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8화
그 말을 들은 엽승덕은 분노로 의식이 다 혼미해졌다. 목구멍에 피가 맺히는 듯한 느낌이 든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줄곧 자신을 아주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사랑은 아주 신성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은 다른 사내와 놀아난 여인을 받아 준 얼간이었던 것이다. 자신에게는 신성불가침의 사랑이 그녀에게는 그저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하찮은 것이었다.
“당신은 머저리야! 후부의 적자이면서 집에서 쫓겨나기나 하고! 나와 서는 이 집 집문서를 찾아내서 팔아 버린 다음 도망치려고 했어! 그런데…….”
말을 하던 은정랑은 원망의 눈빛을 번득이더니 새된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서가 또 당신들에게 연루되어 대리시로 들어가 매를 맞다가 불구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불구자를 데리고는 움직일 수도 없고 다른 사내에게 시집가기도 어려워졌지. 그래도 당신은 어쨌든 엽씨 가문 적자이고 혈육이니 그곳에 가서 돈을 좀 구해 올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럼 그 돈을 가지고 도망갈 생각이었지!
그런데 머저리는 역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거야! 그곳에서 돈을 긁어 오는 건 고사하고 공당으로 끌려가 매까지 얻어맞았지! 난 똑똑히 알게 됐어. 당신은 머저리라는 걸! 내가 왜 당신과 함께 배를 곯으며 고생을 해야 해?”
은정랑이 ‘머저리’를 세 음절로 끊어 가며 강조하자 엽승덕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울컥 피를 뿜었다.
“당신은 지금… 가난한 내가 미워진 거군……. 전에는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에잇, 퉷! 그걸 진짜라고 믿은 거야?”
은정랑은 엽승덕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내가 고생스럽게 살려고 했다면 왜 당신의 외실이 되려고 했겠어? 사실 전에는 당신의 외실이 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었지. 그런데 당신이 기어코 날 정실부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니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거기다 서를 위해 자기 친자식마저 해치려고 하다니.
쯧쯧, 나도 정말 당신에게 감탄했다니까! 물론 내 자신에게도 감탄했지. 내가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일 줄이야. 한 사내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 수 있다니!”
엽승덕은 또 핏물을 토할 것만 같아,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당장 꺼져! 이 천박하고 악독한 여편네 같으니. 썩 꺼져 버려!”
“꺼지라고? 내가 왜 꺼져야 돼?”
은정랑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더니 가슴을 쭉 내밀고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게 당신 집이야? 당신이 뭔데 날 쫓아내? 난 이곳에서 영업을 해야 돼! 못 견디겠으면 당신이 꺼지든가!”
그 말에 엽승덕은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그제야 이 집이 자신이 산 것이기는 하지만 집문서는 지금 엽연채 손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니 이 집은 결코 자신의 집이 아니며 자신에게는 은정랑을 쫓아낼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왜 이곳에서 나가야 한단 말인가? 거기다 자신은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몸에 걸친 이 허름한 옷 한 벌과 오늘 번 동화 몇십 냥이 전부였다. 이곳에서 나가면 어디에서 지낸다는 말인가? 나가면 길거리를 떠돌아야 할 뿐이었다.
“왜? 안 나가는 거야? 뭐 상관없어. 그럼 계속 지내든가! 여긴 방이 많으니까!”
은정랑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본채는 내가 써야겠어! 여긴 침상이 커서 영업하기에 안성맞춤이거든! 이곳에서 지낼 거면 곁채로 가!”
은정랑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틀어 손수건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정사의 흔적이 가득 남아 있는 방 안에 홀로 남은 엽승덕은 무너지듯이 주저앉고 말았다.
잠시 후, 그는 터덜터덜 곁채로 들어간 뒤 더는 밖으로 나가 노점을 펴지 않았다.
* * *
은정랑은 엽승덕에게 이 일을 들킨 후로 더욱 노골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매일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격렬한 몸부림을 쳤다.
엽승덕은 매일같이 이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오늘은 한 사십 대 사내가 은정랑을 찾아왔다. 시원스럽게 잘생긴 그는 꽤 비싸 보이는 의복을 입고 있었다.
은정랑은 그의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나리, 자주 오세요……. 매일 나리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난 이제 올 수 없네. 보름 후에 동주洞州로 돌아가야 해서. 우리 집안이 그쪽에서 장사를 하거든. 자네가 원한다면 함께 가세!”
등 나리는 말을 마친 후 그곳을 떠났다.
은정랑은 손을 펼쳐 조그만 금덩이를 쳐다봤다. 고작 이 금덩이 하나가 은화 오십 냥은 족히 된다는 생각에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물들었다.
“이 일이 이렇게 돈 되는 일인 줄 진작에 알았다면 더 일찍 했을 텐데! 돈을 충분히 벌었다 싶으면 은퇴한 다음 서를 공부시켜야지. 서가 과거 시험에 붙으면 난 귀부인이 되는 거야! 어디 지금 같은 이런 처지로 살겠어! 이게 다 무능한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어!”
그녀는 그리 맹비난하며 낭하에 서 있는 엽승덕을 매섭게 쏘아봤다. 엽승덕은 얼굴이 누렇게 뜨고 몹시 수척해 보였다.
“내가 나이가 많은 게 원망스러울 따름이지……. 진 마마가 다른 아가씨들은 영업이 아주 잘된다고 하던데! 그나마 예전에 얻었던 명성 때문에 손님이 좀 있던 건데, 이젠 그 열기도 식어 손님이 줄어들었어.”
은정랑의 말에 엽승덕은 또 한 움큼 피를 토했다. 전에 얻었던 명성이라니, 도성 사람들이 전부 다 아는, 도성 밖까지 퍼졌던 그 신음소리로 얻은 명성 말인가?
그녀는 자랑스러움과 아쉬움이 섞인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은정랑은 아무래도 나이가 많았고 얼굴도 보통보다 좀 더 예쁜 정도였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 중 어느 정도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신음소리가 끝내준다는 허황된 소문도 가라앉고 나니 왕 노인조차 그녀를 더 찾아오지 않았다.
은화 한두 냥을 들여 이런 곱상한 중년 여인을 찾을 바에야 차라리 기루에 가서 젊고 예쁜 아가씨들을 찾는 게 나았다.
은정랑은 정말이지 화가 나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직 노후 자금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등 나리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에게 아주 잘해 줬고 데리고 가겠다는 말도 했다. 은정랑은 자신에게 보이는 그의 정성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엽승덕이 잘해 줄 때 느꼈던 그 느낌과 똑같았다. 즉, 믿고 의지할 사람이 또 생긴 것이다.
등 나리를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공을 들여 그를 길들여 놓을 것이고, 그럼 그는 또 다른 엽승덕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되면 남은 반평생은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은정랑은 진 마마를 집으로 불러 등 나리에 대해 물어봤고, 진 마마는 아는 바를 들려 주었다.
“동주에서 소금 장사를 하는 분이에요.”
“소금 장사를 한다고?”
은정랑은 크게 기뻐했다. 소금장수가 전부 어마어마하게 부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부자이면서 자신에게 팔찌 같은 금은 장신구를 선물한 적은 없었다.
“부유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분인 거죠!”
진 마마는 소리를 죽여 말을 보탰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분이 마님에게 마음이 좀 있는 것 같더라고요. 마님을 데리고 돌아가고 싶다면서 저에게 몇 번이나 물어봤어요.”
은정랑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등 나리는 정말로 자신에게 잘해 줬다. 자신도 확실히 안착할 곳이 필요했다.
“그분이 정말 소금 장사를 한단 말이지?”
은정랑이 다시 물었다.
“아이고, 그렇다니까요! 제가 어떻게 마님을 속이겠어요!”
진 마마는 열을 올렸다.
“저희가 어떤 사이입니까? 게다가 마님을 속여서 제가 무슨 이득을 보겠습니까?”
은정랑은 일리가 있다 싶었다. 자기를 속여 봤자 이득 볼 게 없는 것은 확실했다.
또 만약 등 나리가 소금장수인 척 사기를 쳤대도, 어지간한 집안이기만 해도 괜찮았다. 만약 그 수준도 못 되는 가난한 집안이면 그를 뻥 차 버리고 다시 이 일을 하러 나오면 된다!
진 마마는 은정랑과 상의를 한 뒤 그곳을 떠났다.
은정랑은 이미 등 나리와 함께 떠나 다시 부잣집 마님으로 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진 마마를 보낸 후 은정랑은 다시 고개를 돌려 낭하에 서 있는 엽승덕을 쳐다보더니 냉소를 지었다.
“또 당신처럼 날 거둬 주겠다는 호구를 잡았어! 난 상팔자를 타고났나 봐! 어딜 가나 내 아들을 키워 준다는 호구가 있네!”
“이 빌어먹을 년! 죽어라! 죽어!!”
엽승덕은 벌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은정랑을 노려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냅다 달려가 그녀의 목을 조르려고 했다.
그러나 은정랑은 가볍게 그를 밀쳐 쓰러뜨리고는 엉덩이를 뻥 걷어찼다. 엽승덕은 오랫동안 흰죽과 채소 반찬만 먹어 이미 몸이 축날 대로 축났으니 기력이 없어 이젠 여인조차 상대할 수가 없었다.
“퉷, 여인 하나도 상대하지 못하다니. 머저리 같은 놈!”
은정랑은 바닥에 쓰러진 엽승덕에게 침을 뱉은 후 손을 탁탁 털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엽승덕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몸을 좌우로 흔들며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녀는 뻔뻔하고 악랄하며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어째서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 * *
며칠 후, 등 나리가 정말로 또 찾아왔다.
은정랑은 그와 함께 떠날 일에 대해 상의했고, 한밤중까지 상의를 하고 나서야 등 나리는 그곳을 떠났다.
이튿날 이른 아침, 은정랑은 짐을 꾸렸고 할멈 하나를 불러 허서를 마차에 옮겼다. 그녀가 보따리를 등에 지고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엽승덕은 쥐 죽은 듯 고요하고 쓸쓸하게 변한 집 안을 쳐다보며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그는 배를 주릴 정도로 가난했지만, 아직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단지 정랑이 자신을 위해 연극하는 것이기를 바랐다.
그러자 집 안에 어쩌면 그녀가 남긴 돈과 서신 같은 게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온 집 안을 구석구석 뒤져 봤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값나가는 물건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허서의 방 침상 밑에서 오래된 닭 뼈를 한 무더기나 발견하게 되었다.
닭 뼈를 쳐다보다가, 엽승덕은 또다시 넋이 나가 버렸다.
이 방에서 풍기는 닭고기 냄새를 몇 번이나 맡았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시치미를 뚝 뗐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배신하고 몰래 혼자만 먹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그동안 생계를 위해 밖에 나가 노점을 폈고 집으로 돌아오면 흰죽과 채소 반찬만 먹었다. 매번 그녀에게 왜 함께 식사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이미 먹었다고 말하고는 곤란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었다.
그때는 은정랑이 분명 식사를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조금만 먹은 뒤 죽을 다 자신에게 남겨 주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저를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한쪽에 숨어 몰래 혼자 먹었던 것이다.
자신은 그녀를 위해 밖에서 노점을 펼쳤는데, 그녀는 자신에게는 흰죽과 채소 반찬을 주고 한쪽에 숨어 자신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몰래 닭고기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엽승덕은 닭 뼈들을 보고 있으니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희망의 끈이 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난… 난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아아아악!”
영존거 전체에 그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동안 대체 무슨 헛짓거리를 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