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6화
눈 깜짝할 사이 저녁이 되었고 엽승덕도 노점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엽승덕이 문 앞에 도착하자 맞은편에 위치한 커다란 집 대문이 또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투실투실한 얼굴이 쑥 나왔다.
“오늘도 한 사내가 집으로 들어갔어요. 오늘 그 사내는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이웃집에 사는 영감이었어요!”
춘화가 표정만큼이나 음침한 목소리로 일러 주었다.
엽승덕은 낯빛이 확 변했다.
“이 빌어먹을 뚱보가 또 헛소리를 지껄이며 정랑을 헐뜯는구나! 내 널 가만 안 둘 것이다!”
그는 그리 말하며 자신의 신발을 벗어 춘화의 머리로 확 내던졌다. 하지만 움직임이 빠른 춘화는 얼른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구멍 난 엽승덕의 검은 신발만이 문짝에 부딪힌 후 미끄러져 내렸다.
이어 다시 대문이 열리더니 춘화가 머리통을 또 내밀고는 엽승덕을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못 맞혔죠! 헤헤헤헤!”
대문은 또다시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춘화는 그렇게 문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엽승덕은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런 파렴치한 놈은 내 살다 살다 처음 본다. 이 빌어먹을 뚱보야! 언젠간 그 살 때문에 죽는 날이 올 게다!”
그는 춘화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뚱보는 그저 자신들이 잘 지내는 모습이 눈꼴 시릴 뿐이었다. 그래서 헛소문을 만들어 말썽을 피우는 것이 분명했다.
엽승덕은 어두운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저녁 식사로 또 흰죽과 장아찌를 먹었다. 그러고 나서 자려고 침상에 누웠다가 은근슬쩍 은정랑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은정랑은 그의 손을 확 뿌리치더니 그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낮에 힘든 걸로는 부족해요?”
그러자 엽승덕은 표정이 경직되더니 이렇게 말했다.
“온몸에 기운이 넘친다오! 하하하!”
이 말은 전에 두 사람 사이에 오가던 밀어였다. 엽승덕은 지금 이 말을 꺼내며 예전처럼 웃음을 지어 봤지만 피곤함과 무력감이 느껴졌고 웃음 또한 더없이 어색할 따름이었다.
“기운이 넘치긴 뭐가 넘쳐요!”
은정랑은 냉소를 짓더니 혐오감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전 기운이 하나도 없거든요!”
엽승덕은 순간 멍해지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왜 기운이 하나도 없소?”
은정랑은 대답해 주기도 귀찮아 몸을 돌려 그를 등지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내가 왜 상대해 줘야 하지? 돈도 안 주는데.’
지금 자신은 몸값이 상당한데 어째서 이런 쥐뿔도 없는 궁상맞은 인간에게 잠자리를 해 주겠는가.
엽승덕은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춘화의 말이 떠올라 그만 오금이 얼어붙었다.
‘그럴 리가 없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그는 허튼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춘화의 말과 전에 허대실이 고함을 치며 했던 말, 그리고 객줏집에서 들었던 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그럴 리 없다. 정랑이 그랬을 리 없다!’
* * *
이튿날 아침, 엽승덕은 노점을 펴러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이웃집 왕 노인이 또 은정랑을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인색한 사람이라 은화 열 냥과 옥패 한 개를 줬던 처음과는 달리, 이번에는 고작 은화 두 냥만 주었다.
은정랑은 은화 두 냥을 받으며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싫다고 하면 이 은화 두 냥조차도 없어지는 것이었으니, 이 두 냥도 확실히 챙겼다.
그런데 이날 허대실도 은정랑을 찾아왔다. 담장 위로 올라온 그는 정원에서 함께 있는 그녀와 왕 노인의 모습을 보자 안색이 확 변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해 보니 노여웠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진작부터 엽승덕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그녀를 수차례 찾아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엽승덕과 함께했다. 그녀가 정조를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자신은 이미 무감각해진 상태였다.
그녀가 자신과만 잠자리를 한 것도 아닌데 더 많은 사내들과 잠자리를 한들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허대실은 은정랑과 왕 노인이 들러붙어 있는 모습을 보자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랑이 돈을 벌기 시작했구나!’
허대실은 더 이상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 아내로 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제 은정랑이 자력갱생하고 있으니 자신이 그녀를 먹여 살릴 필요가 없어졌다. 스스로 돈을 벌어 자신의 아들을 먹여 살리고 있지 않은가.
따지니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허대실은 그녀의 이런 행동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그녀 생각이 나면 은화를 들고 오면 된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지금처럼 그녀를 부양할 필요도 없었다.
허대실은 즐거워 보이는 두 사람을 보니 자기도 후끈 달아올라 얼른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정랑! 정랑!”
정원에서 밀치락달치락하던 은정랑과 왕 노인은 순간 경직되었고 고개를 번쩍 들어 보니 우락부락한 사내가 담장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은정랑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왕 노인을 홱 밀쳤다. 그녀는 허대실을 전혀 개의치 않았고 이 빌어먹을 마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그녀에게도 체면이란 게 있었다. 이 늙은이와 붙어먹은 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고,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더더욱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허대실이 또 담장 위에 앉아 그 모습을 쳐다보고는 또 소리를 지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허대실은 떠나기는커녕 담장에서 뛰어내리더니 그녀에게 다가왔다.
“정랑!”
“이…….”
은정랑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어이 형씨, 함께 할 텐가?”
왕 노인이 먼저 허대실에게 말을 건넸다.
“헤헤헤. 아저씨, 참 화끈한 분이시네요!”
허대실은 손을 비비며 두 사람 쪽으로 달려갔다.
해가 저물 때쯤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그곳을 떠났다.
저녁이 되자 엽승덕은 집으로 돌아왔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맞은편의 춘화가 머리를 문틈으로 빼꼼 내밀더니 음침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두 명이었는데 나중에 함께 떠나더군요…….”
그 말에 엽승덕은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너무 화가 나니 그에게 욕할 기운조차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은정랑은 평소처럼 허서의 방에서 그에게 서책을 읽어 주며 수를 놓고 있었다. 엽승덕은 허서의 방문 앞에 서 있었지만 결국 입을 떼어 그녀를 부르지는 못했다.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청으로 돌아와 흰죽과 채소 반찬을 먹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씻고 휴식을 취했고 이튿날이 되자 또 노점을 펴러 밖으로 나갔다.
춘화가 한 말 때문에 엽승덕은 요 며칠 정신이 맑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나올 때 먹을 챙겨오는 걸 잊고 말았다. 오후 미시쯤 서신을 써 달라는 손님이 왔고 그는 물건들을 뒤적이다가 먹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먹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사실 그는 이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먹고살기 힘든데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하여 엽승덕은 집으로 돌아왔고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왕 노인과 은정랑이 방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엽승덕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더니 안색이 확 변했다.
“정랑……? 이게 무슨… 왕 노인이…….”
“헤헤헤. 자네 왔는가!”
왕 노인은 이를 쑤시며 미소를 지었다.
“정랑. 이게 무슨…….”
엽승덕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왕씨 아저씨잖아요! 모르세요?”
은정랑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아무 핑계나 댔다.
“왕씨 아저씨가 수납장을 고쳐 주러 오신 거예요!”
“헤헤헤. 오늘 고칠 수납장은 다 고쳤네. 난 이만 가네! 하하하!”
왕 노인은 웃음을 지으며 그곳을 떠났고 엽승덕을 지나칠 때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엽승덕은 순간 멍해졌으나 결국 그를 따라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왕 노인은 그저 수납장을 고치러 온 것뿐이었다. 자신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바람에 지금 이 지경이 되어 버렸고, 정랑은 그런 저에게 감동해 마지않았을 텐데 어찌 배신할 수 있겠는가.
엽승덕은 잠시도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아 먹을 챙긴 후 황급히 집을 나섰다.
은정랑은 그가 떠나가는 방향을 쳐다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머저리 같은 놈!”
엽승덕은 밖으로 뛰어나갔고 근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인은 황급히 집으로 달려가 엽연채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파초나무 아래에서 장부를 보던 엽연채는 경인의 보고를 듣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송화 골목은 그 사람에게 가장 따뜻한 보금자리였는데 이젠 지옥이 되어 버렸겠구나!”
* * *
엽승덕은 ‘수납장’을 고치러 왔던 왕 노인을 마주한 후로 더욱 제정신이 아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으며 눈은 실핏줄이 다 터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다.
‘왕 노인은 정말로 수납장만 고쳤던 것이다! 정상적인 이웃 간의 교류였던 것이다!’
은정랑과의 잠자리가 꽤 만족스러웠던 왕 노인은 자신의 친한 벗인 전 노인과 사 영감, 뻐드렁니가 난 오 씨도 불렀다. 다들 육칠십 대 노인이었다.
맞은편에 사는 춘화는 번갈아 영존거로 들어가는 그들을 보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은정랑은 이 영감들이 역겨워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설령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창피해서 이런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런 영감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영감들은 인색하기 짝이 없어 한 번 상대할 때 겨우 은화 한두 냥을 줄 뿐이었다. 낯가죽이 얇은 그녀가 상대할 다른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그녀를 업신여기는 것이었다.
* * *
오늘 아침 은정랑은 단정하게 치장을 마치고 연지와 물분을 사러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문을 나서자마자 잘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오십 대로 보이는 아낙네는 화려한 옷을 입어 화사한 분위기가 가득했는데, 한눈에도 점잖은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은정랑은 그녀를 보고는 깜짝 놀랐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진 마마!”
“마님!”
진 마마는 반가워하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사이가 좋았던 두 사람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서로에게 다가서며 손을 맞잡았다. 은정랑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그때 자네를 집에서 내보낸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랬던 거네. 그때 팔지 않았다면 자네도 나와 함께 고생했을 걸세.”
“마님 마음을 제가 어찌 모르겠어요!”
진 마마는 은정랑을 완전히 이해하기에 그녀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마님이 절 팔아 제 살길을 터 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찌 지금처럼 잘나갈 수 있겠어요!”
“아, 자넨 지금 더 좋은 곳에서 일하는 건가?”
은정랑이 진 마마를 훑어보니 그녀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감은 정말 좋은 것이었고 머리에도 진짜 금잠을 꽂고 있었다.
진 마마는 헛기침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전 이제… 혼인을 중매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