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01화 (401/858)

제401화

저녁이 되자 매씨는 일상원에 밥상을 차리라고 했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여 커다란 원탁 앞에 가지런히 둘러앉았다. 탁자가 아주 컸는데 온 가족이 모두 함께 앉을 수 있도록 특별 제작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커다란 탁자는 직접 반찬을 집기가 어려워 여종들이 반찬을 놔줘야 했다.

여종들이 술과 요리를 내오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냉랭한 성격의 매씨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술을 몇 잔 따라 기분 좋게 들이켰다.

하지만 주 백야는 낯빛이 창백하고 정신이 아득한 모습이었다.

주운환이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감격스러웠다. 눈가가 살짝 촉촉해지고 가슴이 찡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과거 그가 옥안관에 있을 때 보았던 참혹한 전장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과거에 그도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봤고 성공의 기쁨도 맛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땅에 거꾸러졌을 때 느껴지는 고통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형제, 친척, 혈육 그리고 가장 친한 벗과 부하들이 자신 앞에서 참혹하게 살육되는 모습을 보며 고통에 절규하고 무너지는 고통을 무엇과 비할 수 있을까!

주 백야는 이런 생각만 하면 도저히 마음을 편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술잔에 술을 따르며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다 끝났어……. 이건 그저 시작에 불과해…….”

그러고는 술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주종과는 젓가락으로 자기 앞에 놓인 돼지고기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끊임없이 저주를 퍼부었다.

‘옥안관에서 반드시 져야 한다! 반드시 져야 해!’

주운환이 옥안관에서 패배하면 그 후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그에게는 아주 요원한 일이었고, 또 옥안관에서 패하더라도 대제 전체가 무너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주운환이 패배한다고 주씨 가문 처지가 지금보다 더 비참해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한들 뭐 어떠한가? 자신은 이미 초라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차라리 자신이 더 초라해지고 말지언정 주운환이 훨훨 날아오르는 꼴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주운환이 그곳에서 죽지 않는 것이 제일 좋기는 했다. 그는 주운환이 죽지 않고 불구자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와 평생 동안 자신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동안 난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하여 인생 최고의 정점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주종과는 그렇게 자신만의 환상 속에 흠뻑 빠져 이따금씩 이상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진씨와 주묘서는 어둡고 침울한 표정으로 구석에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엽연채만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제민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연신 깔깔댔다.

한편, 매씨는 오늘 저녁 잔칫상을 차린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안 그랬으면 진씨와 주종과 등의 질투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됐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짓고 있는 엽연채의 모습을 보니 그래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녀는 이 자리를 아주 즐기고 있지 않은가.

식사를 마친 후, 엽연채는 궁명헌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고, 제민은 서쪽 곁채에서 지내기로 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엽연채 등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정원의 파초나무 아래에 놓인 돌 의자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엽연채와 제민은 탁자 위에 바둑판을 놓고 함께 바둑을 두었다.

요즘 더위가 점점 물러가 날씨가 서늘해지고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자 엽연채는 정원에서 구럭을 뜨고 수를 놓거나 바둑 두기를 즐겨 했다.

그런데 이때, ‘아이고’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비 이낭이 손수건을 흔들며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뚱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주종과의 모습도 보였다.

“셋째 마님, 밤새 평안하셨어요!”

비 이낭은 안부 인사를 건네며 엽연채에게 다가왔다.

엽연채는 섬섬옥수로 백옥으로 만든 바둑돌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비 이낭을 보더니 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건이 없으면 찾아오지 않는 비 이낭이 여긴 무슨 일로 왔을까?”

엽연채가 이제 막 그녀 앞에 다가선 비 이낭과 주종과에게 면박을 주자 미소를 짓고 있던 비 이낭의 얼굴은 순간 확 굳었고, 주종과는 낯빛이 더더욱 어두워지더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말씀을 그리하세요!”

비 이낭이 뾰로통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 비 이낭은 정말 아무 용건 없이 절 찾아온 건가?”

엽연채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바둑판 위에 닿자 백옥 바둑알이 바둑판 위에 놓였다. 제민은 바둑알이 놓인 위치를 보자 순간 멍해지더니 이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의 말에 비 이낭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그게…….”

주종과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화가 나 비 이낭을 홱 노려봤다.

“요… 용건이 없는 건 아니에요. 셋째 마님께 사소한 부탁을 좀 드리고 싶어서요.”

“말해 보게!”

엽연채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바둑알 하나를 또 집어 들더니 제민의 어느 길을 막아야 할지 고민했다.

“마님, 마님과 셋째 도련님도 혼인을 하셨는데 종과 도련님 좀 보세요. 지금 혼담을 꺼내는 이조차 없어요. 아는 사람 중에 괜찮은 벗 혹은 친척 소저가 있는지 좀 보고 종과 도련님에게 소개해 주세요.”

비 이낭은 손수건을 흔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엽연채는 입꼬리를 삐죽거리더니 대번에 거리낌 없이 말했다.

“저런, 없네.”

그 말을 들은 비 이낭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싹 가셨다.

“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요! 알고 지내는 사람도 없다는 말씀이세요?”

엽연채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쓱 쳐다보며 말했다.

“비 이낭, 자네는 참 웃기는 사람이야. 둘째 도련님 혼처를 찾고 싶으면 곧장 매파를 찾아가면 되면 되고, 그것도 정 안 되면 어머님을 찾아가면 되지, 날 찾아와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그 말에 비 이낭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찾지 못했으니 이리 찾아와 부탁하는 것 아닙니까! 마님은 봉호를 받지 않았습니까? 어제도 궁에 들어가셨다고 하던데, 그럼 분명 고관과 귀인들을 아실 거 아니에요. 종과 도련님에게 적당한 사람 하나 소개해 주시면 되잖아요!

마님은 이런 일을 즐겨 하시지 않나요? 들어 보니 마님의 고모님도 마님이 중매를 해 주셨다고 하던데요.”

엽연채는 냉소를 지었다. 이 사람들 낯짝이 대체 어디까지 두꺼워질 수 있는지 한번 지켜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좋네. 둘째 도련님은 어떤 사람을 원하는가?”

비 이낭은 맞은편에 놓인 아치형 다리가 달린 둥근 걸상에 털썩 앉더니 솔직하게 조건을 댔다.

“뭐 딱히 어떤 사람을 찾는 건 아니고 셋째 마님 같은 분을 찾아 주시면 돼요.”

“나 같은 사람을 찾으면 된다니. 나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엽연채가 웃으며 반문하자 비 이낭의 표정이 조금 어색해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셋째 마님 같은 분을 찾아 주시면 된다니까요. 마님은 스스로가 어떤 분인지 모르신다는 말씀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마침 내가 아는 벗 중에 혼인 상대를 찾고 있는 사람이 있었네. 장국후부 포씨 자매인데 큰아들의 적장녀인 포모와 둘째 아들의 적삼녀嫡三女인 포기일세. 적장녀는 태자 측비 후보까지 올랐던 인물이네. 용모, 성격, 손재주 모두 아주 뛰어나지. 지금 혼인 상대를 찾고 있네!”

그 말에 비 이낭은 두 눈을 번쩍였다.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하나는 열일곱 다른 하나는 열다섯이네. 열일곱 살인 포모는 태자 측비 후보에 올랐기 때문에 혼인이 늦어진 거네.”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또 바둑알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쪽은 선을 보는 데 조건이 있네. 상대가 고관대작의 적자여야 한다는 거지!”

그 말에 비 이낭은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 종과 도련님 조건도 나쁘지 않습니다. 적자가 아니어도 뭐 어떻습니까? 셋째 도련님도 서자 아닙니까! 그때 마님도 셋째 도련님에게 시집오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 둘째종과 도련님은 안 됩니까?”

“저기요, 아주머니. 왜 자꾸 생트집을 잡는 거예요? 그때 연채가 정혼한 사람이 어느 집안사람이었는지 모르는 거예요?”

보다 못한 제민이 냉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셋째 마님이 우리 셋째 도련님을 못마땅하게 여기셨단 말인가?”

비 이낭도 지지 않고 냉소를 지었다.

그러자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 시비를 거시겠다? 그걸로 날 압박하려는 거구나!’

비 이낭은 득의양양하게 ‘흥’ 소리를 냈다.

‘감히 그런 걸로 내 아들을 업신여기려고 하다니!’

엽연채 또한 서자에게 시집온 처지이면서 감히 서자는 적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하다니, 이는 자신과 주운환의 체면을 깎는 말이 아닌가? 주운환이 이 이야기를 알게 되면 부부 사이에 불화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걱정은 안 드는 걸까?

“이낭은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착해서 인품만 보고 신분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보군?”

엽연채는 물으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비 이낭은 기가 차서 ‘퉷’ 침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줄곧 스스로를 철면피라고 생각해 왔는데 엽연채의 낯짝도 이렇게 두꺼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자기 입으로 스스로를 칭찬하다니.

비 이낭이 화가 난 목소리로 몰아세웠다.

“신랑이 도망가지 않았다면 원하지 않았을 거잖아요!”

“어머니…….”

주종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비 이낭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단 말인가!

“오, 둘째 도련님도 정상적인 상황에선 일개 서자는 적녀에게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고 계셨나 보네요.”

엽연채는 냉소를 지었다.

“비 이낭 자네는 무슨 용기로 도련님에게 고관대작의 적녀를 소개해 주려는 건가? 도련님이 고귀한 신분인가? 아님 과거 시험에서 진사로 합격했는가? 아니면 절세미남인가? 재능이 흘러넘치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인재인가?”

그 말에 주종과는 버럭 화를 냈다.

“제수씨, 이렇게 경박한 사람이었소? 꼭 공명과 관록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재능이 흘러넘치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인재여야 하오?”

“아, 알고 보니 도련님은 세속적이지 않은 깨끗한 분이셨군요!”

엽연채는 쯧쯧 혀를 찼다.

“혼인 상대에겐 이런 것들을 따지지 말라고 하면서 어째서 도련님은 혼인 상대의 출신을 따지는 거죠?”

주종과와 비 이낭은 표정이 확 굳어지더니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제일 역겨워요!”

제민은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내가 살던 동네와 읍에서 당신 같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봤어요! 지지리도 가난하고, 생김새도 출신도 별로이고, 한 달에 은화 한 냥도 못 벌면서 아주 우쭐거리며 스스로를 성실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미인들은 자기들처럼 성실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절대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말하더군요. 선녀 같은 미인들은 전부 부귀한 공자들만 좋아한다고 말이죠! 그러니 그런 미인들은 전부 허영에 들뜬 어리석은 자들이라고요.

그럼 그쪽 같은 사람들이 말 좀 해 보시죠. 왜 그런 미인들이 그쪽 같은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해야 하죠? 그런 미인들이 왜 멀쩡한 귀공자들을 마다하고 당신들처럼 쥐뿔도 없는 사람들을 선택해야 하죠? 두 개의 사과가 있다고 가정해 봐요. 사람들은 당연히 좋은 걸 고르겠죠. 누가 굳이 못난 사과를 고르겠어요! 그게 어떻게 뻔뻔하고 허영에 들뜬 행동이라는 거죠?

게다가, 귀공자들은요? 만에 하나 선녀 같은 미인들이 전부 그쪽 같은 사람들과 부부가 되면, 그럼 귀공자들은 어떤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나요? 당신이 선택하지 않은, 남아 있는 다른 여인들이요? 그쪽도 원하지 않는 걸 왜 귀공자들한테는 감수하라고 하는 거죠?

내가 묻고 싶은 건 능력도 뭣도 없으면서 왜 눈을 하늘 꼭대기에 두고 상대는 그러면 안 된다고 불평만 하냐는 거예요. 그게 불만이면 급이 맞는 사람끼리 만나면 되잖아요! 적당히 촌티 나고 가난한 여인이랑 만나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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