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0화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양왕은 분통이 터졌다. 황궁에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언동이 달려오더니 이 어리석은 여편네가 안 보인다고 아뢰었다.
그 순간 양왕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었다고 의심했고 화가 나서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벌건 대낮에, 도성 근처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왕비를 납치한 것이었다.
이건 자신에게 대놓고 도전장을 내민 격이 아니겠는가? 왕비마저 잃어버리면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양왕은 곧장 사람을 보내 그녀를 찾게 했고 도성 전체를 이 잡듯이 뒤졌다. 그리고 그동안 ‘이 어리석은 여편네가 지금 어떤 꼴로 울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앵기를 찾느라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던 그는 무연憮然(크게 낙심하여 허탈해하거나 멍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글쎄 이 여편네가 꽃등을 들고 팔짝팔짝 뛰고 있는 게 아닌가.
양왕은 화가 나서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하.”
양왕은 분노가 극에 달하자 되레 웃음이 나왔다.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어가 그 아래에 놓인 박달나무 태사의에 앉았다.
조앵기는 침상에 엎드린 채 감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일어나거라.”
잔물결도 일지 않을 듯한 평온한 목소리였지만 조앵기의 귀에는 격렬한 천둥이 치는 것처럼 들렸다.
조앵기는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하는 수 없이 달달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걸어가 그의 앞에서 멈춰 서더니 미동도 하지 못했다.
“오늘 어디에 갔던 것이냐?”
양왕은 가늘고 긴 손가락을 꽃무늬가 조각된 박달나무 찻상 위에 올려놨다. 뼈마디가 선명히 드러나는 손가락으로 찻상을 톡톡 두드리면서 낮고 묵직한 소리로 물었다.
조앵기의 조그만 심장은 그가 찻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따라 두방망이질했고 자그마한 몸은 발발 떨고 있었다.
“태후 마마께서 궁으로 부르셨어요.”
그녀는 입을 오므리며 조그만 목소리로 답했다.
“문안 인사를 드린 다음 바로 떠났어요.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마차가 망가졌어요……. 모두 마차를 고치고 있었고 전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에 한 노부부가 마차 한 대를 몰고 저에게 다가와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전… 전 그 마차에 탔어요…….”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 갔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냐?”
양왕의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졌고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조앵기는 몸을 파들파들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걸핏하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며 이렇게 저를 질책했다.
“그렇게 낯선 사람을 따라가 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조앵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양왕의 수려한 얼굴이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말하거라!”
“납치를 당해… 팔립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조그만 입을 삐죽거렸다.
“하하, 어찌 되는지 알고 있었구나!”
양왕은 노여움이 극에 달하자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조앵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팔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랬다면 적어도 이곳에 서서 그에게 혼쭐이 나지 않아도 됐을 테니 말이다. 자신을 산 사람이 불구이면 저를 때리지 못할 테고 반편이라면 저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양왕은 조앵기의 표정을 쳐다보며 붉고 탐스러운 입술을 씩 올리며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고, 매력적인 두 눈엔 싸늘한 빛이 번득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어? 너같이 못생기고 우둔한 인간은 데려가서 판다고 해도 팔리지 않을 게다! 너에게 양왕비라는 품계가 없었다면 내 진작에 널 버렸을 것이다!”
그 말에 조앵기는 가슴이 찌릿했으나 그저 고개를 떨군 채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여기 서서 꼼짝도 하지 말거라!”
양왕은 소매를 홱 뿌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살인귀 같은 모습을 한 양왕이 정원으로 나오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있던 시녀와 마마들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어댔다.
양왕은 그들을 지나치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명했다.
“전부 처리하거라!”
이어 그는 대문 밖으로 사라졌고 뒤에선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왕 전하. 살려 주십시오!”
“전하! 살려 주십시오. 소인들이 부주의해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했나이다. 다음번엔 절대로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겠나이다!”
“마마!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이번만 소인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정원에선 울부짖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조앵기는 방 안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이미 수도 없이 일어났다. 이런저런 사소한 일 때문에 자신을 곁에서 모시는 시녀들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모른다.
* * *
조앵기가 떠나자 엽연채는 흥이 가셨고 추길과 혜연은 낯빛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특히 추길은 놀라서 심장이 곧 멈춰 버릴 것만 같았다.
“양왕 전하는 성격이 까다롭고 까칠하기로 유명한 분이에요. 부드럽고 점잖은 태자 전하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분이 전부터 왕비 마마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고 해도 왕비 마마는 어쨌든 왕비 마마이고 양왕부 전체를 대표하는 얼굴이세요…….
그런 왕비 마마가 실종됐으니 분명 양왕부는 발칵 뒤집혔을 거예요. 양왕부에서 마마를 오랫동안 찾았을 텐데… 아가씨가 마마를 숨겼으니 양왕 전하께서 저희에게 얼마나 앙심을 품고 계실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 말하는 추길은 초조한 마음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넌 겁이 정말 많구나?”
제민은 코웃음을 치더니 그녀를 쓱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와 마주치지 않았다면 왕비 마마는 벌써 납치를 당했을 거야! 어느 두메산골에 팔려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자!”
엽연채는 하품을 하더니 추씨 가문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화려한 등불이 처음 밝혀지는 초저녁 술시戌時(오후 7~9시)가 절반밖에 흐르지 않은 때라 야시장이 가장 시끌벅적한 시간이었다. 번화가 곳곳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파는 노점상이 가득했다.
“아가씨……!”
앞서 걸어가던 혜연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엽연채를 불렀다.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혜연의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보니 길가에 소병燒餠(밀가루를 반죽해 한쪽에 참깨를 뿌려 구운 것)을 파는 노점 하나가 있었고, 그 옆에 낡고 허름한 작은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초라한 차림을 한 중년 사내가 그 탁자 앞에 앉아 무명옷을 입은 할멈에게 서신을 써 주고 있었다.
“글씨를 이렇게 엉망으로 쓰면서 한 장에 십 문文을 달라니! 이거 완전 날강도 아니야!”
무명옷을 입은 할멈은 서신을 쓰는 그를 쳐다보며 타박했다.
돈 버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렇게 핀잔까지 들어야 하다니, 엽승덕은 정말이지 분통이 터져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전에는 자신이 거리를 걸으면 다들 깍듯이 세자야라고 불렀고, 그 누구도 감히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나 이제 자신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리 제게 삿대질을 하며 듣기 싫은 소리를 해 대는 것이었다.
화가 난 엽승덕은 당장이라도 손에 든 서신을 할망구의 얼굴에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그 순간 좀 있으면 집에 또 쌀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 며칠 동안 그는 매일같이 죽과 짠지만 먹었기에 생각만 해도 신물이 넘어왔다.
하지만 안 먹으면 굶어 죽을 거고, 돈을 벌지 않으면 죽과 짠지마저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엽승덕은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 이제 와서야 그는 비로소 이 세상이 이렇게나 살기 힘든 곳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머릿속에 그저 돈을 많이 벌어 고기 한 점만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 한 가지 더 있었다. 자신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생각 말이다.
엽승덕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서신을 적었고 마침내 서신을 완성했다.
“글씨가 이리 엉망이니 오 문文이면 되겠네.”
그 할멈은 돈을 던진 후 서신을 들고 잽싸게 내뺐다.
엽승덕은 미치도록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힘이 없으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삶은 사람을 옴짝달싹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어디 할멈을 쫓아갈 기력이 있을까.
이때,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엽승덕은 또 손님이 왔다고 생각해 얼른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부시게 곱고 아름다운 외모에 단아하고 맵시 있는 자태를 뽐내는 한 소녀가 손에 꽃등을 들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엔 화려하게 반짝이는 홍옥 장식과 금색 술이 달린 복숭아꽃 잠을 꽂고 있었고 값비싼 운금雲錦으로 만든 대금식 유군을 입고 있었다.
엽승덕은 그녀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딸 엽연채였다. 그러자 그의 눈길은 또 저도 모르게 추길과 혜연에게 향했다. 두 여종은 최고급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엔 금잠을 꽂고 있었다. 개중 아무거나 하나만 가져와도 그들 세 식구가 보름은 먹고 살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자 그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고 몹시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은 왜 이리 불공평한 걸까? 흉악하고 못돼먹은 저 딸년은 왜 호의호식하며 사느냔 말이다. 그에 반해 진실한 사랑을 위해 부귀영화를 버린 위대한 자신은 이렇게 궁상맞게 살고 있으니, 정말이지 너무도 불공평했다.
엽연채 일행을 마주하자 엽승덕은 그들이 일부러 거들먹거리며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러 왔다고 생각했다. 창피한 모습을 이 원수들에게 보이고 말았으니 엽승덕은 난처하고 거북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내며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이 지금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면 뭐 하겠느냐? 정신은 공허한데.”
그 말에 엽연채는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본래 엽승덕을 상대할 생각이 없었으나 그가 먼저 주둥이를 놀리니 응당 받아 줘야 할 터였다. 엽연채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조롱하는 눈빛으로 그의 보잘것없는 몰골을 감상했다.
“너희들이 아무리 부귀하다 한들 의지할 데 없는 고독한 신세 아니냐! 온씨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과부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나와 정랑은 아무리 곤궁한 생활을 한다 해도 짝이 있고 서로 뜻이 잘 맞는 부부다. 아무리 힘든 나날을 보내도 달콤하기만 하다.”
엽승덕은 그리 말하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음…….”
그 말을 들은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비웃음을 짓더니 뒤에 있는 추길에게 손짓을 했다.
“하지만 당신들은 고기를 못 먹죠!”
그 말에 엽승덕은 표정이 굳어졌고 눈치 빠른 추길은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그녀에게 건넸다. 봉투를 건네받은 엽연채는 안에서 닭다리 하나를 꺼내더니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는 냄새가 주변으로 확 퍼져 나가 코를 찔렀다.
제민도 그 봉투에서 간장에 졸인 소고기를 꺼냈고 혜연은 닭발을, 추길은 구운 양고기를 꺼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오도독 소리를 내며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