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7화
“이 뻔뻔하고 입 싼 인간들아. 우리 마님과 아가씨께서 추접한 짓을 하는 걸 너희들이 직접 봤어?”
추길의 호통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범인은 이미 잡혔다고! 누군가가 유언비어를 퍼뜨린 거란 말이야.”
“난 당신들이 진짜로 범인을 잡았든 가짜로 범인을 잡았든 상관 안 해. 내가 직접 봤으니까! 본 것을 어쩔 거요!”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당신이 본 사람이 누군데! 봤으면 말해 보라고!”
추길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키 작고 뚱뚱하며 곰보인 사람이었소! 쥐새끼처럼 당신들 집 뒷문으로 슬그머니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니까!”
“키 작고 뚱뚱한 사람? 그 사람이 누군데! 어디 한번 데려와 보시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자가 누구인지는 당신들이 알겠지! 당신들이야말로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그자를 데려와 봐!”
그 사람은 그리 받아치며 비웃었다.
“추길아.”
엽연채와 제민이 추길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자 안에 있던 손님들은 전부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쳐다봤다.
추길은 창가에 놓인 탁자 옆에 서 있었고 그녀와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사람은 오십 대로 보이는, 크고 둥근 얼굴에 눈이 작고 입이 큰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는 평범한 회색 무명옷 차림으로,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엽연채가 다가오자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가씨!”
추길은 엽연채를 보자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을 떨구며 억울해했다.
“이 사람들이…….”
“정말 여우같이 생겼네.”
그 중년 여인은 엽연채를 보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나랑 관아에 가서 큰 소리로 떠들어 보는 게 어떤가.”
엽연채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그 중년 여인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밖에서 여종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염교였다. 염교는 엽연채를 보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가씨, 황후 마마께서 아가씨를 찾으십니다!”
‘황후가?’
엽연채는 어리둥절했고 요릿집에 있던 손님들도 모두 놀란 얼굴이었다.
“무슨 일로?”
혜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모르겠어. 아무튼 궁장宫裝(궁녀들이 입는 옷)을 입은 마마가 이미 장명가에 도착해 있어.”
상황을 알려 준 염교가 엽연채를 채근했다.
“아가씨, 어서 가시죠!”
“그래.”
엽연채는 그리 말하고는 추길을 잡아당겼다.
“가자꾸나!”
그렇게 엽연채 일행은 속히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크고 둥근 얼굴의 중년 여인이 의기양양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분명 거짓으로 핑계를 대고 도망치는 거겠지! 도망치는 게 아니라고 해도 황후 마마께서 혼쭐을 내려고 부르신 게 아니겠소?”
안에 있던 손님들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모함한 거라고 밝혀진 거 아니었어?”
“정말로 모함이라면 소문의 내용이 그렇게 상세하지는 않았겠지!”
* * *
엽연채와 제민 등은 풍화루를 나와 곧장 장명가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가 보니 오십 대쯤 되었을까, 얼굴이 고운 마마가 짙은 남색 의복에 머리엔 말액을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소청에 서 있었고 그 옆에 온씨가 보였다.
그 마마는 엽연채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렸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
엽연채는 후궁後宮 사람들과 왕래를 해 본 적이 없어 이 마마媽媽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일단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네.”
“황후 마마께서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을 부르셨습니다. 소인을 따라 궁으로 드시지요!”
사 마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엽연채는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을 보더니 안 좋은 일로 찾는 것이 아님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엽연채가 그녀를 따라 문을 나서니 검은 바퀴에 황금 지붕이 달린 마차 한 대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엽연채와 사 마마는 마차에 오른 후 함께 궁으로 향했다.
엽연채는 동화문東華門에서 내린 후 다시 가마에 올랐다. 가는 내내 우뚝 솟은 궁문과 붉게 칠해진 높은 기둥, 화려한 건물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마침내 한 화려한 궁전 앞에 도착한 엽연채는 사 마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장식은 눈이 부시게 화려했고 모든 방은 주간主間과 차간次間이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기둥엔 담홍색 발이 드리워져 있고 방 안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삼면에 만卍 자 문양이 조각된 등받이가 달린 박달나무 나한장탑羅漢長榻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금색 봉포鳳袍를 입고 있는 이 여인은 고상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둥그스름한 얼굴에 날개를 펼친 봉황 장식과 홍옥으로 꾸며진 금잠을 머리에 꽂고 있었다. 화려함과 부티가 흐르게 치장한 이 여인은 바로 정 황후였다.
하좌의 왼쪽 권의엔 화려한 옷을 입은 귀인 둘이 앉아 있었는데, 엽연채는 그들을 곧장 알아봤다. 바로 태자비와 신양 공주였다.
오른쪽에는 두 명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열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고 생김새가 정 황후와 어느 정도 닮은 듯했다. 이 소녀는 복숭아꽃 문양이 들어간 연보랏빛 반비半臂(상의의 맨 위에 입는 소매가 없거나 아주 짧은 겉옷)를 입고 있었고 새하얀 피부에 어여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여덟째 공주이자 황후의 소생인 월안 공주였다.
그녀 옆엔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리따운 외모의 풋풋한 소녀가 있었다. 이 소녀는 바로 오 귀비 소생인 아홉째 공주 이영 공주였다.
엽연채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소인 엽연채, 황후 마마와 태자비 마마, 세 분 공주 마마를 뵈옵니다.”
두 어린 공주는 그녀를 보고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귓속말을 속삭였고, 정 황후는 눈빛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몸을 낮추고 예를 올리는 엽연채에게 시선을 향했다.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눈앞의 소녀는 맑고 아름다운 얼굴에서 빛이 흐르는, 눈부신 미인이었다. 또 절하는 그녀의 매혹적인 자태는 날렵한 곡선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정 황후는 황제가 연회를 베풀었을 때 멀리서 엽연채의 모습을 봤었다. 그때는 엽연채의 외모가 과하게 화려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가까이에서 보니 생기 있고 아름다워 보였고 사람을 설레게 하는 맑고 고운 외모였다.
정 황후는 괜히 간담이 서늘했다. 엽연채가 황제가 혈기 왕성할 때 태어나지 않고 20년쯤 늦게 태어났으니 참으로 다행이 아닌가. 예전이었다면 이런 미인을 황제가 가만 놔두었을 리 없었다. 그녀가 궁 안으로 들어왔다면 궁 안에 피바람이 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 황후는 엽연채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황제가 주운환을 아끼고 있고 또 주운환은 첫 전투에서 승리를 하며 대제 전체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응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대제의 장군들이 잇달아 참살되면서 나라에 드리워진 시커먼 먹구름을 단번에 걷어냈다.
“어서 일어나게.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하고는 부축해 주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사 마마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엽연채를 부축해 일으켰다.
정 황후는 놀랍다는 듯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다들 주 장군의 부인이 선녀처럼 아름답다고 하던데, 지금 이리 자세히 보니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태자비는 정 황후가 엽연채를 칭찬하자 표정이 굳어졌다. 정 황후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태자비는 마음이 답답했다. 그녀는 정 황후가 또 엽연채를 칭찬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아 얼른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 요즘 잘 지내고 있는가?”
“마마 덕분에 모든 것이 평안합니다.”
엽연채가 답례하자 신양 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 경사가 있소. 곧 있으면 황제 폐하의 생신이라 각 가문에 초대장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네. 그런데 주씨 가문에 보낼 초대장을 쓰다가 불현듯 주 장군이 급히 출정하는 바람에 자네의 봉호 신청을 못하고 떠난 일이 떠오르더군. 그리되면 자네가 궁에 들어올 때 체면이 서지 않겠지.”
정 황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보탰다.
“게다가 자네가 요즘 헛소문에 시달린다고 들었네. 봉호가 내려지면 적어도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을 거네. 내가 직책을 다하지 못해 이리됐구려.”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얼른 다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황후 마마. 황송하옵나이다.”
“이건 자네가 마땅히 받았어야 하는 거네.”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엽연채에게 봉호를 내리게 됐으니 전후 사정과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줘야 되는데, 얼마 후면 정선제의 탄신일이니 이를 구실로 삼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주운환이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봉호를 내리는 듯 보일 수 있었다.
이때, 궁녀 두 명이 각각 흑단黑檀으로 만든 쟁반 하나를 들고 걸어왔다. 쟁반 위에는 진주와 물총새의 깃으로 장식된 조복朝服 한 벌이 잘 개켜져 있었고, 그 위에 봉관鳳冠이 올려져 있었다. 이는 정2품 부인이 입는 조복이었다. 또 다른 궁녀가 들고 있는 쟁반에는 투명하고 윤이 나며 밝은 빛이 흐르는 옥여의 한 쌍이 올려져 있었다.
“이 여의를 자네에게 하사하네.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기를 바라네.”
“황송하옵나이다. 마마.”
엽연채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정 황후에게 사의를 표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주 부인은 이곳에 남아 나와 오반을 들지.”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마마.”
“그전에 내가 자네에게 알려 줄 기쁜 소식이 하나 더 있네. 주 장군이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무사히 옥안관에 도착했네. 현재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하네.”
“예?”
엽연채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매일같이 주운환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궁에 들어와 봉호를 받게 되는 바람에 온 정신을 정 황후에게 쏟고 있었는데, 그녀의 입을 통해 주운환의 소식을 듣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엽연채는 순간 가슴이 찡해졌고 이어 기쁜 마음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황송하옵니다. 마마.”
“자리에 앉게!”
정 황후는 미소와 함께 자리를 권했다. 그녀는 주운환이 옥안관을 탈환할 수 있을지 여부를 예측할 수 없었다. 세상사는 언제나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니 말이다. 그래도 어쨌든 일단 엽연채에게 잘해 줘서 나쁠 것은 없었다.
물건을 받아 든 후 엽연채는 신양 공주 옆자리로 안내받아 자리에 앉았다. 신양 공주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일상적인 집안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엽연채는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고, 추길은 조복과 옥여의를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추길은 너무 기쁜 나머지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황후궁의 문을 나오자 저 멀리 부드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잘생긴 사내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