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9화
이튿날 아침이 밝자마자 엽연채와 온씨는 엽승덕 일행을 제압하여 관아로 향했다.
둥둥둥!
귀청이 떨어질 만큼 북소리가 크게 울리자 관아 안의 포졸과 부윤이 깜짝 놀랐다. 그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백성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잇달아 주위를 에워쌌다.
북소리가 울렸다는 건 볼만한 구경거리가 또 생겼다는 의미였다.
“어서 가서 구경하세! 늦게 가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거야!”
찬거리를 사러 나왔던 아낙은 들고 있던 찬거리를 내던졌고 노점상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사내도 소가 든 찐빵을 내던지더니 관아 쪽으로 달려들었다.
엽연채와 온씨 등은 엽승덕 등을 끌고 공당公堂으로 들어섰다. 밖은 이미 몰려든 백성들로 우글거려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정 부윤은 비장裨將과 함께 후당後堂에서 걸어 나오다가 엽연채의 곱고 아리따운 얼굴을 보더니 발이 미끄러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정 부윤은 말없이 하늘만 쳐다봤다. 아래를 내려다볼 필요도 없었다. 제압당해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이 엽승덕 그 쓰레기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번까지 포함해 엽연채는 이미 공당에 여러 번 드나들었고 그뿐만 아니라 매번 엽승덕 이 쓰레기를 제압하고 있었다. 하도 자주 심문을 받으러 오니 엽연채가 오랜 친우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정 부윤은 조금 비뚤어진 관모를 바로잡더니 탁자 앞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이어 마른기침을 하더니 경당목을 세게 두드리며 규율에 따라 이렇게 외쳤다.
“자네는 누구인가?”
“소인은 주씨 가문 사람인 엽씨이고 이쪽은 제 어머니이신 온씨입니다. 평민 엽승덕과 은정랑은 저희의 평판과 명예를 훼손했고, 도적들과 결탁해 야밤에 저택에 무단침입해 절도 행각을 벌였습니다. 이에 두 사람을 고발하고자 합니다.”
엽연채와 온씨가 무릎을 꿇고 이리 고했다. 엽승덕과 은정랑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목을 빳빳이 쳐들고 소리쳤다.
“억울하옵니다, 대인! 억울하옵니다!”
정 부윤은 검은 야행복을 입은 엽승덕 무리를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다니, 뻔뻔해도 너무 뻔뻔하지 않은가?
뒤에 있던 백성들도 떠들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현장에서 딱 걸렸나 본데? 야행복을 입고 있잖아!”
“그러게 말이야! 저렇게 입고 한밤중에 남의 집에 쳐들어갔으면서 억울하다고 하네!”
엽승덕과 은정랑은 표정이 확 굳어지더니 이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특히, 엽승덕은 화가 치밀어 올라 하마터면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 자신이 은화 한 냥가량을 들여 구입한 의복이 증거가 되어 버릴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전에 수많은 화본을 봤지만 야행복이 범죄의 증거가 된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입으면 협객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멋스럽기 그지없던데, 어찌 자신이 입으니 범죄의 증거가 된단 말인가.
“정숙하시오!”
정 부윤은 경당목을 세게 두드렸다. 그들을 쳐다보고 있자니 자신이 다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평판과 명예를 훼손했다니?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말에 엽승덕과 은정랑은 낯빛이 홱 변했고 은정랑은 얼른 이렇게 변명했다.
“저희가 순간 머리가 어떻게 되어 남의 집에 들어간 것뿐입니다. 저 사람들의 평판과 명예를 더럽힌 적은 결코 없습니다!”
“맞습니다, 대인. 저희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엽승덕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열심히 거들었다.
도둑질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으니 이 부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타인의 평판과 명예를 더럽혔다는 말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 입 다물거라!”
정 부윤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또 소란을 피우면 뺨을 맞을 줄 알거라!”
경당목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 듯 요란하게 울려 퍼지자 엽승덕과 은정랑은 놀라서 벌벌 떨었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 자네가 말해 보게.”
정 부윤의 말에 엽연채가 입을 열려는 찰나, 온씨가 엽연채를 막아서며 먼저 나섰다.
“얼마 전부터 어떤 빌어먹을 놈들이 함부로 입을 놀렸는지, 글쎄 소인이 실덕失德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사내들과 사통했고, 심지어 여식과 제민도 데리고 함께 놀아났다고 하더이다!”
이 말에 밖에 있던 백성들은 혀를 찼고 사십 대로 보이는 한 중년 사내가 이렇게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데……. 쯧쯧 알고 보니 이 부인이었구먼! 온씨 부인 이야기였어!”
그러자 한 뚱뚱한 아낙이 말했다.
“맞네. 연초에 이혼한 그 부인이잖아! 그런데 부인의 전남편이 바로 야행복을 입고 있는 저 사람이야. 옆에 있는 여인이 바로 전남편의 외실이고. 외실 하나 때문에 엽승덕도 참 온씨를 지독히도 괴롭히네.”
이어 아낙은 엽승덕이 얼마나 파렴치한 사람인지, 어떻게 정실부인을 핍박하여 첩실로 만들고 그 자리를 외실에게 내어 줬는지, 또 외실의 사생아를 위해 자신의 친자식을 어떻게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는지 등을 줄줄이 읊어댔다.
그 덕에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하던 사람들은 전부 엽승덕이 얼마나 비열하고 후안무치한 인간인지 상기했다. 그리고 온씨는 바로 얼마 전부터 외로움을 참지 못해 남정네를 유혹하는 음탕한 여인이라고 소문이 쫙 퍼진 그 사람이었다.
어제 온씨 이야기를 할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녀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처량하고 비참했던 그녀의 과거가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게다가 엽승덕은 지금 공당에 붙잡혀 온 상태였다.
온씨가 전에 겪었던 일과 엽승덕에게 해를 입었던 과거까지 더해지자 온씨를 대하는 태도가 단박에 달라졌다. 사람들은 다시 그녀가 불쌍한 사람이며 그저 오해를 받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알 수 없어 참고만 있었습니다. 결국 그동안 제 평판은 땅에 떨어졌고요!”
온씨는 노기등등해 말을 이어갔다.
“저 한 사람의 평판만 깎아내린 것이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과부 집 앞은 시비가 잦은 법이니까요. 하지만 제 곁에 와서 효도를 다하는 여식도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습니다! 어미로서 이를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이 나오자 자식이 있는 백성들은 전부 가슴이 뜨끔했다.
“제 여식이 구해 온 제민마저도 함께 평판이 깎이고 말았습니다. 정말이지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습니다.”
온씨는 이어 냉소를 지었다.
“제 몸에 있는 반점 이야기까지 퍼졌더군요! 하, 제 몸에 반점이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제 큰언니와 절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시종을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뿐입니다. 바로 엽승덕이지요!”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마자 일제히 엽승덕에게 시선이 향했다.
“제 평판과 명예를 더럽히기 위해 함부로 입을 놀린 겁니다!”
온씨는 차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증거가 없더라도 유언비어가 파다하게 퍼지기만 하면 평판과 명예는 자연히 흠집이 나지 않습니까. 이 점을 악용했던 것입니다!”
밖에 있던 백성들 중 일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온씨의 말처럼 원래부터 증거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밖에선 이런 소문이 돌고 있었다. 온씨가 한 사내를 꼬셨는데 하필 이 사내가 입이 가벼워 그녀의 몸 어느 부위에 반점이 있는지 무심결에 입 밖으로 꺼냈고, 그 후 온씨가 사내를 후렸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는 것이었다.
그 후 술집에서 어떤 나이 지긋한 설화자가 그저께 두 번째 사내가 온씨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소문은 점점 더 이상하게 변질되어 두 사람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열 명 가까이 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막상 온씨와 잠자리를 했다는 소문 속 사내들은 단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두 철석같이 소문을 믿었다. 게다가 떠들어댈수록 점점 더 흥이 올라 사람들은 그녀가 그런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사라져 버리니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만약 어제였다면 온씨가 나와 소문을 부인해도 사람들은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며, 도리어 온씨가 교활하게 변명을 늘어놓는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엽승덕이 또 못된 짓을 벌였고 온씨가 그를 제압해 이곳에 왔다. 여기에 전에 그녀가 엽승덕에게 호되게 당했던 일까지 더해지자 사람들은 온씨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거지 아이를 시켜 온종일 우리를 지켜보게 했던데, 참 지극정성이 따로 없더군. 우리가 엽씨 가문에서 물건을 좀 가지고 돌아오자 당신은 그 물건이 탐이나 무뢰배 둘을 데리고 물건을 훔치러 왔지.”
“그건 원래부터 우리 물건이다!”
엽승덕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는지 새파란 얼굴로 이렇게 반박했다.
“원래부터 우리 것이었다!”
“하, 당신들 거라고?”
온씨는 다시금 냉소를 흘리며 반문했다.
“당신은 무능한 인간이야. 태어난 순간부터 집안 돈으로 호의호식했지. 수재조차 되지 못해 집안에서 은화 몇천 냥을 들여 한직을 구해 줬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했잖아? 그런 당신이 어디서 돈이 나서 귀중한 물건들을 샀다는 거야?
외실을 끼고 살 때도 내 혼수를 훔쳐갔었지! 당신이 이 외실에게 마련해 준 물건도 전부 집안의 돈을 야금야금 빼내서 산 거잖아. 그 후 외실을 집안으로 들이면서 물건들을 다시 집으로 옮겨 왔고. 그런데 그건 원래부터 집안의 물건이었어.
당신은 집안에서 쫓겨났으니 이제 그 물건들은 당신의 것이 아니지. 당신 어머님이 내게 그 물건들을 팔아 달라고 하셔서 옮겨 온 거야. 그런데 당신들은 그걸 보더니 바로 훔치러 온 거지.
물건을 훔치러 온 건 그렇다고 쳐. 그런데 무뢰배들까지 데려오다니. 우리가 당신들을 붙잡는다 해도 그 무뢰배들이 우리를 희롱하러 왔다고 말하면 우리가 감히 고발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너희들이 함정을 파놓은 게 아니냐! 날 망치려고 함정을 판 거야!”
엽승덕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정 부윤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엽승덕을 쳐다보며 정곡을 찔렀다.
“애초에 네가 물건을 훔치려 하지 않았다면 온씨가 어찌 널 함정에 빠뜨릴 수 있었겠느냐? 네 머리는 참 이상하게 돌아가는구나. 네가 온씨를 해치려 하는데 온씨는 가만히 누워서 당하고 있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냐? 그런 뜻인 게냐?”
엽승덕과 은정랑은 표정이 확 굳어졌다.
“네가 온씨를 해치려 해서 온씨가 반격을 한 건데 그리하면 안 된다는 말이야?”
“그러니까요. 정말 비열한 인간이에요!”
밖을 둘러싼 백성들이 한입으로 동조했다. 엽승덕과 은정랑은 모욕감에 떨었으나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엽승덕은 별수 없이 다른 쪽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그도 현장에서 딱 걸렸으니 절도죄는 피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제가 물건을 좀 가져오려고 했던 건 인정합니다……. 그곳에 작은 상자가 하나 있는데 그… 그 안에 저와 정랑의 서신이 들어 있습니다. 저희는 그저 그걸 가지고 오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밖에 떠도는 유언비어는 제가 퍼뜨린 게 아닙니다! 제가 무슨 돈으로 그런 짓을 꾸몄겠습니까!”
그리 말한 엽승덕이 온씨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꾀어낸 사내가 소문을 퍼뜨린 것뿐이잖아!”
그는 결단코 이 일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안 그러면 엽연채와 온씨가 오명을 벗게 되지 않겠는가? 이 빌어먹을 것들이 무너지는 꼴을 가까스로 볼 수 있게 됐는데 어떻게 그 기회를 날려 버리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