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05화 (405/858)

제405화

“어찌 됐느냐?”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경인을 쳐다보니 그는 몹시도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검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은정랑이 정말로 허대실과 붙어먹었습니다.”

경인이 야릇한 표정으로 고하자 엽연채는 풉 웃음을 터트렸다.

“예상했던 바다.”

“가난이 그 사람의 본성을 낱낱이 드러내게 했네!”

제민은 냉소를 지었다. 그녀도 가난하게 지냈던 사람이기에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의 생각을 잘 이해했다.

“아끼고 살다가 사치하기는 쉽지만 사치하다가 아끼고 사는 건 어려운 법이지! 하물며 지독하게 가난했던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천당에서 지옥으로 다시 떨어졌으니 더 말할 것도 없어. 온갖 방법을 써서 위로 오르려고 발악을 할 거야.”

“쯧쯧. 곧 재미난 구경을 하게 될 테니 우린 기다리고 있자꾸나!”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돌려 제민을 쳐다봤다.

“한 판 더 할래?”

그러자 제민의 어여쁜 얼굴이 살짝 굳었다. 오랫동안 바둑을 두어 온 그녀였지만 오늘처럼 이리 처참하게 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 할래.”

“아가씨, 전 이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경인은 돌아서더니 쏜살같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경인은 송화 골목으로 돌아와 또 한참을 기다려 보았다. 그렇게 있자니 드디어 엽승덕이 허름한 탁자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엽승덕이 문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맞은편 집의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누군가 퉁퉁한 얼굴을 쑥 내밀었다. 맞은편에 사는 춘화였다.

“오늘 웬 사내가 아저씨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걸 봤어요!”

엽승덕의 표정이 확 굳었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춘화는 물러섬 없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믿든 안 믿든 그건 아저씨 마음이죠, 뭐! 게다가 그 사내가 아저씨 집을 찾아온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두 번째였어요. 매번 아저씨 집 담장 위로 올라가 그곳에 앉아서 ‘정랑, 정랑!’ 하고 불러댔고요!”

그는 가늘고 새된 목소리로 허대실의 말투를 흉내 냈다.

‘사내? 게다가 담장 위에 앉아 있었다고? 이게 무슨 뜻이지? 거기다 저렇게 역겹게 불렀다니!’

엽승덕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말은 정랑이 떳떳하지 못한 짓을 했다는 뜻인가? 아니다! 그,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엽승덕은 화가 나 고함을 질렀다.

“이 빌어먹을 뚱보 놈아. 감히 우리 정랑을 모독하다니! 한마디만 더 하면 내 그 주둥이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러자 춘화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서방질하는 여인의 남편인 게 그리도 좋다 하니 그럼 저도 신경 끌게요! 남의 호의를 개떡으로 여겨도 유분수지!”

그리 말하고는 ‘쾅’ 문을 닫아 버렸다.

엽승덕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욕을 퍼부었다.

“저 빌어먹을 뚱보 놈. 그 살 때문에 언젠간 죽는 날이 올 게다! 그저 정랑이 부러운 게지!”

그는 정랑이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짓을 했다는 것을 죽어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정원의 커다란 나무 아래 앉아 땅콩을 까먹고 있는 은정랑의 모습이 보였다.

“정랑.”

엽승덕은 허름한 탁자를 짊어지고 그녀에게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차갑고 어두운 표정으로 땅콩만 까먹고 있었다.

“방금 전에 맞은편에 사는 춘화가 말하기를…….”

엽승덕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은정랑은 냉담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힐끗 쳐다봤다. 그녀의 냉담한 눈빛에 엽승덕의 용기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입을 열긴 했으나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감히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이때, 은정랑이 성가셔 죽겠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아무것도 아니오…….”

엽승덕은 위축된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은정랑은 탁자 위에 있는 땅콩 껍데기를 쓸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닌데 거기 멀뚱히 서서 뭐 하는 거예요? 어서 그 허름한 탁자를 한쪽으로 치우지 않고 뭐 하세요. 바람을 막으니까 더워 죽겠잖아요!”

“어…….”

엽승덕은 공연히 싫은 소리를 듣게 되자 화가 나고 속이 편치 않았지만 감히 성질을 낼 수는 없었다. 이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은정랑마저 떠나 버리게 된다면, 자신은 뭐가 된단 말인가?

자신이 틀렸을 리 없었다. 분명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자신이 눈꼴사납고, 행복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니 배가 아파 정랑을 모함하는 것이다. 그렇다. 분명 그런 것이었다.

지금 자신을 대하는 정랑의 태도가 형편없긴 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떠나지 않았다.

엽승덕은 할 수 없이 허름한 탁자를 집 안 구석진 곳에 옮겨 놓은 후 방으로 돌아가 흰죽과 장아찌를 먹었다. 그런데 밥을 먹는 동안 춘화가 했던 말이 쉴 새 없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에 엽씨 가문에서 지낼 때 허대실이 문밖에서 떠들어 댔던 말들도 떠올랐다. 은정랑이 이미 그와 객줏집에서 잠자리를 했다는 그 소리 말이다. 그리고 은정랑이 분명히 허대실과 잠자리를 했다는 객줏집 점원의 증언도 뇌리에서 앵앵 울려 퍼졌다.

그날 자신도 그 객줏집에 있었다. 그러자 그때 들렸던 기척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맴돌았다.

‘사, 사실일 리가 없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 불가능하다고!’

저녁밥을 먹은 엽승덕은 대충 씻은 뒤 휴식을 취했다.

* * *

이튿날 아침이 밝자마자 엽승덕은 물건을 가지고 노점을 펴러 밖으로 나갔다.

은정랑은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무료하게 있자니 또 저도 모르게 허대실이 줬던 돈과 목걸이가 떠올랐다. 손으로 어림잡아 보니 다 합해야 고작 은화 석 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은정랑은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그가 몇 번 더 오면 은화가 더 생길 것이었다.

쾅쾅쾅!

이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정랑은 잰걸음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은정랑은 문을 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을 두드린 이는 육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한 영감이었다. 엽전 문양이 들어간 비단옷을 입은 그는 둥근 비취가 상감된 검은색 연모軟帽를 썼는데, 얼굴이 온통 주름투성이라 외모가 몹시도 추했다.

이 사내는 바로 이웃집에 사는 왕 노인이었다. 그는 도성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꽤 큰 장사꾼이었다.

왕 노인은 그녀와 육칠 년을 이웃으로 지내왔지만 은정랑은 늘 그를 업신여겼다. 당시 왕 노인은 돈 좀 많은 장사꾼이고 자신들은 명색이 후부의 귀족들이었으니, 자연히 그를 우습게 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늙고 못생긴 왕 노인이 늘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니, 혐오감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 후 허대실이 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일이 벌어지자 평판이 훼손된 자신들은 풀 죽은 모습으로 영존거로 돌아왔다. 그러자 주위 이웃들은 자신들을 실컷 조롱했다.

그리되고 나자 엽승덕은 왕 노인에게 돈을 빌리려 했는데, 그는 인색하기 짝이 없어 땡전 한 푼도 빌려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몰락했다며 비웃기까지 했다.

지금 그 왕 노인이 문 앞에 서서 은정랑을 쳐다보며 헤헤 웃었다.

“정랑, 지난번에 자네들이 내게 돈을 꾸려고 하지 않았는가?”

은정랑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속이 다 메스꺼웠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가 이러하니 감히 그에게 밉보일 수는 없었다. 실수로 밉보이기라도 하면 그가 돈을 좀 써서 자신들을 처절하게 괴롭힐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방금 전에 뭐라고 했지? 돈을 꿔 준다고?’

은정랑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뜬금없이 무슨 돈을 꿔 준다는 말인가? 그리고 꿔 주면 다시 갚아야 했다.

은정랑은 그가 혐오스러웠지만 그래도 얼굴에 미소를 띠며 친근히 말을 받았다.

“아유, 왕씨 아저씨였군요!”

왕 노인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순간 멍해졌다. ‘아유’, ‘왕씨 아저씨’라는 말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은가. 기루의 아가씨들이 딱 이렇게 그를 불렀다.

“정랑, 헤헤헤헤!”

왕 노인은 그녀를 쳐다보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지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저 바보같이 헤벌쭉 웃었다.

“왕씨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은정랑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아이고, 집이 정말 예쁘구먼!”

왕 노인은 그리 말하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마치 그녀의 집을 구경이라도 하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은정랑은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번에 자네들이 돈을 빌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왕 노인이 가늘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왕씨 아저씨, 마음은 고맙지만 이젠 괜찮아요!”

은정랑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괜찮을 리가. 승덕이를 좀 보게. 매일 허름한 탁자를 메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서신을 써 주는데 하루에 동화 백 냥도 못 벌지 않는가? 먹고사는 데 문제가 될 터인데? 게다가 자네 아들 또한 몸이 편치 않으니 돈이 필요하겠지!”

왕 노인은 그리 말하며 그녀에게 추파를 던졌다.

은정랑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지금은 필요 없어요. 그리고 아저씨 돈을 빌린다고 해도 제가 돈이 어디 있어서 빌린 돈을 갚겠어요.”

“에이, 우린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데 갚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는가. 내가 자네에게 빌려준다는데 갚을 필요가 뭐가 있어!”

왕 노인은 옷소매 안쪽에서 작은 은덩이 하나를 꺼냈다. 은정랑은 그 조그만 은덩이를 보자 두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족히 은화 열 냥은 나갈 듯이 보였다.

지금 엽승덕의 능력으로는 꼬박 일 년 동안 일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돈을 손에 쥘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은정랑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조그만 은덩이를 건네받았다.

“헤헤헤…….”

왕 노인은 웃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은정랑은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이미 그의 목적을 간파하고 있었다. 원래는 그를 문밖으로 밀어낼 생각이었는데 이 은덩이를 보니 그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왕 노인은 정말 너무도 추하게 생겼다.

‘어떻게 이런 사람과…….’

게다가 자신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은덩이었다. 어찌 돌려준단 말인가? 이렇게 번쩍번쩍한 것이 자신의 손에 올려져 있는데 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죄악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이미 허대실과 엽승덕과도 잠자리를 했는데 지금 이 사람과 잔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그저 돈을 빌리는 것뿐이다. 단지 갚지 않아도 될 뿐!

그리하여 은정랑은 두어 번 밀어내는 척하고는 왕 노인을 집 안으로 들였다.

반나절 내내 ‘아아’ 하는 신음소리가 나더니 왕 노인은 그곳을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역시 이거야말로 진짜지!”

맞은편 집에서 ‘끼익’ 소리가 나더니 살집이 붙은 머리 하나가 문틈 사이로 쑥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음침한 눈빛으로 영존거를 떠나가는 왕 노인의 모습을 쳐다봤다.

은정랑은 은화 열 냥이나 나가는 작은 은덩이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조그만 옥패도 하나 받았다. 이 옥패 또한 은화 열 냥에서 스무 냥 가까이 나가는 것이었다. 은정랑은 은덩이와 옥패를 쳐다보고 있으니 기쁨이 차올랐다.

‘돈 벌기가 이리 쉽다니!’

엽승덕이 일이 년을 노력한다 해도 벌 수 없을지도 모를 돈이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일이 년도 안 가서 그녀는 큰돈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되면 먹을 것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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