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2화
“당신이었군!”
은정랑은 두 눈을 부릅뜨더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이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이렇게 말했다.
“허대실! 이 파렴치한 놈!”
은정랑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치더니 담벼락에 기대어 놓은 대나무 장대를 집어 들고 냅다 달려가 허대실을 향해 휘둘렀다.
이곳에 온 사람은 다름아닌 은정랑의 전남편 허대실이었다!
“이 파렴치한 놈. 양심은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 같은 놈! 내 오늘 쓰레기 같은 네 놈을 때려죽일 것이다!”
은정랑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장대로 전남편인 허대실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이 비천하고 파렴치한 죽일 놈의 마부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여전히 호의호식하는 대갓집 마님일 테고 후부 세자의 부인일 것이다. 지금처럼 평판은 땅에 떨어지고 변변치 않은 음식을 먹는 곤궁한 처지로 전락했을 리가 없었다.
“악! 정랑! 난 당신의 남편이오. 당신 사내라고! 어떻게 남편을 죽이려 하오!”
허대실은 몇 대 맞더니 대나무 장대를 꽉 움켜쥐며 다급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멈추시오! 멈춰! 먼저 잘못한 건 당신과 서가 아니오! 두 사람은 돌로 내 머리를 찍기까지 했소! 날 죽이려고 했잖소!”
허대실은 그리 말하며 원망이 섞인 두 눈을 부릅떴다.
은정랑은 그의 호통에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낯빛이 조금 변했고 화도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몇 초 후 다시 목에 힘을 빳빳이 주고 고함을 쳤다.
“능력 있으면 다시 고발해 보시든가! 증거도 없는데 어디 우릴 고발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썩 꺼져 버려!”
“정랑…….”
허대실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먼저 변심했소. 그런데 나도 그런 일을 벌여 당신 인생을 망쳤으니 서로 비긴 것이오. 이제 상대방을 원망하지 말고 이렇게 끝난 걸로 합시다!”
“좋아. 끝내자고. 그러니 썩 꺼져!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은정랑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비긴 걸로 치고 서로 원망하지 말자니!’
은정랑은 이 천하고 파렴치한 마부가 죽도록 미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들 모자가 어떻게 지금 같은 처지로 전락했겠는가?
“우리 지금… 예전의 그때로 돌아간 것 같구려. 가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진실했던 나날로.”
허대실은 그때를 그리워하며 뜨겁게 갈망하는 얼굴로 은정랑을 쳐다봤다.
은정랑은 그가 그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소름이 확 끼쳤고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누가 그와 함께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예전의 시절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마치 자신을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자 같은 수준의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하다니 턱도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같은 계층의 사람일 수 있겠는가! 자신은 고귀한 사람이고 후부의 부인이 될 운명을 타고났으며, 그에 반해 허대실은 그저 천하고 더러운 마부에 불과했다.
허대실이 그렇게 끌어다 붙여 같은 수준인 것처럼 말하니, 은정랑은 자신까지 품위가 떨어져 버리는 것 같아 굉장히 화가 났다.
“꺼져! 썩 꺼지라고!”
은정랑은 냉담한 얼굴로 버럭 호통을 쳤다.
“아직도 화가 난 것이오?”
허대실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실 나도 어쩔 수 없었소! 그리하지 않았다면 그 장원 급제자가 날 죽였을 것이오! 그러니 정랑, 내 곁으로 돌아오시오.”
당시 허대실은 화가 나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분명 은정랑은 자기 여인인데 후부에 들러붙어 부잣집 마님이 되겠다고 떠나 버렸으니 말이다.
그전에 자신이 은정랑과 허서 두 사람을 데리러 갔을 때, 그들은 저를 장군이라고 오해해 함께 떠나려고 했었다.
사실 솔직히 신경이 좀 쓰이긴 했다. 자신의 매력으로 그들을 데려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장담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뭐가 됐든 간에 결국 은정랑 모자는 벽돌로 남편이자 아버지인 자신을 찍어 죽이려고 했다.
그러니 정말이지 화가 나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가슴속에 불만이 가득했다. 자신은 여전히 천한 마부에 불과한데, 가족들은 부귀를 누리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자신을 저버렸으니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진창에서 굴러도 다 함께 굴러야 했다. 자신은 천한 신분인데 왜 가족들만 높은 곳에 오른단 말인가?
엽씨 가문 저택 앞에서 큰 소리로 고함을 쳤던 일은 지금 떠올려 봐도 속이 시원하고 후련했다. 자신이 진창에서 살면 그들도 잘사는 건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가난하면 다 같이 함께 가난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여전히 아내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말을 닦는 마부에 불과하고 나이도 많아 새로이 아내를 얻는 게 쉽지 않았다.
설령 자신과 함께하고 싶은 여인이 있다 해도 별 볼 일 없는 여인일 것이었다. 그에 반해 은정랑은 예쁘게 생겼고 게다가 그동안 관리도 잘해 놓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녀의 신음소리가 아주 끝내준다는 것이었다.
“정랑, 내 곁으로 돌아오시오! 그리고 서도! 전에 당신이 큰 잘못을 하긴 했지만 난 개의치 않소. 난 당신을 용서할 것이오.”
허대실은 정의롭고 늠름한 모습으로 말하며 아주 대범하게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하지만 은정랑은 그가 하는 말을 들으니 구역질이 치밀었다. 이런 뻔뻔하고 천한 인간이 그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더러워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난 지금 동가東街의 말 파는 상점에서 일해 한 달에 은화 두 냥을 받고 있소! 이 돈이면 당신과 서를 먹여 살리고 우리 식구가 생활하기에 충분하오.”
허대실의 이 말에 은정랑은 낯빛이 새파래지더니 하마터면 속에 든 것을 게울 뻔했다.
“서는 더 이상 손에 붓을 들 수 없고 다리도 망가졌다고 들었소.”
허대실은 옅은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망가졌으면 망가진 거지, 뭐. 그게 뭐 대수라고! 앞으로 나와 함께 말을 닦고 씻기면 되오. 손발이 불편해도 고생을 견뎌 내려는 마음만 있다면 할 수 있을 것이오. 품삯이 좀 적을 뿐이지. 아마 은화 한두 냥밖에 못 받겠지만, 우리 부자가 서로 도우면 집에서 쓸 만큼은 벌 것이오. 쓸 만큼만 벌면 됐지 뭐.”
허대실은 가족이 함께 사는 삶을 꿈꾸는 얼굴이었다.
‘서까지 데리고 함께 말똥 치울 생각을 하다니!’
은정랑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너무 화가 나서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
누가 그와 함께 말똥을 치우려고 한단 말인가? 허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자신들을 모욕하는 게 아닌가?
덕분에 은정랑은 지금 엽승덕이 아무리 무능하고 쓸모없다고 해도 눈앞에 있는 이 뻔뻔하고 천한 마부보다는 훨씬 수준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허대실의 말은 자신들 모자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썩 꺼지라고!”
은정랑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벌컥 성을 내며 고함을 쳤다.
“정랑…….”
“아직도 안 가고 있네!”
은정랑은 손에 든 커다란 대나무 장대를 다시 그에게 휘둘렀다.
“악! 그만 때리시오! 아무튼… 난 진심이오. 진심으로 당신과 서를 데려가고 싶소. 또 오겠소!”
허대실은 다부진 몸을 돌려 담벼락에서 뛰어내리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은정랑은 분에 못 이겨 어깻숨을 몰아쉬었고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용서 못 해! 천한 놈! 뻔뻔한 놈! 역겨운 놈! 다시 오겠다고? 그럼 올 때마다 두들겨 패 줄 거다! 어디 또 올 수 있나 보자!’
짤랑.
‘짤랑’ 소리와 함께 갑자기 담벼락 뒤에서 조그만 뭔가가 던져지더니 은정랑 옆에 툭 떨어졌다. 은정랑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뜻밖에도 그곳엔 은화 한 냥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냅다 달려가서 그 은화를 주웠다.
몰래 장신구를 조금 숨겨 두긴 했지만 그건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물건이며,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재산이니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은정랑이 평소 쓰는 돈은 전부 엽승덕이 고생해서 벌어 온 돈이었다.
그러니 최근 들어 은화를 만져 본 적이 없었다. 요즘 만져 본 거라곤 그녀가 부유하게 살던 때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던 동화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뜻밖에도 하늘에서 은화 한 냥이 떨어지니 은정랑이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랑, 당신과 서가 지금 어렵게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소. 그러니 우선 그걸 쓰시오.”
담장 밖에서 허대실의 역겨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어 그가 떠나면서 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은정랑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고 손에 쥐고 있는 은화를 당장 집어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마음만 그랬을 뿐, 아까워서 진짜로 다시 돌려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방금 전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던 허대실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렇게 거부감이 크게 들지 않았고 심지어 기대감마저 조금 들었다.
* * *
한편, 엽승덕은 길모퉁이에서 지독하게 뜨거운 태양을 이고 후덥지근한 날씨를 견디며 서신을 써 주고 있었다. 은정랑이 집에서 전남편의 은화 한 냥을 받고 그에 대한 거부감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린 건 당연히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엽승덕은 오늘 서신을 두 장밖에 못 써 이십 문文도 벌지 못했다. 겨우 이 정도 돈으론 고기를 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쌀과 기름, 소금도 간신히 살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짜증이 났다. 특히 엽연채가 닭다리를 뜯으며 자신을 비웃던 모습을 떠올리자 분통이 터져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왜 그런 뻔뻔한 것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 걸까! 게다가 왜 그렇게 풍요롭게 살고 있는 걸까!’
엽승덕은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자신을 위로했다. 조만간 주운환이 전쟁에서 패하기만 하면 주씨 가문과 엽연채도 끝장일 것이었다. 한때 잘나갔던 장원 급제자 사위를 잃게 되면 이혼한 과부인 온씨도 사람들에게 지독한 괴롭힘을 당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속이 편치 않았다. 무더운 날씨에 이곳에서 찌는 듯한 더위를 견디며 서신을 써서 동화 몇 문을 벌었다. 이 돈으론 엽연채가 먹던 간식도 사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가슴속에서 분노와 원망이 치밀었다.
‘하늘은 왜 이리도 무심한 걸까? 왜 그런 파렴치한 놈들의 목숨을 거둬가지 않는 걸까!’
“저기요. 서신을 써 주나요?”
갑자기 누군가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어 조그만 그림자가 그의 앞에 드리워졌다.
엽승덕이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어 보니 열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앞에 서 있었다. 청초하게 생긴 편인 소녀는 물고기가 그려진 지우산을 들고 뙤약볕을 피하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니 딱 봐도 부잣집에서 부리는 여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