈다.

“오늘 설씨 가문 소저들 중에선 소저만 온 거예요?”

그러자 설옥인은 낯빛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희 집안 소저들은 전부 시집가고 저만 남았어요…….”

엽연채는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나도 참 왜 하고많은 말 중에 왜 이런 말을 꺼냈을까.’ 하고 후회했다.

“오늘 제 몸종이 이곳에 와야 한다고 해서 온 거예요. 그 아이가 큰어머니께 한참을 부탁드려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거라고 했어요. 어쩌면 행운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하더군요. 에휴. 근데 저 같은 사람이 무슨 행운을 잡겠어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기가 팍 죽은 그녀의 모습을 보니 순간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옥인은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리더니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동안 둘째 공자께 몇 번이나 서신을 보냈어요. 하지만 공자는 제가 천하고 뻔뻔한 여인이라 공자께 어울리는 짝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주종과에게 서신을 보냈다고?’

엽연채는 더더욱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주종과가 멀리서 걸어오며 엽연채를 찾았다.

“제수씨, 어머니께서 제수씨를 부르십니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실죽거렸다. 그녀는 진씨가 자신을 부른다는 믿지 않았다.

설령 정말로 진씨가 그녀를 불렀더라도 녹지나 녹엽에게 말을 전했을 거고 두 사람이 올 수 없으면 주묘화를 보냈을 것이다. 이 많은 사람들을 제쳐 두고 무엇 하러 다 큰 사내인 주종과를 보냈겠는가.

주종과는 이곳에 설옥인이 있는 걸 보고는 일부러 이쪽으로 온 게 분명했다.

주종과는 설옥인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절대로 설옥인을 좋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주종과는 그동안 매파를 통해 혼담을 꺼내 봤지만 명문가 적녀들은 전부 그를 거절했다. 눈앞에 있는 설옥인은 그가 싫어하고 원하지 않는 여인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얼마 전에도 오로지 그만을 생각하며 그에게 서신을 보내 왔다.

한마디로 주종과는 자신감을 회복하러 이곳에 온 것이었다. 일부러 설옥인을 자극해 명문가 적녀들에게 거절당하며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려는 수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설옥인은 주종과를 보더니 파혼을 당했던 일을 떠올렸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또 눈물을 흘렸다.

주종과는 그 모습을 보더니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그녀를 대놓고 비웃었다.

“하하, 설옥인. 밖에 나와 돌아다닐 체면이 아직 남아 있나 보군! 오늘 날 보려고 일부러 여기 온 거겠지? 난 그쪽을 아내로 맞을 생각이 없으니 단념하라고!”

말을 마친 주종과는 매정하게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설옥인은 더욱더 펑펑 울었다.

“공자… 공자…….”

엽연채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고 몇 마디 말로 그녀를 위로해 준 후 그녀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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