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8화
엽연채는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소.”
태자는 얼른 그녀를 부축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붙였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 축하하오. 아니지, 이젠 주 부인이라고 불러야 되겠군.”
“황송하옵니다. 전하.”
“어제 주 부인이 요즘 유언비어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소. 그에 문득 우리가 주 부인에게 소홀했다는 걸 깨닫게 됐지. 주 장군은 지금 타지에서 적군을 물리치고 있는데 어떻게 주 부인이 이런 억울함을 겪게 할 수 있겠소, 하하. 이제 봉호를 받게 됐으니 앞으로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오.”
태자는 그리 말하고는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태자가 떠나자 추길은 얼른 엽연채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아가씨, 밖의 일이 궁 안까지 전해졌나 봐요! 태자 전하께서 아가씨를 도와 좋은 말을 해 주셔서 이렇게 바로 봉호를 받게 된 거 아닐까요?”
그 말에 엽연채의 눈빛에 조롱기가 스쳤다. 이 일은 유씨 가문과 관계된 일이니, 태자의 성격상 분명하게 선을 그으면 그었지 이런 흙탕물에 발을 들여놓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소문이 퍼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는 자신의 미색을 탐내고 있었다. 정말 도와주려고 했다면 먼저 은밀히 사람을 취한 후에야 도와줬을 것이다. 원하던 바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힘을 써 줄 리가 없지 않은가?
태자의 공이 아닌 게 분명한데, 그는 자신 앞에 나타나 그럴듯한 말을 꺼내며 자신의 공인 양 포장했다. 엽연채는 그의 위선이 역겹게 느껴졌다.
사실 엽연채는 이미 대응책을 생각해 뒀기 때문에 봉호는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대응책은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러니 봉호가 내려진 것은 좋은 일이었다. 눈앞의 일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으니 말이다.
* * *
엽연채가 조복을 품에 안고 장명가로 돌아오자 온씨와 제민 등은 놀라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건…….”
온씨는 가슴이 벅차올랐고 놀랍고도 기뻤다. 그녀도 전에 정안후 세자의 부인이라는 봉호를 받았기에 이 옷을 보자마자 조복임을 알아봤다.
“봉호를 받았어요.”
엽연채는 빙그레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고 추길은 손에 든 쟁반을 내려놨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어요. 제 부군이…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대요!”
그 말에 온씨는 순간 멍해지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틀어막고 왈칵 눈물을 흘렸다.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합니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녀도 사실 속으로 엽이채 등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멀쩡한 문과 장원 급제자인 주운환이 갑자기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으니, 죽으러 간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온씨는 분통이 터지고 주운환이 원망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가 제 분수도 모르고 헛되이 목숨을 잃으러 갔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목숨을 잃을 줄 뻔히 알면서도 나라를 위해 희생하러 갔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웅이 되겠지만 자신의 딸은 과부가 되지 않겠는가. 온씨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운환을 원망했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지금 가장 마음을 졸이고 있을 사람이 딸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녀는 그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고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좋은 말만 꺼냈다. 그런데 갑자기 주운환이 첫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감정이 복받친 것이다.
추길도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녀도 온씨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늘 다른 명문가 도련님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셋째 도련님께서는 경솔한 분이 아니시지요.”
혜연은 눈물을 머금고 조복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제 봉호가 생겼으니 밖에서 또 헛소문을 퍼뜨리면 떳떳하게 관아에 알려 부관府官에게 범인을 잡게 할 수 있겠어요.”
“더 이상 헛소문을 퍼뜨리지 않을 게다.”
엽연채는 하하 냉소를 지었다.
자신은 단지 봉호만 받은 게 아니었다. 주운환이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까지 했다. 정선제와 후궁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모른 체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봉호를 내렸으니, 더 이상 자신을 업신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건 유곡요에게도 확실한 경고가 될 것이었다.
“참, 봉호를 받았으니 집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이 조복을 사당에 3일 동안 모셔 놓거라.”
온씨가 말했다.
“이곳에서 오래 머물렀으니 이제 돌아가 봐야지! 나도 네 오라비를 보러 능성에 가 봐야 한다.”
“네!”
엽연채는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고개를 돌려 제민을 쳐다봤다.
“민아, 너도 나랑 함께 거기서 지내자.”
제민은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엽연채가 주씨 가문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민감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손사래를 쳤다.
“난 부인과 함께 능성으로 갈게. 아님 여기서 지내는 것도 괜찮고.”
“뭐가 두려운 거야?”
엽연채가 살포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씨 가문에서 아직도 널 못살게 굴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우리 어머니를 따라 능성으로 가다가 어머니가 탄 마차가 뒤집히는 건 두렵지 않고?”
제민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알겠어, 그럼 함께 주씨 가문으로 갈게! 대신 날 여종으로 부려. 정 안 되겠으면 내가 너에게 팔릴게.”
제민은 자유로운 게 좋아 누군가에게 팔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엽연채는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이렇게 매번 도움만 받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넌 여종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쓸모 있는 일을 해 줄 거야.”
제민은 어리둥절했고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쨌든 우선 함께 돌아가자! 내가 지내는 처소는 크고 곁채도 많아.”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재차 권했다.
“그래, 그럼 더 이상 사양 안 할게.”
제민 역시 미소를 지으며 수긍했다.
* * *
엽연채가 풍화루에서 갑자기 궁의 부름을 받은 후, 그곳 손님들은 하나같이 그녀가 누구에게 미움을 사서 궁으로 불려 들어가 혼쭐이 나는 것 아니냐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황후 마마조차도 덕행에 문제가 있는 그녀를 도저히 봐줄 수가 없어 훈계하려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런데 오후에 뜻밖의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엽연채는 혼줄이 나러 간 것이 아니라 상을 받으러 궁에 들어갔던 것이다. 무려 봉호를 받았다.
“어… 어떻게 봉호를 받을 수가 있지?”
“그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사실이 증명된 거지.”
품행이 엉망인 사람에게 조정에서 봉호를 줄 리 없었다. 주더라도 소문이 퍼지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황실 사람들은 시비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는 셈 아니겠는가? 황제와 황후조차도 그녀를 인정하는데 그 소문들이 어찌 사실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엽연채가 봉호를 받았다는 사실에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궁에서 또 다른 소식이 전해졌다. 주 장군이 옥안관에 도착해 전투 준비를 하고 있으며 단번에 서노의 맹장 사율이를 쓰러뜨렸고 사율이가 이끄는 군대를 전부 섬멸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한 백성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백성들은 모두 응성 전투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옥안관을 잃게 되면 서남 열두 개 주를 지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서노의 대군이 국경으로 쳐들어올 것이고, 도성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대제는 더 이상 적군에게 밀려 후퇴하지 않고 반격을 시작했다. 게다가 적장까지 베었으니 어찌 들썽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율이가 우리 대제의 장수를 서너 명인가 참살했다고 하던데, 이제야 설욕을 했구먼!”
“대제는 반드시 이길 거야! 황제 폐하 만세!”
하지만 어딜 가나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초 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들어 보니 우리는 10만 대군이었고 적은 7만이었다고 하더라. 수적으로 우세였는데 이기지 못했다면 말이 안 되는 거지.”
“적장이 주 장군을 햇병아리라고 얕봤다고 하더군. 게다가 주 장군에게 10만의 군사가 있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거지. 결국 순간의 실수로 패배하고 만 거야. 안 지는 게 이상하지.”
물론 이러한 말은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어쨌든 이곳은 대제의 지역인데 이런 평가는 적장의 사기를 높이고 대제 군의 기세를 꺾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다들 희망을 품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한편, 조정에선 앞으로 있을 전투를 위해 백성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진작하려고 했고, 주운환의 용맹스러움을 보여 주는 소식들을 끊임없이 밖으로 퍼뜨렸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소식을 듣게 되자 더욱더 흥분하고 기뻐했다.
* * *
그 시각 한림원.
주운환이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동료들은 전부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그들은 줄곧 주운환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냐는 생각을 했었다. 어엿한 장원 급제자이자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문신이 출정을 자청해 변방에 가서 목숨을 내던지는 해괴한 짓을 했으니 말이다.
조범수와 한림원 동료들은 함께 모여 작은 목소리로 주운환의 이야기를 했다.
“정말 대단하네. 과연 장수 가문 출신다워!”
한 사람이 감탄하자 다른 누군가가 동조했다.
“우리 대제가 응성을 되찾을 희망이 생겼어!”
그러나 조범수가 냉큼 초를 쳤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지.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조범수는 주운환이 제일 싫었다. 젊고 학식도 풍부한데 황제의 환심도 샀고 경국지색을 아내로도 맞이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해 전장으로 떠났을 때는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허약한 문신이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쥘 줄 누가 알았겠는가. 조범수는 질투가 나서 죽을 것만 같았다. 입에서는 자연히 시샘하는 말만 튀어나왔다.
그가 이 말을 뱉자 한림원 동료들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주운환이 승승장구해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응성을 탈환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조범수처럼 그를 시샘하며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운환이는 장군감이라고 하셨어요! 분명 대승을 거두고 돌아올 겁니다!”
진지항이 싸늘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한림원 사람들은 전부 미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동조했다.
“맞네, 맞아. 분명 그리될 걸세!”
설령 주운환이 패배하리라 여겨도 이런 말을 어찌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겠는가? 허튼소리를 퍼뜨려서는 안 됐다.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밖으로 전하게 되면 민심과 군심이 동요할 테니 말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이상 민심과 사기를 진작해야 했다. 그래야 군량과 마초가 부족할 때 식량을 거두기 용이했다.
초빙풍은 조용히 한쪽에 앉아서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공명정대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운환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자 속이 편치 않았고, 스스로조차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증오심과 분노가 일었다.
어째서 주운환은 이다지도 잘난 것일까. 젊은 나이에 장원 급제를 하고 재능이 흘러넘치며 황제의 눈에 들고 앞길이 창창하기까지 하다니 말이다.
초빙풍은 그가 한없이 부러웠고 질투심이 타올랐다. 그런데 주운환은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것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포기한 것이었다.
주운환은 제멋대로인 성격과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어째서 전장에서 또 성과를 내느냐는 말이다. 게다가 지금 그의 아내는 제민을 부추기고 있었다.
‘주운환, 그자는 어쩜 이리 미운 짓만 골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