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3화
엽승덕은 지난번 관아에서 태형을 받은 후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관아에서는 그들과 유씨 가문이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무거운 형벌을 내리지 않았고, 대충 몇 대만 때려 그들은 잠깐 아프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펄펄 날아다닐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었고 치료하는 데도 돈이 얼마 들지 않았다.
엽승덕과 은정랑은 유씨 가문이 절대로 엽연채를 놔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분명 그녀와 제대로 맞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 엽연채가 봉호를 받을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주운환이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엽승덕은 상류층 귀족들 틈에 끼어 있지 않아 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주운환이 큰 공을 세운 대단한 영웅이 되었다는 소식은 똑똑히 전해 들었다.
엽승덕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어째서 그 빌어먹을 것들은 벌을 받지 않는단 말인가!’
게다가 그 소문들도 전부 다 사라져 버렸다. 유씨 가문은 보복하지 않을 생각인 건가? 이렇게 그냥 포기한단 말인가?
그럼 자신과 정랑, 거기다 불구자가 된 허서는 그 빌어먹을 것들에게 도저히 복수할 방법이 없었다.
엽승덕은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절망감이 느껴졌다. 심지어는 절망이라는 느낌마저 또렷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깊은 피로감과 무력감만 느낄 뿐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현실이었다.
“나리, 집안에 쌀이 또 떨어졌어요!”
이때, 은정랑이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 들어왔다. 엽승덕은 안색이 확 변했다.
“왜 또 떨어졌다는 말이오? 지난번에 사지 않았소?”
“나리께서 말씀하는 저번이 언제인데요? 보름 전이요?”
은정랑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엽승덕은 그녀의 매몰찬 표정을 보니 혐오감이 느껴졌고 저도 모르게 또 온씨가 떠올랐다. 지난번 장명가에 갔을 때 화려한 옷을 입고 있던 온씨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그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전에는 한 번도 온씨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전에는 은정랑이야말로 선녀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무리 봐도 못나 보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다. 그저 온씨가 화려한 옷을 입었으니까 그래 보였겠지. 또 온씨가 아무리 아름다우면 뭐 하겠는가. 마음이 추악한데! 사람은 마음이 아름다워야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지!’
은정랑은 적어도 마음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전에 자신이 부유했을 때도 따랐고, 지금 이렇게 궁상맞은 꼴이 됐는데도 자신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집안에서 쫓겨나 찢어지게 가난한 처지가 되었지만, 아무리 고생스럽고 아무리 힘들어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못마땅해하는 은정랑의 매몰찬 표정을 보고 있으니 엽승덕은 지치고 힘이 들어 이렇게 말했다.
“노점을 펴러 가오! 지금 가겠소! 노점을 펴서 번 돈으로 먹을 것을 사 가지고 돌아오겠으니 걱정 마시오.”
말을 마친 엽승덕은 구석으로 걸어가 자신의 허름한 탁자를 들고 물건들을 등에 멘 다음 다리를 절룩거리며 문을 나섰다.
그는 익숙하게 자신의 허름한 탁자를 노점을 펴는 길모퉁이에 내려놓은 후 ‘서신 써 주는 곳’이라고 적힌 너덜너덜해진 깃발을 꽂았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엽승덕의 머리에서 ‘쾅’ 굉음이 울리더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 생활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 거지! 왜 제자리에서 멈춰 서서 엉켜 있는 기분이 드는 거지? 설마… 평생 이래야 하는 건가!’
* * *
한편, 엽승덕이 나간 후 은정랑의 얼굴에는 더욱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무능한 놈!’
더는 이런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엽승덕에게 품었던 마지막 한 줄기 희망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엽연채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 이제 복수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엽승덕은 무능한 인간이니, 그가 집안을 일으켜 부유해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뿐인가? 엽연채가 자신들을 계속 주시하고 있으니 엽씨 가문에서 그 어떤 것도 빼내 올 수 없었다.
고로 엽승덕은 끝났다. 그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은정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원망스러웠지만, 무력했다. 외모를 잘 가꾸기는 했지만 나이가 많은데 어디서 새로운 사내를 구하겠는가? 게다가 허서마저 불구자가 되었다.
“정랑!”
이때, 누군가의 그윽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정랑은 낯빛이 확 변해서는 돌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이…….”
‘비천한 마부!’
하지만 지난번 그가 준 은화 한 냥이 떠오르자 차마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왜 또 왔는데?”
은정랑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썩 꺼져!”
엽승덕은 이미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허대실보다는 훨씬 고귀해 보였다. 허대실은 비천한 마부이며 촌사람이니 평생토록 자신의 눈에 차지 않을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열등한 인간이었다. 아무리 궁상맞은 처지가 됐다고 해도 자신은 계속해서 우월한 사람이어야 했다. 허대실과 자신은 결단코 같은 수준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눈에 차면 자신의 수준이 거기까지 떨어지는 셈 아니겠는가?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남들보다 우월한 사람이어야 했다.
“정랑, 당신들 일을 알고 있소. 관아에 들어가 매까지 맞았다고…….”
허대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은정랑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벌컥 화를 냈다.
“꺼지라고!”
‘사람을 비웃으러 왔단 말인가!’
“아니, 정랑, 오해하지 마시오! 난 당신을 살펴보러 왔소!”
허대실은 그리 말하며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동전 꾸러미를 꺼냈다. 은화 반 냥 정도는 족히 되어 보였다.
“당신이 다쳤다는 걸 알고 있소. 이건 당신 약값이오.”
은정랑은 허대실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꺼낸 돈을 보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군침이 흘렀고 냉큼 돈을 받고 싶었지만, 체면 때문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이… 난 이런 건…….”
그녀는 거만하게 이런 것은 필요 없다며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정말로 그가 돈을 가지고 가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그곳에 서 있었다.
“정랑, 가져가시오!”
허대실은 담장 위에 앉아서 그 돈 꾸러미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 빌어먹을 놈!”
은정랑은 화가 나 호통을 치며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돈을 줄 거면 지난번처럼 집어 던지고 가 버리면 되지, 오늘은 왜 이런 식으로 건넨단 말인가? 이리하면 자신의 체면은 뭐가 된단 말인가.
은정랑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가 치밀었고 자신을 모욕하는 이 비천한 마부를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맞았다고 그가 돈과 함께 쌩 떠나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리되면 땡전 한 푼도 못 건지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체면상 또 건네받을 수는 없었다.
“아이고, 그거 참!”
이때, 허대실이 몸을 돌려 담장 위에서 뛰어내리더니 그녀에게 다가와 손에다 쥐여 주었다.
“정랑, 받으시오!”
은정랑은 이미 자신의 손에 쥐여진 돈을 보더니 그제야 냉랭한 목소리로 이렇게 호통을 쳤다.
“당신이 주는 이깟 돈, 난 필요 없거든!”
“왜 필요가 없소. 이렇게 다쳤으면서!”
그는 그리 말하며 슬그머니 그녀의 엉덩이를 만졌다.
“몸조리 잘하시오. 내일 또 올 테니!”
말을 마친 허대실은 빠른 걸음으로 밖을 향해 걸어갔고 문 앞에 도착하자 다시 고개를 돌려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 번 쳐다봤다.
은정랑은 제 딴에는 다정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그의 저질스러운 눈빛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가 내일도 돈을 주러 온다는 생각이 들자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속으로 은근히 기대했다.
그가 자신의 엉덩이를 만졌을 때 역겹기는 했지만,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좀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돈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허대실이 떠난 후 은정랑은 얼른 그 동전 꾸러미를 들어 올렸다. 정말로 고작 은화 반 냥밖에 되지 않았다.
‘이걸 가지고 뭘 할 수 있다고!’
게다가 지난번 그는 분명 은화 한 냥을 주었는데 이번에는 반 냥밖에 주지 않았다. 무려 절반이나 줄어든 것이다. 그러니 이는 손해를 본 것 아닌가!
은정랑은 자신이 손해를 봤다는 생각이 들자 점점 더 허대실을 놓아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그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엽승덕은 겨우 동화 몇십 냥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엽승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장사가 잘되어서 육십 냥이나 벌었소.”
그 말에 은정랑은 불쾌한 눈빛을 보였다.
‘동화 몇십 냥을 벌어 놓고 장사가 잘됐다고? 겨우 이 정도 돈에 기뻐하는 거야?’
그러면서 또 허대실이 자신에게 준 돈을 생각하더니, 멸시와 혐오가 섞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엽승덕은 자신이 번 돈 때문에 아주 기뻐하고 있었다.
전에 부유했을 때 그는 은정랑과 함께하는 미래를 수도 없이 꿈꿨었다. 은정랑을 아내로 맞이하는 걸 집안에서 반대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집을 떠나 은정랑과 함께 고생스러운 나날을 보내기로 했다. 그때, 앞으로 겪게 될 힘든 나날들이 어떠할지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분명 아주 고생스러운 나날이 되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 밖에서 부지런히 돈을 벌고 그녀는 집에서 그를 위해 옷을 빨고 밥을 지으며 상냥한 얼굴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고생한 뒤 그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맞이할 것이고, 그가 ‘오늘 장사가 잘돼 동화를 몇십 냥이나 벌었소.’ 하고 말하면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리, 정말 대단해요. 나리만 있으면 전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두렵지 않아요. 앞으론 이렇게 죽기 살기로 일하지 마세요. 그러면 제 마음이 너무 아파요.’라고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마침내 꿈꾸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밖에서 일하는 것은 정말로 고생스러웠고 결코 상상했던 것처럼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집으로 돌아온 그를 맞이하는 은정랑 역시 곰살맞은 모습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