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7화
신바람이 나서 떠난 작은 거지와 달리 엽승덕과 은정랑은 낯빛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두 사람은 굳은 얼굴로 겨우 한 걸음씩 떼며 영존거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정원의 낭하에 앉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물건들은 원래 우리 것이오. 자기들이 뭔데 우리 물건을 가져가 돈으로 바꾼다는 말이오!”
엽승덕은 분통이 터져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럼 저희가… 가져오면 되죠!”
은정랑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가져온다는 말이오?”
엽승덕도 진작 그런 생각을 해 봤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그것들한테 붙잡히기라도 하면…….”
은정랑은 속으로 ‘그런 것도 못 하니! 이 머저리 같은 놈!’ 하고 욕을 퍼붓고는 입을 뗐다.
“집문서가 있단 말이에요!”
“뭐라 했소?”
엽승덕은 깜짝 놀라 낯빛이 확 변했다.
“지금 저희가 살고 있는 이 집 집문서요!”
은정랑이 이를 악물고 외쳤다.
“그 보석함 안에 있단 말이에요.”
영존거의 집문서는 줄곧 은정랑이 보관해 오다가 엽씨 가문에 들어갈 때 가지고 들어갔다. 나중에 쫓겨나면서 빈손으로 나오게 된 셈이었다. 송화 골목 영존거의 집문서를 포함해 그 어떤 물건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그 탓에 그동안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했고, 거기에 전전긍긍하기까지 하며 지내야 했다. 엽씨 가문 사람들이 언제 물건을 뒤지다가 집문서를 발견해 이 집을 팔아 버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살 곳마저도 없어지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힘든 형편인데 살 곳마저 잃게 되면 그야말로 숨통이 끊어지는 셈 아니겠는가? 그러니 집문서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물론 그동안 집문서를 손에 넣지 못한 건 이런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저히 영귀원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엽씨 가문은 후부였던 집안이니만큼, 영귀원에 들어가려면 여러 개의 문을 거쳐야 하는데, 문마다 여종과 어멈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장명가의 추씨 가문 저택은 상황이 달랐다. 그 저택은 작은 삼진원三進院 저택에 불과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엽승덕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영존거는 이진원二進院 저택이고 위치도 좋고 보수도 잘 되어 있어 적어도 은화 이천 냥은 될 겁니다.”
은정랑이 말했다.
“이 집을 판 다음 다시 작은 집을 하나 사면 천 냥은 남을 거예요.”
집문서만 손에 넣으면 먹고 입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상자 안에는 집문서만 있는 게 아니에요. 장신구도 있어요. 다른 건 말할 것 없고 장신구가 든 그 보석함만 가지고 돌아오면 돼요. 그것들만 해도 적어도 천 냥 이상은 나갈 겁니다.”
은정랑의 말을 듣고 나니 엽승덕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설렜지만 그래도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 물건들을… 어떻게 그것들이 가져다 팔 수 있는 거지? 가문에서 집문서의 존재를 몰랐다 하더라도 그 물건들은 아무리 못해도 몇천 냥은 나갈 것이오. 지금 가문은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상태인데 어찌 그것들에게 그 물건들을 넘겨줬겠소?”
“나리, 그것들이 새집을 산다고 했던 말을 못 들으셨어요?”
은정랑은 냉소를 지었다.
“지금 소문이 심하게 퍼져 있고 사내들이 매일같이 그곳에서 그것들을 희롱하고 있어요. 당연히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났겠죠. 유씨 가문에서 벌인 짓임을 그것들도 알아차렸을 거고요. 그러니 감히 반항할 엄두도 못 내고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집을 사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한데 그 빌어먹을 계집애가 인색하잖아요. 어디 몇천 냥이나 들여 집을 사려고 하겠어요. 그러니 엽씨 가문에서 얻어 낼 생각을 한 거죠.”
엽승덕은 깜짝 놀랐고 은정랑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긴, 그 불효막심한 계집애는 도량이 좁고 인색함이 몸에 밴 녀석이요. 또 남을 음해하는 걸 좋아하지. 전에 이채의 혼수도 그 녀석이 수를 써서 전부 빼앗아 갔다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가문에서 왜 그것들에게 돈을 주겠다고 승낙했느냐 하는 것이오.”
“나리, 벌써 잊으신 거예요? 나리의 누이동생이 탐화에게 시집가지 않았습니까? 그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거예요.
더 말할 것도 없어요. 그 빌어먹을 계집애가 분명 은혜를 갚으라는 명목으로 협박을 했겠죠. 자기는 집을 살 돈이 없으니 엽씨 가문이 내놓아야 한다고 압박했을 거예요. 가문에서는 당연히 주기 싫었겠지만 그래도 그 계집애에게 은혜를 입은 셈이니 저희 물건을 팔아서 쓰라고 보답한 겁니다.”
은정랑의 말에 엽승덕은 화가 나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아마 땡전 한 푼도 그것들에게 주지 않으려고 했을 거요. 하지만 내 계모는 안 그랬을 수도 있소. 그 불효막심한 계집애가 영교를 도왔으니 그 계집애가 입만 열면 분명 주려고 했을 것이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은정랑은 차게 웃으며 동조했다.
“아버님은 노망이 들었으니 어쩌면 그 일을 이미 잊으셨을지도 몰라요. 나리의 계모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거겠죠.”
엽승덕은 생각하면 할수록 그럴싸하다 싶었다. 게다가 그동안 그토록 빈곤하게 지냈으니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는 재물 생각에 흥분을 금치 못하고 눈이 다 벌게졌다.
지금 유씨 가문에서 그들을 손보고 있음이 분명해졌고 제민은 그들의 집에 머물고 있다. 그들 모녀는 유씨 가문 때문에 놀라서 간담이 서늘할 테고 제 살길 찾기도 바쁠 텐데, 어디 이쪽까지 생각이 미치겠는가?
하지만 신중한 성격의 은정랑은 물불을 가려 달려드는 사람이었다.
“제게 좋은 계책이 있어요!”
두 사람은 함께 대책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고, 의논하면 할수록 엽승덕은 실행 가능한 계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은정랑은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엽승덕은 가슴이 벅차올랐고 정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곧 은화 수천 냥을 손에 넣게 된다!’
그리되면 이 밑천을 가지고 조그만 상점을 열면, 작은 상점에서 점차 큰 상점으로 변할 거고 조금씩 돈을 모아 부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다시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 자신의 인생은 응당 이래야만 했다. 출신부터 고귀한 후부의 세자로,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원래부터 꽃길만 걸을 운명이었다. 지금은 그저 한순간의 실수로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고 있는 것뿐이다.
능력 있는 사람은 어디에 간들, 어느 지경에 이르든 다시금 재물운이 일어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저 기회가 없었을 뿐인데 이제 그 기회가 눈앞에 찾아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미시未時(오후 1시~3시)까지 상의를 하고 나서야 적당히 마무리 짓게 되었고 엽승덕은 준비를 하러 문을 나섰다.
자시子時(오후 11시~새벽 1시)가 되니 야시장 상인들도 이미 장사를 마친 후였다. 도성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몇몇 부잣집 대문 밖에 걸린 등롱만이 모퉁이를 비추고 있었다.
검은색 옷을 입은 몇 사람이 수상쩍은 낌새를 풍기며 작은 골목을 지나 마침내 장명가의 한 어두운 골목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총 네 사람이었는데 전부 몸에 쫙 달라붙는 검은 야행복을 입고 있었고, 역시 검은색 천 조각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었다.
오늘 밤 일을 위해 엽승덕은 꽤 큰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이 복장을 구하는 데만 해도 은화 한 냥 정도를 썼다. 나머지 두 사람이 검은색 옷이 없다고 하니 엽승덕은 오늘 밤 무사히 빠져나오기 위해 그들에게 돈을 대 줄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엽승덕은 자신이 그들을 데려와 이득을 챙기게 해 주는데 옷값까지 내줘야 하니, 또다시 화가 났다.
“형님, 그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키가 큰 마른 체형의 한 사내가 물었다.
“바로 저 앞이다.”
엽승덕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너희는 내 뒤를 따라오거라.”
“흐흐흐, 진작부터 그 계집애가 마음에 들었는데. 오늘 밤…….”
키가 작고 뚱뚱한 체형의 사내가 음흉하게 지껄였다. 그러더니 조금 걱정이 되는 눈빛으로 엽승덕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순조롭게 진행될까요?”
“그러게 말이야!”
키 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어찌 됐든 간에 저곳도 부귀한 사람이 사는 곳이니 안에 남아도는 게 하인일 텐데 우리가 이렇게 들어가면…….”
“걱정 말거라.”
엽승덕이 냉소를 지으며 말허리를 잘랐다.
“너희들, 내가 누구인지 잊은 게냐? 그것들 집에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내가 모르겠느냐? 도좌의 천당穿堂(본채로 통하는 통로)에 어멈들이 몇 명 지키고 서 있을 텐데, 그것들만 때려눕히고 수화문으로 들어가면 쓸모없는 어린 여종들만 몇 명 남아 있을 게다.
게다가 그 여종들은 후조방에서 지내고 있지! 그쪽만 놀라게 하지 않으면, 본채에서 지내는 주인 몇 명만 기절시키면 끝이야. 조용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게다. 우리가 일을 다 보고 돌아갈 때까지 그것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게다.”
“수화문이 뭡니까?”
키 작은 사내가 물었다.
“수화문은 대문으로 들어선 뒤 직진하거나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가면 보이는 문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일진원一進院 구조가 눈에 들어올 텐데, 도좌와 내원內院의 높다란 담장 사이에 있다. 이 저택은 고작해야 이진원 혹은 삼진원 저택이야. 더 큰 저택들은 이렇게 배치되어 있지 않지.”
엽승덕은 견문이 없는 이 사내들을 멸시했다.
검은 옷을 입은 이 두 사내는 무뢰배로 둘 다 누추하고 허름한 집에 살았다. 그러니 부잣집 저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찌 알겠는가? 수화문, 후조방이 뭔지 들어나 봤겠는가? 그들은 엽승덕이 구구절절 조리 있게 말하고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부잣집도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너희는 내 말대로 움직이면 된다. 가자!”
엽승덕은 그리 말하고는 몸을 낮추며 앞으로 걸어갔다. 무뢰배 둘은 얼른 그의 뒤를 쫓아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작고 마른 체형의 다른 한 명을 쳐다봤다.
키 큰 사내가 물었다.
“이자는 누굽니까?”
“내 형제다.”
엽승덕은 별다른 말을 더 하지 않고 까치발을 든 채 빠르게 나아갔다. 뒤의 세 사람이 얼른 그를 쫓아갔다.
그들은 암흑에 휩싸인 골목을 나와 다시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고 골목 끝에 다다르자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바깥쪽을 보니 커다란 저택이 보였는데 대문 양쪽으로 노란빛을 발하는 등롱이 두 개 걸려 있었다.
“이곳이다.”
엽승덕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하얗게 칠해져 있는 그 저택의 높다란 담장을 가리켰다.
“잘 듣거라. 이 담장을 넘어가면 바로 천당인데 그곳에 커다란 마차 두 대가 세워져 있을 게다. 그것들이 외출할 때 쓰는 마차다. 어멈 몇 명이 거기를 지키고 서 있을 건데 우린 그 어멈들을 쓰러뜨린 후 내원으로 들어가 그 모녀를 쓰러뜨릴 거다. 그 후엔 너희들 맘대로 하거라!”
“예.”
두 무뢰배는 얼른 답했고 입에서 군침이 다 흐를 지경이었다.
엽승덕은 두 눈을 살짝 깜빡이며 맨 뒤에 서 있는 아리잠직한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 그 체구가 작은 사람은 바로 은정랑이었다.
이렇게 큰일을 머저리 엽승덕에게 맡기자니 은정랑은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건 자신이 가진 유일한 희망이다 보니 엽승덕이 나중에 따로 숨겨 두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니 반드시 직접 나서야 했다.
네 사람은 그렇게 살금살금, 높다란 담장 아래까지 더듬거리며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