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4화
“동화 몇십 냥으로 쌀을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며칠이나 먹을까요!”
그녀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됐어요. 식사하세요!”
그 말에 엽승덕은 표정이 굳어졌고 속에서 분노와 괴로움이 느껴졌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와 보니 탁자 위에는 또 멀건 죽 한 그릇과 작은 접시에 담긴 채소 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이 소박하기 그지없는 저녁상을 보자 엽승덕은 구역질이 났고 더는 이런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지만 그에겐 돈이 없었다.
엽승덕은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고 반찬을 한 입 먹다가 안색이 싹 변해서는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채소 반찬은 그렇다 치고 어째서 기름과 소금도 없는 것이오?”
“방금 나리가 벌어온 그 돈으로 기름까지 드시고 싶은 거예요?”
그를 쳐다보는 은정랑의 눈빛은 혐오로 가득했다. 엽승덕은 그 눈빛을 보자 분노가 치밀고 마음이 괴로워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이건 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어째서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엽승덕은 그저 억울할 따름이었다. 그는 정신없이 밥과 반찬을 남김없이 다 먹은 후 젓가락을 집어 던지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곤 침상에 누워 잠자리에 들었다.
밖으로 나온 은정랑은 침실 창문에 비친 그의 모습을 쳐다보며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허대실이 그녀에게 줬던 돈이 또 떠오르자 내일 그가 온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 * *
이튿날, 엽승덕은 볼품없는 찐빵 두 개를 챙긴 다음 피로에 지친 몸을 이끌고 또 노점을 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은정랑은 식사를 한 뒤 허대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를 꼬박 기다렸는데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은정랑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고 그러면서도 내일도 그가 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됐다.
이튿날 미시未時(오후 1시~3시)가 되자 허대실이 담장 위로 올라와 그녀를 불렀다.
“정랑!”
은정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일부러 싸늘한 목소리로 그에게 호통을 쳤다.
“또 오다니!”
“못 올 게 뭐 있소! 정랑, 지난번에 약은 샀소?”
허대실은 그리 말하고는 훌쩍 담장 위에서 뛰어내린 다음 그녀 곁으로 걸어갔다.
“약은 무슨!”
은정랑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겨우 그깟 돈으로 약을 살 수 있겠어?”
그러자 허대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얼른 옷소매 안쪽을 더듬거리다가 동전 꾸러미를 꺼냈다.
“우선 이걸 받으시오.”
은정랑은 그가 또 은화 반냥을 건네자 불만스러워 이렇게 말했다.
“겨우 이 정도론 의원을 만나 봤자 아무 소용없어!”
“의원은 무슨. 내가 의원이오. 나한테 주면 내가 봐 주지. 헤헤헤!”
허대실은 추파를 던지며 실실댔다.
이에 은정랑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저를 희롱하는 사내가 역겨워서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꺼져! 누가 당신 돈 필요하다고 했어!”
“그럼 내가 당신에게 돈도 주고 상처도 봐 주지.”
허대실은 그리 말하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은정랑은 깜짝 놀랐고 역겨움이 극에 달했다.
그런데 이때 그의 목에 걸려 있는 조그만 금불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더니 더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밀치락달치락하며 서로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은정랑은 허대실이 역겨웠지만 그와 살을 섞은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저 조그만 금불상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정말로 그와 살을 섞는다 한들 뭐 어떠한가.
잠시 후, 신음소리가 영존거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영존거 옆의 담장에서 누군가의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오륙십 대로 보이는 주름투성이의 사내는 살집이 있어 얼굴이 꽤 컸다. 이 겉늙어 보이는 사내는 야릇하게 울리는 신음소리를 듣더니 극도로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신음소리인가?’
사월에 은정랑이 정안후부로 시집을 가자마자 곧장 일이 터졌다. 당시 허대실은 은정랑이 음탕한 여인이라 남정네들과 신음소리를 내며 잠자리하는 걸 즐긴다고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다. 그 후 여러 기루妓樓에서 은정랑의 행동을 흉내 냈고 이 이야기는 온 도성에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정랑과 엽승덕은 집안에서 쫓겨나 송화 골목으로 돌아왔다. 이웃집에 사는 이 왕 노인은 소문이 파다한 은정랑의 신음소리를 상상하며 침을 질질 흘렸었다.
하지만 그는 은정랑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 엽승덕을 보며 은정랑과 전남편 사이의 일은 그저 헛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전에 엽승덕을 떠보기도 했는데, 그때 엽승덕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건 모함이며 누군가가 그들의 체면을 깎아내리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왕 노인은 사내가 자신을 배반한 여인을 눈감아 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엽승덕의 말을 믿게 되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늘 그 신음소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기루를 찾아가 기생들의 신음소리를 들었지만 기루의 기생들이 내는 소리는 결국 흉내에 불과했다.
진짜 신음소리를 내는 은정랑이 이웃집에 살고 있으니 그는 옷 입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처럼 괴로워 죽을 것만 같았다.
더더욱 은정랑에게 집적거리고 싶었지만, 궁지에 빠진 쥐가 고양이를 물 듯 엽승덕이 실성하여 자신을 물어뜯을까 봐 감히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영존거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왕 노인은 이보다 더 흥분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신음소리였다. 과연 생동감이 넘치고 예사롭지 않았다.
왕 노인은 담장 위로 올라와 그 소리를 듣느라 그곳을 떠날 줄 몰랐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 소리는 멈추었다. 잠시 후, 허대실이 밖으로 걸어 나왔고 은정랑이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은정랑이 말했다.
“내가 요즘 악몽을 자주 꿔서 산에 가서 대사를 만나 뵈니 대사께서 더러운 것들과 만났다고 해요.”
“뭐요? 이거 큰일 아니오! 어찌하면 좋다고 하셨소?”
허대실이 깜짝 놀라 말했다.
“대사께서 말씀하시길, 보살이나 부처의 형상으로 된 목걸이를 지니고 있는 게 제일 좋다고 하시던데. 금은이 가장 좋다고.”
허대실도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마침 이 조그마한 도금 불상 목걸이를 차고 있으니 그녀가 이를 언급하는 것이었다.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들어 자신과 잠자리를 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자신은 그녀가 마음에 쏙 들었고, 수준 떨어지는 기방에서 놀아도 이 정도 돈은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시원스럽게 자신의 목에 건 조그만 목걸이를 풀러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럼 당신이 이걸 차오. 악귀를 쫓아내는 데 도움이 될 거요!”
그런데 목걸이를 건네받자마자 은정랑은 낯빛이 확 변했다. 금불상 목걸이가 예상외로 너무 가벼웠던 것이다.
허대실은 목걸이를 그녀에게 건넨 후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며칠은 시간이 나지 않을 것이오. 좀 지나면 다시 오겠소! 내 준비를 마치면 당신과 서를 데리러 오겠소.”
말을 마친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곳을 떠났다.
은정랑은 얼른 방으로 돌아와 기뻐하며 그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저 은 위에 금박을 얇게 입힌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마저도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런 목걸이는 고작 동화 몇백 개 정도의 값어치밖에 안 되니 아마 은화 한 냥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은정랑은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
‘이 죽일 놈의 마부!’
목걸이마저 값나가는 게 아니었다니, 역시나 뻔뻔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뭔가를 이용해 바꿔 온 물건이 아니니, 공으로 얻은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이내 들었다.
허대실이 문을 나선 후 우쭐거리며 그곳을 떠나자 맞은편에 사는 춘화가 그가 떠나는 모습을 쳐다보다가 다시 영존거의 대문을 쳐다보더니 집으로 돌아갔다. 근처에 있던 경인도 그가 떠나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쏜살같이 정국백부로 돌아갔다.
* * *
엽연채는 오늘도 제민과 함께 파초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제민은 흑옥黑玉 바둑알 하나를 손에 쥐고선 바둑판을 가득 채운 백옥 바둑알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졌다는 걸 직감한 제민은 결국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검은 돌을 바둑통에 집어넣었다.
“정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네!”
엽연채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법이지. 넌 누구에게 바둑을 배웠어?”
“초빙풍이 전에 공부를 하러 가면 스승님께 바둑을 배웠는데 집으로 돌아와서 날 가르쳐 줬어. 내게 바둑을 가르쳐 주긴 했지만 그 사람은 나와 바둑을 둘 시간이 없었어. 하루 종일 공부하느라 바빴으니까.
난 바둑 두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가끔 거리로 나가 영감들과 바둑을 두었어. 두면 둘수록 재미있더라. 근데 바둑으로 뭔가를 해 볼 생각은 안 해 봤어. 그저 재미있는 놀이로만 생각했지.”
제민은 이야기를 하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저도 모르게 행복하고 단출했던 생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일들은 이렇듯 주체할 수도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나랑 바둑을 뒀던 사람들은 내게 타고난 재능이 꽤 뛰어나다고 했어. 그러면서 더 배우라고 하더라. 하지만 이런 걸 누구에게 배우겠어. 여윳돈이 있다고 해도 기보 사는 데 낭비하기에는 아까웠지. 돈은 전부 모아 두었다가 초빙풍이 붓과 먹, 서책을 살 때 건네줬어.
그래도 나이 든 바둑 친구 둘이 내게 낡은 기보 몇 권을 선물해 줬어. 그 뒤로 쭉 바둑을 놀이로 삼아 사람들과 함께 두다가 나이가 좀 더 들고 나서 바둑 내기를 접하게 됐어. 돈을 벌기 위해 바둑 기술을 연마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지.”
엽연채는 천천히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전에 자신에게 바둑을 가르쳤던 스승은 바둑을 둘 때는 잡념이 없어야 하고 세속적인 것에 물들면 안 되며 명리名利 때문에 바둑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리하면 하수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절대로 발전할 수 없으며 영원히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아야만 하는 도리였다. 유곡요도 그렇게 마음을 수련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곡요는 돈과 명리를 위해 바둑을 둔 사람을 이기지 못했다.
이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천부적인 재능이 사실 더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참, 넌 바둑 실력이 이렇게 뛰어난데, 어째서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겨루지 않는 거야? 최고의 재녀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제민의 말에 엽연채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움직이기 귀찮아서!”
그 말에 제민은 피식 웃었다.
“아가씨!”
이때, 경인이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