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83화 (383/858)

제383화

엽승덕은 부잣집 사람을 보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빈곤한 백성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싶지, 부잣집이나 이런 귀족 집안의 사람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 또한 전에는 이런 사람들 중 하나였는데, 이젠 서신이나 써 주는 초라하고 궁상맞은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니 이런 권세가들을 위해 서신을 써 주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욕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빈곤하고 초라한 신세이고 또 손님이 앞으로 걸어왔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 한데 딱 봐도 부잣집 사람인 것 같은데 댁에 글을 아는 사람이 많을 것 아니오. 그런데 굳이 날 찾을 필요가 있나?”

그 여종은 코웃음을 치며 비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쪽이 그 엽승덕이라는 사람이죠?”

그 말에 엽승덕은 표정이 확 굳어졌다. 이 여종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이어 수치심이 몰려왔고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내며 말했다.

“가 보시오. 난 그쪽 서신은 안 쓸 것이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물건을 정리해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더 이상 이런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리해 버리면 기가 죽은 것처럼 보일 테고 품위도 잃게 된다.

그런데 이때 ‘탁’ 소리와 함께 은빛 찬란한 조그만 은덩이가 그의 탁자 앞에 놓였고, 은덩이는 빙그르 한 바퀴를 돌았다. 엽승덕은 놀라서 두 눈을 번쩍 떴다. 이 은덩이는 족히 열 냥은 나갈 것이다.

은덩이가 갖고 싶어 안달이 난 엽승덕은 얼른 손을 뻗어 그 은덩이를 잡았고, 믿기지 않는 듯 그것을 이로 깨물어 보았다.

“진짜구나, 진짜야…….”

그는 감격한 나머지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표정이 확 굳어졌다. 방금 너무 낯부끄러운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돈에 아주 굶주린 듯한 모습을 보였다.

좀 더 고상한 반응을 보였어야 했다. 가난하게 지내도 기개는 높아야 했다. 돈을 돌같이 봐야 스스로를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추태가 낱낱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엽승덕은 당장이라도 이 은덩이를 저 여종의 얼굴에 집어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야만 고상하고 기개가 있어 보이며 서신이나 쓰는 보통의 궁상맞은 서생처럼 보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일단 쥐고 나니 은덩이가 손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내던질 수가 없었다. 하여 엽승덕은 그저 새파란 얼굴로 이렇게 물을 뿐이었다.

“무슨 내용의 서신이 필요한가?”

“좋은 내용이요.”

그 여종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엽승덕에게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이야기했다.

엽승덕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두 눈을 반짝이며 흥분한 모습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탁탁 두드리며 장담했다.

“걱정 마시게. 그쪽이 원하는 글을 내 반드시 써 낼 것이니!”

그는 그리 말하고는 고개를 숙이더니 격한 감정에 북받쳐 글을 써 내려갔다. 무려 삼각이 흐르고 나서야 엽승덕은 마침내 서신을 완성했다.

그 여종은 서신을 받아 들고는 그에게 또 은화 열 냥을 건넸다.

엽승덕은 감격해 마지않았다. 손에 이십 냥의 은화가 생겼으니 어디 노점을 펴고 있을 마음이 들겠는가?

그는 들고 있던 붓을 내팽개치더니 곧장 맞은편에 있는 요릿집으로 달려갔다. 통닭구이를 하나 시켜 우걱우걱 씹어 먹는데, 허겁지겁 먹느라 얼굴과 손엔 온통 육즙이 잔뜩 묻어 버렸으나 개의할 정신이 없었다.

식사를 끝낸 엽승덕은 한 마리를 더 포장한 다음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 시각, 은정랑은 집 안에 은화를 숨기고 있었다. 그녀는 허대실이 준 은화 한 냥을 허서 방에 있는 쥐구멍에 감춰 뒀다.

“정랑!”

이때 밖에서 엽승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정랑은 깜짝 놀라 비틀거렸고 속으로 고약한 놈이라고 욕을 해댔다. 자신이 나쁜 짓을 벌이고 있을 때 또 갑자기 들이닥쳤으니 말이다.

그녀는 서둘러 은화 한 냥을 쥐구멍 속에 밀어 넣은 뒤 의자를 밀어 그곳을 가렸다.

은정랑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저 머저리 같은 놈!’

그녀가 탁탁탁 발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가 보니 엽승덕이 의자, 탁자 등의 물건을 전부 들고 돌아와 정원에 서 있었다.

“이렇게 일찍 장사를 접은 거예요?”

은정랑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엽승덕은 자신을 원망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수중에 생긴 은화 이십 냥을 떠올리자 이런 사소한 불쾌감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격양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랑. 이것 좀 보시오. 내가 오늘 은화 이십 냥을 벌었소.”

“네? 정말이에요?”

은화 이십 냥을 벌었다는 소리에 굳었던 은정랑의 얼굴이 싹 펴지며 웃음꽃까지 피어났다.

“어떻게 벌었어요?”

엽승덕은 아까 여종의 일을 은정랑에게 말해 줬고 그녀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기쁘고 또 흥분이 밀려왔다.

그녀는 진작부터 엽연채와 그 식솔들을 손봐 주고 싶었다. 하나 지금 먹고사는 문제조차 해결을 못 하고 있으니 어디 복수에 나설 여유가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먼저 다가왔으니 당연히 그쪽에 편의를 제공할 것이다.

돈도 벌 수 있고 엽연채와 그 식솔들이 불운한 일을 당해 나가떨어지는 꼴도 볼 수 있다.

손안에 은화 이십 냥이 생기자마자 엽승덕을 아니꼬워하던 은정랑의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어찌 됐든 간에 그는 전에 후부의 세자였고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러니 뭐가 됐든 말이나 씻기는 천한 허대실보다는 나았다. 조금 나은 게 아니라 백배 천배 나았다.

* * *

날씨는 점점 더워졌고 곧 있으면 칠월이었다.

유월 스물닷새는 묘씨의 생일이었다.

그러나 엽씨 가문은 올해 큰 소동이 일어났었으니 무슨 체면으로 성대하게 생일 축하연을 치를 수 있겠는가? 그저 가까운 친척들을 불러 밥 한 끼 먹는 걸로 생일을 축하하는 셈 치기로 했다.

이날 아침이 밝자마자 엽연채는 마차를 타고 엽씨 가문으로 갔다. 그녀는 수화문에서 마차에서 내려 곧장 안녕당으로 달려갔다.

안녕당 서차간으로 들어서니 탑상에 앉아 있는 엽학문과 묘씨의 모습이 보였다. 엽승강 부부, 엽승신 부부는 오른쪽에 놓인 권의에, 엽이채와 장박원, 엽영은 왼쪽에 놓인 권의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씨는 엽연채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와 함께 반겼다.

“어머. 연채가 왔구나!”

“할아버지, 할머니, 숙모, 숙부…….”

엽연채는 미소 띤 얼굴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눴다.

“왔구나. 어서 자리에 앉으렴.”

묘씨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예.”

엽연채는 오른쪽에 놓인 권의에 앉았다.

엽이채는 엽연채를 보더니 붉은 입술을 추켜올리며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씨가 말했다.

“연채야……. 요즘 뭐 하느라 바쁜 거니? 들어 보니 네 큰이모 댁에서 지낸다고 하던데.”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까닭을 알려 주었다.

“시어머니께서 저보고 어머니 곁에 자주 있어 드리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어머니가 얼마 전에 오라버니와 함께 의원을 만나러 가셨어요. 집 안에 잡다한 물건이 많은데 어머니가 안 계시면 여종들이 물건을 몽땅 팔아 버릴까 염려되어 저보고 와서 집을 봐 달라고 하셨고요.”

나씨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추더니 잠시 생각을 하고선 이렇게 말했다.

“연채 네가 소저 한 명을 구해 집으로 데려갔다고 들었다.”

그 말에 엽이채와 장박원은 비웃음을 지었다.

상석에 앉아 있는 묘씨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엽학문은 잔뜩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곱지 않은 눈길로 엽연채를 쳐다보았다.

유곡요 일은 이미 도성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대제 제일의 문신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대제 최고의 명문가 규수인 유곡요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내에게 시집간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는데, 혼례식 날에 그런 문제가 생겨 사람들은 하마터면 배꼽을 잡고 웃을 뻔했다.

초빙풍은 소란을 피운 소녀가 동향 사람이라 그저 집에 잠시 머무르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뜻밖에도 저를 넘보려 했던 거라고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자리에 있던 손님과 백성들도 다 눈치가 빤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초빙풍은 일개 한미한 가문의 진사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최고의 명문가 규수를 아내로 맞이했으니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의 시기를 받으며 지저분한 구설수에 오르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런 사소한 풍설에도 백성들이 알아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었다. 다들 초빙풍이 함께 고생해 온 정혼녀를 버린 거라고 입을 모았다.

어떤 호사가는 초빙풍이 정혼녀가 벌어 온 돈으로 공부해서 공명을 얻었는데 과거 시험에 합격하자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고, 이에 정혼녀가 그의 혼례식에 찾아와 소란을 피운 거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초빙풍이 정혼녀를 집에서 쫓아냈는데 주 공자의 아내가 그 제씨 소녀를 데려갔다고도 했다.

지금 나씨는 바로 그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엽연채는 고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말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게 칠층 불탑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잖아요.”

그 말에 나씨와 묘씨 등은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나씨는 유감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에휴……. 하지만 초 대인은 유씨 가문 사위다. 또 그 아내가 유씨 가문 여식이잖니. 들어 보니 그 소녀는 초 대인의 정혼녀라고 하던데…….”

이 말의 속뜻은 제민은 유씨 가문의 적이니 지금 엽연채가 유씨 가문의 적이 됐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유씨 가문을 포악하고 파렴치한 가문으로 몰아세우는 셈이었다. 나씨는 그저 변죽만 울리는 수밖에 없었다.

엽연채는 짐짓 모르는 체했다.

“유씨 가문 사위는 그 소녀가 자신의 정혼녀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 말에 나씨와 엽승강은 입꼬리를 실쭉거렸다.

나씨가 말했다.

“아무튼 남의 혼례식에 가서 소란을 피운 걸 보니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구나. 어서 그 소녀를 쫓아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 말이 맞다! 괜히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거라!”

엽학문은 엽씨 가문이 연루될까 봐 두려워하며 미간을 째푸렸다.

“숙모,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엽연채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엽학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렇게 두려우시면 차라리 저와 관계를 끊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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