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00화 (400/858)

제400화

초빙풍은 제민을 얻지 못했기에 아쉬움이 남아 그녀를 놓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그가 제민을 집안으로 들이는 데 동의했다. 몇 년이 흐르면 그는 자연스럽게 제민을 놓을 것이고 유곡요를 점점 더 존중하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유곡요와 유씨 가문을 존중한다는 전제하에 허용된 바였다.

자신이 초빙풍을 업신여기지 않고 야박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초빙풍이 유씨 가문을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자신이 초빙풍을 인자하게 대한다고 해서 초빙풍이 유씨 가문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자신은 이미 초빙풍에게 충분히 잘해 줬다. 그런데 초빙풍이 자신의 우호적인 마음을 믿고 한술 더 뜨며 방종하게 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손녀를 업신여기는 일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초빙풍은 자신이 이 손녀를 주워 왔다고 생각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초빙풍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재를 나왔고 유곡요는 그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꿈틀거렸다.

“아씨, 나리께서 안으로 들라고 하십니다.”

유 재상의 사동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래.”

유곡요는 냉랭하게 돌아서더니 사동을 따라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유 재상과 초빙풍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은 불안했다.

유곡요는 서재 안으로 들어가더니 자리에 서서 쭈뼛거리며 그를 불렀다.

“할아버지.”

유 재상은 냉담한 눈빛으로 유곡요를 쳐다보며 입을 뗐다.

“이 일은 네가 잘못한 것이다.”

그래도 부드러운 편인 그의 말투에 유곡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와 동시에 또 이를 악물었다. 어찌 됐든 간에 자신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말거라. 그 제민이라는 여인은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니 걱정 말고!”

유 재상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손녀를 다독였다.

“어떻게…….”

유곡요는 순간 멍해졌다. 이미 할아버지에게 적당히 둘러댈 준비를 해 놨는데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일은 이쯤에서 끝내자꾸나.”

“어째서요?”

유곡요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넌 황제 폐하께서 우리에게 보낸 경고를 이해하지 못했느냐?”

유 재상은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유곡요는 표정이 경직됐지만 속으론 여전히 달갑지가 않았다.

“그 애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였을 때 그저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제민이라는 아이가 원치 않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원치 않는다니 그럼 그걸로 됐다. 방금 전에 이 할아비가 빙풍이를 꾸짖었다.”

그가 초빙풍을 꾸짖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유곡요는 속이 후련해졌다. 할아버지는 이제 자기편에 선 것이다. 자신이 이런 소란을 피웠으니 할아버지가 분명 크게 나무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신 쪽으로 돌아서게 될 줄은 몰랐다.

유곡요는 눈시울을 붉혔다.

“할아버지, 감사해요.”

유 재상은 옅은 한숨을 쉬더니 자애로운 눈빛으로 유곡요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이제 나가 보거라! 가서 네 어머니를 뵈렴.”

“예.”

유곡요는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올린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유곡요가 서재에서 나와 보니 초빙풍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콧방귀를 뀌고는 발걸음을 돌려 유 대부인의 처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유 대부인에게 잔뜩 위로를 받은 후 수화문으로 돌아왔다.

커다랗고 화려한 마차 옆에는 대나무 문양이 들어간 도포를 입고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초빙풍이 서 있었다. 훤칠하나 좀 허약해 보이는 그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고 늘 온화하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시선은 아래로 향해 있었다.

유곡요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초빙풍의 호리호리한 몸이 일순 경직되었다.

유곡요는 그의 곁으로 걸어가더니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이어 통쾌하고 의기양양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훗, 역시 우리 할아버지는 사리에 밝은 분이세요.”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진홍색 치맛자락에 오밀조밀한 하얀색 꽃무늬가 수놓인 마면군을 들어 올리며 작은 걸상을 밟고 마차에 올랐다.

초빙풍은 치가 떨렸지만 못마땅한 기색을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고 주먹만 꽉 움켜쥐었다.

그는 유 재상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도가는 역시나 세도가였다. 자신 같은 가난한 집안의 자제를 정말로 낮잡아 보지 않을 리 있겠는가.

타인의 시선과 겉으로는 알랑거리지만 뒤에서는 저를 비웃고 욕하는 동료들 때문에 이미 충분히 힘들었다.

‘적어도 유 재상만큼은 나를 지지하고 이해해 준다고 생각했는데…….’

이 길은 역시나 걷기 힘든 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성공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 길을 걷지 않는다면 아예 기회조차 잃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은 이렇게 힘겨운 지경에 이르게 됐지만 후회한 적 없었다. 그리고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결심했다.

지금은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아 낼 수밖에 없지만, 참고 견디다가 힘이 커지고 단번에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더는 이런 치욕을 참지 않아도 되리라.

마차는 유씨 가문 저택을 떠나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하지만 속이 후련했던 유곡요는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할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녀도 이해했다. 제민은 초부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고 초빙풍도 더는 무리하게 제민을 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유곡요는 알고 있었다. 초빙풍이 겉으로는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더라도 속으로는 여전히 제민을 마음에 두고 있을 거란 걸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유곡요는 원망스러웠고 이 상황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왜 이런 방법까지 써야 그가 마지못해 포기를 하느냔 말이다.

* * *

주운환이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진씨는 복잡하고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그 빌어먹을 종자는 어째서 이리도 운이 좋단 말인가.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가는 그 모습을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니 가문도 한 단계 더 위로 올라간 셈이었다. 그럼 딸아이의 혼처를 찾기도 더 쉬워질 것이었다.

하지만 진씨는 주운환이 정말로 응성을 탈환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죽어도 믿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믿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때, 녹엽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 노마님께서… 셋째 도련님이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으니 이를 축하하기 위해 오늘 저녁 식사는 일상원에 차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진씨는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알겠다!”

“셋째 마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밖에서 또 다른 여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씨의 낯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밖에서 발이 걷히며 ‘차락’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엽연채가 빙그레 웃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머님.”

제민도 그녀의 뒤를 쫓아 안으로 들어왔다.

득의양양한 엽연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진씨는 구역질이 다 올라오려 했다.

“돌아왔구나. 저 사람은 누구냐?”

그녀의 시선이 뒤에 있는 제민에게 향했다.

“부인을 뵈옵니다.”

제민은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제민은 제 벗인데 이곳에서 잠시 지내려고 합니다.”

엽연채가 평온한 목소리로 그녀를 소개했다.

“뭐라?”

진씨는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이 사람이 바로 말로만 듣던 그 제민이란 말인가? 그동안 엽연채의 평판에 관한 소문이 퍼졌던 게 바로 저 여인 때문이었다.

“안 된다!”

“왜 안 되는 겁니까?”

엽연채는 미간을 꿈틀거리며 대번에 맞섰다.

“전 그저 벗을 집으로 초대해 잠시 머물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저희 주씨 가문은 손님을 이렇게 대접합니까?”

진씨는 성질이 나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제민은 화를 부르는 사람이었다. 유씨 가문이 제민을 호시탐탐 겨냥하고 있는데, 제민이 주씨 가문에서 지내면 주씨 가문도 함께 봉변을 당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자신과 딸의 평판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가서 할머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집안에 손님을 머무르게 하면 안 되는 규율이 있는지 말이죠.”

엽연채는 곰곰이 생각해 보는 표정을 지었다. 진씨는 그녀가 매씨를 내세워 자신을 압박하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아, 어머님. 그러고 보니 오늘 궁에 불려가 봉호를 받았습니다. 듣자 하니 봉호를 받으면 조복을 3일 동안 사당에 모셔 놔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

진씨는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씨 가문 사람들은 그런 걸 얼마나 자주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넌 이제야 처음 해 보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이 말은 명백한 조롱이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봉호쯤은 전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데, 엽연채는 무슨 보물이라도 받은 양 행동한다고 비꼬는 것이었다.

주씨 가문이 아무리 몰락했다고 해도 진씨는 종1품 백부인伯夫人이고 강심설은 3품인 정국백부 세자 부인이며 매씨는 정1품 노봉군老封君이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진씨를 상대하기 너무 귀찮았다. 누가 뭐라 해도 이건 자신의 부군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봉호였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엽연채는 곧장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밖으로 나온 엽연채는 사당으로 가지 않고 공거로 향했다. 문안으로 들어가 보니 매씨가 탱자나무 아래에 누워 바람을 쐬고 있었다. 흔들흔들 움직이는 당의躺椅(누울 수 있는 침대식 의자)에 누워 있는 모습이 아주 편안해 보였다.

한쪽에 서 있던 장 마마가 엽연채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알렸다.

“셋째 마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엽연채는 매씨 쪽으로 걸어가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

“할머님.”

“그래.”

매씨는 무덤덤하게 엽연채를 쳐다봤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 뒤에 있는 조복으로 시선을 향했다.

“봉호를 받았느냐?”

“예.”

엽연채는 빙그레 웃으며 소식을 전했다.

“부군께서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님께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알겠다.”

매씨의 말투는 잔잔한 구름처럼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기분이 너무나도 좋을 따름이었다.

“참, 이 사람은 제민인데 제 벗입니다. 이곳에서 좀 머물려고 하는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런 사소한 일은 네 생각대로 하면 된다.”

매씨가 담담한 어조로 허락하자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그럼 전 이만 사당으로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엽연채는 신바람이 나서 폴짝폴짝 뛰어갔다.

매씨는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하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렇게 기뻐할 일이냐?”

“안 기쁠 리가 있겠습니까?”

장 마마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웃으며 말했다.

“마님께서도 기쁘시잖아요.”

그러자 매씨는 헛기침을 하더니 또 서남쪽을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운환은 장군감이었다. 마침내 주씨 가문을 떠받칠 인재가 나온 것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