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94화 (394/858)

제394화

태자는 머쓱해하며 말했다.

“옥안관 때문에 아바마마께서 근심하고 계시고, 며칠 전에 남쪽 지역에서 일어난 누리(메뚜깃과에 속한 곤충) 충해로 인해 군인에게 주는 급료와 지급품 및 군량과 마초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보고도 받으셨지요……. 그러니 어찌 이런 아녀자들의 일을 언급하여 아바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 일은…….”

말을 하던 태자는 표정이 굳어졌다. 이런 일은 황후가 관리해야 하는 건데 그녀가 소홀했던 것이다.

“맞습니다. 게다가 그저 헛소문에 불과하니 시간이 좀 지나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시시각각 관심을 두진 않았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소문이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습니다.”

노왕비가 말을 마치자 신양 공주가 다른 화두를 꺼냈다.

“그런데 주운환의 아내는 아직 봉호를 받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고 정선제도 상황 파악이 되자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주운환은 너무 급하게 출정하는 바람에 미처 엽연채에게 봉호를 내려 달라는 청을 드리지 못했고, 자신도 그 부분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선제는 고개를 돌려 정 황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황후, 이 일은 당신에게 맡기겠소.”

정 황후의 얼굴은 조금 붉게 변해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부命婦(천자로부터 봉호를 받은 부인)를 관리하는 건 본래 그녀의 책임이었다.

정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옵니다. 엽연채가 봉호를 받지 못한 건 신첩이 구중궁궐에 있어 그자의 일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조앵기를 쳐다봤다.

“양왕비는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내게 미리 말하지 않았는가? 폐하께서는 매일 수많은 정사를 처리해야 하시는데 이런 일로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리는군! 이래서야 되겠는가! 양왕비, 앞으로 명부나 부인에 관한 일은 내게 말하면 되네.”

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는 행동이었고, 동시에 조앵기가 야단법석을 떨며 이런 아녀자들의 사소한 일을 정선제 앞에서 꺼냈다고 비웃는 것이었다.

조앵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 황후는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고자질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당연히 가장 높은 사람에게 해야 했다.

“그런데 동서는 전부터 외출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연회에 참석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데 주운환의 아내는 어떻게 알게 된 건가? 울면서 말할 정도면!”

태자비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그에 정 황후는 이쪽으로 신경이 쏠렸고 경계심을 품은 얼굴로 조앵기와 양왕을 쳐다봤다.

‘주운환이 아직 옥안관 쪽에서 결과를 내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자가 병권을 손에 쥐고 있는데, 설마 양왕이 주운환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조앵기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작년 양왕 전하 생신 때 초대했었어요…….”

정 황후는 버들잎 모양의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때 어째서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을 초대했지?”

그녀의 기억으론 작년 칠월에 주운환은 아직 장원 급제를 하기 전이었다. 당연히 출정도 하기 전이니, 그저 듣도 보도 못한 비천한 서자에 불과했다.

양왕이 날카로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찰나. 태자와 태자비의 표정이 확 굳었다. 엽연채와 얽힌 일은 더 숨길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양왕이 입을 열게 되면 어떤 식으로 변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태자비가 미소를 지으며 먼저 나섰다.

“작년에 주 부인이 교외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신양 공주 별장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요양을 했습니다. 그 부인이 감사드린다며 말린 꽃을 선물로 보내왔는데, 제가 그 말린 꽃이 아주 마음에 들어 태자부로 그 부인을 불러 말린 꽃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 부인이 또 차도 잘 끓여서 몇 번 불렀었는데 마침 양왕 전하께서 생일 축하연 초대장을 전달하러 오셨습니다. 아, 그러다가… 그 부인에게도 초대장을 한 장 건넸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오자 방 안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정선제와 정 황후는 불현듯 일전의 연회가 떠올랐고 경국지색인 엽연채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확 굳었고 그들뿐 아니라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양왕을 쳐다봤다.

‘파렴치한 것도 정도가 있지! 유부녀를 노리다니!’

양왕은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옅은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

“말씀을 안 하셨으면 완전히 잊고 있었을 겁니다. 아, 그 부인이 이번에 출정한 주운환의 아내였던 거군요?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그 말에 태자와 태자비는 또다시 표정이 굳었다. 이번엔 양왕이 그들보다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오셔서 갑자기 제게 초대장이 더 필요하다고 하셨죠. 전 그 이유가 궁금해서 직접 태자부로 초대장을 전하러 갔는데, 들고 있던 초대장이 많아 그 부인에게도 한 장 줬던 것뿐입니다.”

이제 엽연채에게 봉호를 내린다고 하니 더 이상 그런 지저분한 이야기가 나돌아서는 안 되었다.

태자의 기품 있는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고 그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그때 양왕이 엽연채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걸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건만, 이제 와 딴소리였다.

양왕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어떤 일이 하나 떠오르네요. 그때 제가 형님에게 왜 초대장이 더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형님은 대충 얼버무리며 벗을 더 초대하려는 거라고 하셨죠. 그런데 형님의 벗들 중에 저희가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게다가 초대장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니요.

그 후 제 생일 축하연에 분명 형님과 백 소저가 나타났습니다. 이젠 백 측비라고 불러야 하나요? 저도 원래는 백씨 성의 그 여인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형님의 측비가 되었죠. 이제 생각해 보니… 그때 형님이 제게 초대장을 더 달라고 했던 이유가 백 측비에게 주기 위해서였나 보죠?”

그 말에 태자는 표정이 굳어졌고 정 황후와 정선제도 안색이 변했다.

당시 태자에게 꽤 많은 측비 후보를 골라 주었고 그는 그중에서 선택을 했다가 결국엔 싫다고 했었다. 자신들을 속이려고 그런 일을 계획했다는 말인가?

정선제는 그런 생각이 들자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끝내 묘기화 일이 터지면서 그 포장된 모습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태후는 마른기침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다른 손님이 데리고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는 되었고, 그 주씨 가문 엽씨의 일을 잘 처리해야겠구나.”

그리 말하고는 양왕 부부를 바라보았다.

“지금쯤 양왕부가 떠들썩해졌겠구나!”

“예, 그럼 손자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바마마, 소자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양왕은 냉담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소매를 뿌리치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조앵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자 양왕이 돌아서서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서 오지 않고 뭐 하느냐!”

조앵기는 조그만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그제야 허겁지겁 그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급하게 뛰었던지 문을 나설 때 문지방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납죽 엎어지고 말았다.

정선제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그 모습을 못 본 척했고 정 황후와 태자 부부는 ‘풉’ 웃었다. 정 황후는 너무 우스워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지만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아 냈다.

‘정말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골랐어. 이런 물건을 딱 짚어 냈다니!’

앞에서 걸어가던 양왕은 불현듯 자신을 따라와야 할 조앵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조앵기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게 아닌가.

잘생긴 얼굴이 확 어두워지더니 양왕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하얗고 가는 손목을 확 움켜쥐며 일으켜 세운 다음, 그녀를 품에 안고 다시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뒤에서는 노왕비가 참지 못하고 내는 피식거리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양왕의 수려한 면모가 더욱 어두워지더니 그는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조앵기를 꾸짖었다.

“이 변변치 못한 것. 어리석은 것. 제대로 걷지도 못해 날 이리 창피하게 만드는구나!”

조앵기는 그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늘 변변치 못한 사람이었다.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고 얼굴도 예쁘지 않고, 심지어 길을 걷다가도 넘어지며 밥을 먹다가도 목이 메는 팔푼이였다. 양왕은 늘 그런 자신을 미워했고, 그 탓에 자신은 그가 이편을 폐위하지는 않을까 매일 걱정했다.

동화문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마차에 올랐고 곧장 궁문으로 향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양왕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앵기를 힐끗 쳐다봤다. 어쨌든 이 얼간이에게도 제 나름의 쓸모가 있었다. 무려 20년 가까이를 거뒀더니 그래도 이런 눈곱만 한 쓸모는 보여 준 셈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양왕은 마음이 조금 누그러져 조앵기를 확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함께 보낸 세월이 세월이니 조앵기는 지금 그의 기분이 좋다는 걸 당연히 눈치챘다. 조앵기는 이런 때엔 애교를 부려도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양왕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이렇게 부탁했다.

“전하, 거북이를 한 마리 기르고 싶어요!”

“안 된다.”

양왕이 단박에 거절하자 조앵기는 표정이 굳어졌다. 양왕은 눈동자가 싸늘해지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거북이를 기르고 있느냐?”

조앵기는 깜짝 놀라더니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아, 아니에요…….”

“하긴 네가 그럴 배짱이나 있겠느냐.”

양왕은 ‘흥’ 콧방귀를 뀌었고 조앵기는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양왕이 떠난 후 정선제는 엽연채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주운환의 아내였다. 정선제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채결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밖으로 사람을 보내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거라.”

“예.”

채결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정 황후와 태자비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보아하니 황제가 주운환에게 꽤나 마음을 쓰고 있었다.

출정의 결과가 어찌 될지는 일단 둘째 치고 적어도 황제는 지금 그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그에게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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