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4화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고 엽학문은 목이 메어 숨이 탁 막혔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난 그저 네가 걱정될 뿐이다.”
당연히 엽씨 가문이 연루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면 세도가 앞에서 벌벌 떠는 겁쟁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엽연채가 엽영교에게 신랑감으로 탐화를 구해 줬으니, 정말로 엽연채와 관계를 끊게 되면 사람들은 저를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욕할 것이었다.
“맞아요!”
이때 엽이채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큰언니 말이 맞아요. 큰언니가 알아서 잘할 거예요!”
“누가 아니래. 사람을 구하는 건 좋은 일이지!”
손씨와 엽승신도 동참해 ‘허허’ 웃었다.
지금 제민이 뜨거운 감자인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자칫 잘못했다간 유씨 가문과 유곡요에게 보복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손씨네는 엽연채와 제민이 제대로 엮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게다가 지금 주운환은 전쟁터에 죽으러 갔고, 전쟁에서 참패했던 적이 있는 주씨 가문은 이미 충분히 처참한 신세였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가 위험을 무릅쓰고 제 명을 단축하는 짓을 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고 있었다!
엽이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주씨 가문이 망해 버리고 거기다 유씨 가문이 손을 봐 주면 엽연채는 정말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참, 언니. 형부가 보낸 서신은 받으셨어요?”
엽이채는 관심 가득한 얼굴로 엽연채를 쳐다봤지만 그 표정엔 비소가 묻어 있었다. 엽연채는 그녀가 또 자신을 조롱하려 한다는 걸 알고 짜증이 치밀었다.
‘쳇. 정말이지 그만할 수는 없는 거니!’
엽이채는 어떤지 몰라도 자신은 그야말로 진절머리가 났다. 엽연채는 더 이상 그녀와 싸우고 싶지 않아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아직 가는 중인가 봐! 참, 제부가 요즘 국자감에 안 간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엽이채와 장박원, 엽승신 부부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장박원은 과거 시험에서 낙방한 후 주운환, 진지항과 비교까지 당해 주련柱聯(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조차도 만들지 못할 정도로 크게 상심했다.
엽연채가 국자감을 언급하자 엽이채와 장박원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하지만 엽연채는 그들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곧 있으면 국자감에 다닌 지도 반년이네요. 춘시가 3년에 한 번씩 있죠? 다음 춘시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시간이 참 빠르다니까요. 제부도 열심히 노력해서 다음 시험에선 반드시 진사로 합격해야 합니다.”
장박원과 엽이채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진사로 합격한다는 말은 그가 일갑 안에 들지 못할 거라는 뜻 아닌가!
“진사로 붙기만 하면 사돈 할아버님이 3품 고관이시니 분명 제부에게 좋은 자리를 찾아봐 주실 수 있을 거예요.”
엽연채의 이어진 말에 엽이채와 장박원은 분통이 터져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이 말은 장박원이 기껏해야 등수가 낮은 동진사나 될 수 있을 테고, 그럼 장찬이 뒤에서 손을 써 줘야만 번듯한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의미였다.
손씨는 화가 나서 대뜸 이리 받아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박원이는 반드시 일갑 안에 들 겁니다!”
장박원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일갑 안에 드는 일이 어찌 그리 쉽겠는가.
“흐음?”
엽연채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호호, 그럼 제부도 네 형부처럼 장원이 되기를 기원해야겠구나!”
장박원과 엽이채는 피를 토할 뻔했다. 이건 장박원의 거만함을 비웃는 말이었다. 분명 시험에 붙지 못할 거라는 의미 아닌가?
“장원은 무슨, 동진사로 합격만 할 수만 있어도 다행이다.”
엽학문은 픽 비웃음을 날리더니 장박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기 부리지 말고 제 능력껏 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다.”
장박원은 화가 나 목구멍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듯했다. 전에 엽학문이 자신을 얼마나 아꼈는가? 그런데 이제 탐화인 사위가 생겼다고 저를 완전히 멸시했다.
그랬다. 엽학문은 장박원을 멸시했다. 장박원은 전엔 자신의 손녀사위였지만 이제는 빌어먹을 숙적의 손주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가 평생 시험에 붙지 못하길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되면 꼴이 아주 우습지 않겠는가.
장박원은 억지웃음을 짓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엽이채 역시 분노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엽연채는 풉 웃었다.
‘좋구나. 이제야 저것들이 토를 안 다네!’
엽이채와 장박원은 엽연채의 공세에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두 다리만 덜덜 떨어댔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뜨고 싶은 심정이었다.
엽이채는 엽연채에게 무어라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엽연채가 또 장박원의 약점을 건드릴까 봐 울분을 참으며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미움과 원망을 담아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주운환은 옥안관에서 목숨을 잃고 엽연채는 유씨 가문에 찍혀 지독한 복수를 당하라고 말이다.
“다들 도착하셨네요. 좀 늦었습니다.”
이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영교와 진지항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영교가 왔구나!”
묘씨는 엽영교를 보자마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엽영교와 진지항은 앞으로 다가가 엽학문과 묘씨를 향해 예를 올렸다.
“만수무강하시고 무궁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 그래. 어서 일어나거라.”
묘씨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엽영교와 진지항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차례로 인사를 건넨 후에 엽연채 옆에 앉았다.
묘씨는 얼른 엽영교와 진지항에게 진씨 가문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봤고 그들은 하나하나 차근히 대답해 주었다.
얼마 안 지나 오시가 되었고 사람들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 * *
엽연채가 추씨 가문 저택에 돌아와 보니 마침 온씨가 수화문에 세워진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채 마마 등은 온씨의 짐을 옮기고 있었다.
“어머니, 돌아오셨군요!”
엽연채는 온씨를 보자마자 얼른 그녀에게 달려갔다.
“연채야!”
온씨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엽연채는 온씨의 주변을 살펴보더니 조그만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왜 오라버니는 같이 안 있어요?”
“네 오라버니는 아직 능성에 있단다.”
온씨는 엽연채의 손을 잡고 초수유랑을 걸어가며 능성 쪽 일을 들려주었다.
“의원이 괜찮아 보이더구나. 다리 상태가 더 나아지게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단다. 적어도 지금처럼 그리 심하게 절지는 않을 거라고 하더구나. 네 오라버니는 그곳에 남아 치료하기로 했고, 이 어미는 집에 남아 있는 네가 너무 걱정이 되어 돌아온 거란다.”
“고칠 수 있다니 잘됐네요.”
엽연채는 그녀와 팔짱을 끼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참, 오늘이 네 할머니 생신인데 축하연을 열었니?”
온씨가 화제를 바꾸었다.
“손님을 초대하지는 않고 그냥 가족들끼리 모였어요.”
엽연채는 그리 대꾸하며 온씨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온씨는 옷을 갈아입은 후 응접실로 가서 매화 문양이 들어간 기다란 탑상 위에 앉았다.
이때, 제민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온씨에게 예를 올렸다.
“부인. 문안 인사 드립니다.”
“그리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된단다.”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이 낯선 소녀가 바로 딸이 구해 온 제민임을 알아봤고, 그 환골탈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민이 구출되어 막 이곳에 왔을 때 그녀는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얼굴에는 타박상을 입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제 눈앞의 소녀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는 열일곱 살쯤 되어 보였다. 앞섶이 교차하는 푸른색 유군을 입은 그녀는 늘씬한 몸매에 청초한 외모였는데, 보자마자 바로 호감이 가는 인상을 풍겼다.
이어 온씨의 머릿속에 제민이 처한 상황이 떠올랐다. 자신 또한 인생의 전반부는 사내에게 고통을 받으며 살았기에, 사내에게 배신을 당한 제민을 보니 자연히 동병상련을 느꼈다.
“여기서 마음 편히 지내거라. 여긴 집도 크고 연채도 자주 오지 못하니 여기서 내 말동무나 되어 주렴.”
“감사합니다. 부인.”
제민은 얼른 또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
* * *
칠월이 되자 날씨가 선선해지며 유월의 무더위는 천천히 물러갔다. 아직 그리 시원하다곤 못해도 적어도 유월처럼 그렇게 덥지는 않았다.
엽연채는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어 놓은 여름옷을 주운환이 입어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덧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싸늘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공을 들여 그가 입을 여름옷의 소맷부리와 옷깃에 해당화를 많이 수놓았었다.
* * *
오늘 엽연채와 온씨, 제민은 식사를 하러 함께 거리로 나갔다.
그들이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좀스럽게 생긴 젊은 사내 몇 명이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내들은 엽연채 일행을 이리저리 보더니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내들의 끈적끈적한 눈길이 엽연채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엽연채는 표정이 확 굳었고 제민은 얼른 돌아서서 그 사내들을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뭐 하는 짓이냐?”
그 사내들은 제민의 호통에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음탕한 웃음을 지으며 실실댔다.
“오오, 성깔이 보통이 아닌데? 딱 내가 좋아하는 유형이야! 흐흐흐!”
제민은 표정을 굳히더니 바닥에 있는 벽돌 하나를 홱 집어 들고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들은 깜짝 놀라 ‘으악’ 소리를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화가 난 제민은 조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아까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며 욕을 퍼부었다.
“저런 미친 것들을 봤나!”
“뭐 저런 개망나니 같은 것들이 다 있네요!”
추길도 욕을 하더니 엽연채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팔짱을 꼈다.
“아가씨, 어서 가시죠. 식사만 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요.”
엽연채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에도 많은 사내들이 그녀를 쳐다보긴 했지만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쳐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온씨도 얼른 엽연채의 손을 잡았고 그들은 함께 풍화루風和樓로 갔다.
그들이 풍화루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 있던 손님들은 잇달아 고개를 돌려 그들을 한 번 쳐다보더니 동석한 사람들과 쑥덕거렸다.
얼굴에 다시 그늘이 드리운 엽연채는 온씨 등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 객실 안에서 식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뒤 응접실에서 엽연채는 화본을 보고 온씨는 수를 놓았다.
이때, 추길이 지독하게 뜨거운 초가을 늦더위를 견디며 정원을 지나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숨을 헐떡거렸다.
“추길아, 어디 갔다 오느냐?”
온씨는 얼굴이 땀범벅이 된 추길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요 며칠 제가 거리에 나갈 때마다 웬 사내들이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걸 봤습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또 그런 일이 있었던 겁니다. 방금 전 요릿집에 있던 사내들이 저희를 보던 눈빛도 아주 이상했고요. 그래서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추길은 말을 하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니?”
혜연은 추길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분명 상황을 알아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후안무치한 것들이 글쎄…….”
추길은 너무도 화가 나서 말을 잇지 못했다.
“글쎄 뭐?”
혜연이 독촉하자 추길은 조금 더듬더듬하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이 글쎄 마님께서… 웬 사내와 밖에서 사통을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