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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393화 (393/858)

제393화

이튿날 이른 아침, 조앵기가 침상에서 일어나자 위 마마는 굳은 표정으로 화장대 뒤에 서서 조앵기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몸치장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양왕과 함께 크고 화려한 마차를 타고 함께 궁으로 들어가 문안 인사를 드렸다.

오늘은 양왕의 생일이니 궁에 들어가 황제와 황후, 태후 등에게 절을 올려야 했다.

마차가 궁 안의 동화문에 멈춰 서자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갈아타고 태후의 처소인 수안궁壽安宫으로 향했다. 가마가 수안궁 문 앞에 멈춰 서자 두 사람은 가마에서 내린 후 궁녀들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전正殿(정중앙에 위치한 전당)으로 들어간 후 다시 편전偏殿(정전의 옆에 위치한 전당)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그곳엔 태후와 정선제가 있었다. 태후와 정선제는 봉탑鳯榻에 앉아 있었고 정선제의 하좌엔 정 황후, 노왕 부부, 태자 부부 그리고 용왕이 자리했다.

양왕과 조앵기는 안으로 들어가 태후에게 예를 올렸다.

“할마마마, 아바마마, 어마마마를 뵈옵니다.”

“일어나거라.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다.”

태후는 미소를 지으며 면례免禮해 주고는 양왕을 쳐다봤다.

“넷째가 또 한 살을 더 먹었구나.”

양왕이 허허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 손자가 또 한 살 더 늙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태후와 정선제는 표정이 굳었다. 그가 늙었으면 그들은 뭐란 말인가? 죽지도 않는 늙은이란 말인가? 이들 나이가 되면 가장 기피하는 게 바로 ‘늙었다’라는 단어였다.

정선제가 마른기침을 하고 채결을 불렀다.

“가져오너라.”

채결이 얼른 쟁반 하나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양왕이 힐끗 쳐다보니 푸른빛의 고운 옥으로 만든 벼루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수수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투명한 벼루로, 광채가 흐르고 있어 한눈에 봐도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정선제는 빙긋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건 전조前朝의 대학자 월 선생이 쓰던 벽천연碧天硯이다. 쟁이 네가 줄곧 이 벼루를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마침 짐이 이 벼루를 얻어 쟁이 네게 생일 선물로 주는 것이다.”

양왕은 날카로운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 늙은이가 이렇게 좋은 물건을 꺼내 놓다니. 나중에 태자의 뒤치다꺼리를 할 때 좋은 물건을 내놓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안 되나 보지?’

물론 겉으로는 공손한 미소를 지었다.

“황송하옵니다. 아바마마.”

“폐하는 넷째를 가장 아끼시는군요. 지난번 태자의 생일 땐 이리 좋은 걸 선물하지 않으셨습니다.”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건넸다.

“쟁아. 자리에 앉거라.”

정선제의 말에 양왕은 조앵기를 잡아당기며 용왕 옆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정 황후는 매년 태자와 노왕의 생일 때 정선제가 하사했던 선물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며 웃으며 농담을 건넸고, 웃음이 많은 두 공주도 자리에 있어 수안궁의 분위기는 꽤 화기애애했다.

조앵기는 시간을 가늠했다. 궁에서 대략 반 시진쯤 머물었으니 짐작건대 양왕부 쪽에는 손님들이 거의 다 왔을 것이다. 예년엔 이 시간쯤 되면 양왕부로 돌아가 손님들을 맞이했다.

조앵기는 무릎에 올려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계속 대화에 끼고 싶었지만 적절한 기회를 찾지 못했고 그럴 용기도 없어 묵묵히 기회를 엿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미루면 입도 방긋하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 폐하…….”

태후는 이영 공주의 재롱에 ‘하하’ 너털웃음을 지었고 정 황후와 정선제도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니 조앵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선제를 불러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폐하.”

조앵기는 이를 악물고 걸어 나가 정선제 앞에 멈춰 섰다.

“음?”

정선제, 태후, 정 황후 등은 깜짝 놀라 의아한 얼굴로 양왕비를 쳐다봤다.

양왕비는 출신 문제 때문에 늘 따돌림을 당해 왔다. 본인도 사교성이 없는 사람이라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자신을 떠올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갑자기 걸어 나와 정선제를 부르니 다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양왕비, 왜 그러느냐?”

정 황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왕비는 양왕이 중상을 입고 궁으로 돌아왔던 그해에 그녀가 양왕에게 붙여 준 민며느리였다. 양왕이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를 아내로 맞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수작이었지만, 그래도 정 황후는 조앵기가 커서 혹 저와 맞서지는 않을까 두려워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조앵기는 정말 우둔한 사람이었다. 움켜잡기 쉬운 나약한 성격이며 머리도 좋지 않아 자신의 역할을 아주 톡톡히 해 내고 있었다. 바로 양왕의 발목을 잡는 것 말이다.

정선제 또한 이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찾자 정선제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연채의 일을 해결해 주시면 아니 되옵니까?”

조앵기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흰자위와 검은자위가 또렷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연채라니?”

정선제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어떤 여인인가?”

노왕비는 ‘풉’ 웃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양왕을 쳐다봤다.

“양왕께서 새로 양왕부에 들인 사람인가 봐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설마 그 사람이 감히 동서에게 싫은 내색을 하는 건 아니겠죠?”

그러자 정선제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일은 나중에 황후나 태후 마마께 말씀드리면 되지 않느냐.”

“그런 게 아닙니다.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조앵기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얼마 전에 누가 출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주 공자가 바로 연채의 부군입니다.”

정선제는 순간 멍해졌다. 주운환이라니,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대제의 명맥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라 주운환과 관련된 옥안관에서의 전보가 수시로 전해졌다.

정선제는 밤낮으로 주운환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는 조앵기가 주운환을 언급하자 정신이 절로 집중되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주운환이 뭐 어쨌다는 것이냐?”

“그자는 연채의… 연채는 주운환의 아내입니다. 연채의 부군은 타지에서 군대를 지휘하여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사람들이 연채가 부도婦道를 지키지 않는다는 유언비어를 만들었습니다.

연채는 친어머니 댁에 가서 효를 다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또 연채의 어머니까지 함께 엮어 부도를 지키지 않는다고 헐뜯고 있습니다. 연채가 밖에서 한 소녀를 구해 집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은 또 구해진 소녀까지 엮어서 그 소녀도 부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저께 이 일 때문에 연채가 부윤에게 고발을 하러 갔습니다. 부윤이 압박을 하니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 일은 명백히 밝혀졌는데 연채의 아버지가 벌인 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또 허튼소리를 지껄이고 있습니다. 소문의 주인공이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일은… 원래 폐하께 말씀드리면 안 되는 것이기는 하나… 연채가 너무 가련하여서……. 부군은 타지에서 목숨을 내던지고 있는데 그 아내는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조앵기는 눈물을 흘렸다.

정선제는 이마가 툭툭 불거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런 몹쓸! 누가 그런 짓을 벌였다는 말이냐!”

주운환은 스스로 출정을 청했다. 결과가 좋든 안 좋든 간에, 설령 정말 패배한다 하더라도 대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러 간 충신이었다.

정선제는 원래부터 주운환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에게 어떻게 보상해야 좋을지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게다가 주운환은 뜻밖에도 이미 성공적으로 남쪽 이민족들이 봉쇄하고 있는 박주를 뚫고 옥안관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정선제는 작은 기대를 품게 되었다. 전장 경험이 없는 햇병아리 주운환이 박주조차도 넘지 못하고 그곳에서 전사하리라고 예상했는데, 예상외로 주운환은 군량과 마초를 가지고 그곳을 뚫었던 것이다.

이는 정선제를 놀랍고 기쁘게 했으며 또 흥분하게 만들었다.

설령 옥안관에서 패하더라도 적어도 백성들은 자신을 심하게 지탄하지는 않을 것이고, 자신이 아무 능력도 없는 자를 보내 백성들을 기만하려고 했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 정선제는 주운환에게 미안해했고 그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대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정의로운 영웅의 아내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선제는 지금 주운환에게 감격해 마지않았고 주운환은 모든 면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의 아내 또한 좋은 사람일 것이며 도덕성이 땅에 떨어지고 부도를 지키지 않는 일을 했을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게다가 조앵기는 하는 말마다 엽연채를 편들고 보호하고 있었다. 정선제는 불끈 화가 났고 조앵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었다.

“아바마마, 저도 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양 공주가 옅은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거들었다.

“엽연채는 저와 친분이 있는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인데 갑자기 그런 헛소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소문 속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름조차 모르겠습니까? 이렇게 근거 없는 헛소리로 애꿎은 사람의 평판과 명예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누님 말씀이 맞습니다.”

태자도 딱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서야 미인에게 정성을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태자도 엽연채의 편을 들어 주자 태자비는 그가 또 엽연채에게 마음이 동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분노가 치밀었다.

이제 풍씨 가문은 무너졌으니 풍 측비가 그 호박 같은 얼굴로 어떻게 태자의 마음을 붙들어 놓을 수 있겠는가. 태자비는 풍씨 가문이 몰락한 후로 태자가 자신에게 전보다 훨씬 잘해 주는 걸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지금 태자부에서는 자기 집안의 세력이 가장 컸다. 그러니 이제는 엽연채를 이용해 태자의 마음을 붙들어 놓을 필요가 없었고, 엽연채에게 품은 감정은 오로지 미움뿐이었다.

“너희들 모두 이 일을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짐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냐!”

정선제는 노기를 드러냈다.

태자와 노왕 부부는 표정이 굳어졌다. 밖에 소문이 그렇게 파다하게 퍼져 있고 그들은 모두 궁 밖에서 지내고 있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은 소식을 빨리 아는 사람들이었다. 소문의 내용은 바로 엽연채가 제민을 구했다가 유씨 가문에 밉보였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은 손을 쓴 사람이 유곡요뿐이라는 것은 몰랐고, 그저 유씨 가문이 제민을 용납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 일은 유 재상과 관련된 일이고 엽연채는 그들과 일가친척도 아니고 오래된 친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이 일은 정선제 앞에서 폭로되었고 정선제는 주운환에게 감격해 마지않으니, 정선제의 환심을 사기 딱 좋은 상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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